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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4.07.02. 새벽예배 - 누가 너를 세웠느냐(출애굽기 6)



출0211to15 - 누가 너를 세웠느냐(출6).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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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 : 출애굽기 2장 11-15절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는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닮은 모습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우리에게 영혼이 있는 것도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그렇고, 우리가 하나님을 마음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의 생각을 헤아리려고 하는 것 또한 그렇습니다. 영원을 생각하며 영원한 것을 추구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닮은 지성, 그러니까 생각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 생각하는 능력은 사실 어떤 것을 판단하기 위한 것인데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각하는 능력을 주신 이유는 제 생각에는 무엇이 더 가치있고 덜 가치있는지를 제대로 판단해서 더 가치있는 것을 앞세우고 덜 가치있는 것을 뒤에 놓으며 살아가라고 그러 신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맨 앞 자리에 가장 가치있는 하나님을 놓고 그 다음에는 그 다음 가치있는 것을 놓고, 또 그 다음에는 그 다음 가치있는 것을 놓고….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죄인이 되면서 부터 이런 능력이 거의 망가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 자리에 자기 자신을 놓아두면서 부터 자기 자신의 삶은 물론이고 이 세상도 망가뜨리면서 살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가인입니다. 가인도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 제사까지 드리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느 해인가는 한 해를 마무리하는 제사를 지내다가 하나님께서 자기가 드린 제사를 받지 않으시고 동생이 드린 제사는 받으시자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 들판에서 동생을 죽여서 숨겨 버리고 맙니다. 최초의 살인자이자 또 존속 살해자이자 죄 없는 의인을 죽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가인이 이런 일을 저지른 진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가인이 자신이 중심이 되고 기준이 되는 삶의 태도를 가지게 되었고 심지어는 하나님과 하나님을 섬기는 일까지, 그리고 동생의 존재까지도 그러한 태도와 사고방식으로 평가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기 중심적이 되면, 자기가 우주의 중심과 기준이 됩니다. 가인이 그랬습니다. 가인은 하나님을 섬긴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그 행동을 통해서 자신을 섬겼습니다. 제사도 그래서 드린 것이죠. 하나님께서 자신을 받아주시고 인정해 주셨다는 그 만족을 얻기 위해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자기 제사를 안 받아 주신 겁니다. 정상적이라면 회개하고 제 자리로 돌아가야 하는데 가인은 그 반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화를 냅니다. ‘감히 내 제사를 안 받아? 그리고 동생의 제사는 받아?’하고 말입니다. 이런 눈으로 보니 동생은 사랑하는 동생이 아니라 자신을 불의하게 만든, 하나님 앞에서 거절 당하게 만든 당사자로 보였습니다. 동생의 의로움은 가인의 불의함을 더 확실히 드러내는 역할을 했다고 여겨진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도 없는 들판으로 가서 동생을 돌로 쳐 죽이고 아무도 모르게 파 묻어 버린 것입니다. 가인은 그렇게 해서 다시 온 세상의 중심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동생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하나님까지도 자기 마음대로 하려는 마음을 품었던 것입니다. 


제가 갑자기 가인의 이야기를 들려드린 이유는 오늘 본문에 나온 모세의 모습이 이 가인의 모습과 너무나도 닮아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유대인이면서 바로의 궁전에서 바로의 딸의 양자로 양육받고 교육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잊지는 않았지만 그런 성장과정은 분명히 모세가 자기 자신을 자기 민족의 지도자급으로 여기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모세의 모습이 그것을 보여주고 있지요. 그는 자기 동족을 괴롭히는 애굽 사람을 죽여 버립니다. 그리고 동족을 괴롭히는 또 다른 동족을 지도하려고 듭니다. 스스로 재판관이 되고 왕이 되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어제도 살펴 보았듯이 그 누구도 모세를 그 자리에 세우지 않았고, 또 모세를 그런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런 권위를 위임해 주신 적이 없으니까요. 


우리는 아담의 후손이기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 왕이 되고자 하고 또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욕망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구속받기 싫어하고 다 자기 마음대로 하면서 살아가고 싶어하고, 남이 참견하면 기분이 나빠지고… 이런 것들이 다 아담적인 기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심지어는 사람들이 다른 이들에게 친절을 베풀고 선을 행할 때도 상대방이 자신이 원하는 반응을 보여주기를 원하고 그런 반응을 보여주지 않을 때는 불쾌해 하고 심지어는 화를 내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반응을 강요하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물론 저 자신도 그랬을 때가 굉장히 많았구요. 바로 이런 모습들이야 말로 자신이 모든 것의 중심이 되고 또 왕이 되고자 하는 우리 마음의 욕구를 그대로 드러내는 모습인 것 같습니다.


모세는 스스로가 스스로를 재판관과 왕으로 세웠습니다. 그랬더니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괴롭히는 사람은 얼마든지 죽여도 되는 대상으로 판단하게 되었고, 자기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항상 자신의 지도를 받아들여야만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들은 그의 행동으로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애굽 사람은 제거해 버렸고 동족 앞에서는 지도자로 자처한 것이죠. 가만히 생각해 보시면 이게 얼마나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인지 알 수 있습니다. 동족을 두드려 패는 것보다 아무도 보지 않을 때를 노려서 애굽사람을 쳐 죽이는 일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악합니다. 그런데, 모세는 자신이 훨씬 더 악한 일을 저질러 놓고 훨씬 가벼운 악을 행하는 사람을 비난하고 가르치는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스스로가 왕이 되면 그 사람은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선을 행하기가 굉장히 어려워 집니다. 자기가 기준이 될 때, 사람은 선악을 분별하고 자기 자리를 지킬 사고능력을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막을 수 있는 단 한 가지의 방법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제대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가장 가치있는 것을 처음 자리에 놓는 것 말입니다. 바로 하나님을 제일 처음 자리에 놓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아무리 높아져도 나는 항상 하나님 다음 자리일 수 밖에 없고, 또 하나님 다음 자리보다 높아져서는 안된다는 것을 삶의 원칙으로 삼고 그 원칙을 끝까지 지켜내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모세의 경우처럼 나는 선하다고 생각하고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 하는 일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힘들게 하며,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다른 사람들을 향한 심한 폭력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상관이 없는 것은 물론이구요. 


항상 나를 다스리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재판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며, 나는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판단 아래에서 순종하며 살아가야 하는 피조물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항상 가장 아름다운 질서 속에서 살며 다른 이들을 유익하게 하는 삶을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