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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4.07.03. 새벽예배 - 그 이름을 게르솜이라 하여(창세기 7)



출0216to22 - 그 이름을 게르솜이라 하여(출7).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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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 : 출애굽기 2장 16-22절




모세는 잘못된 시기에 잘못된 방법으로 자기 동족을 위하여 나섰다가 미디안 광야의 떠돌이 신세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모세가 곧바로 아내인 십보라를 만난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아마도 그러기까지 상당한 시간을 미디안 광야를 떠돌며 지냈던 것 같습니다. 하루는 모세가 지친 몸을 쉬기 위해서 우물가에 앉아 있었습니다. 어디나 못된 사람은 있게 마련인지 어떤 목동들이 그 우물로 물을 길으러 온 미디안 제사장 르우엘의 딸들을 쫓았습니다. 아마도 자기들이 먼저 충분히 짐승들에게 물을 먹이고 나서 르우엘의 딸들이 물을 긷도록 하려는 것이었겠지요. 하나 밖에 없는 우물이고 여인들이 멀리서 힘들게 물을 길으러 왔으면, 어차피 물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양보하고 돌봐주면 더 아름답고 멋있을 텐데 목동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참 인간이 얼마나 악한지 그런 일을 통해서 자신들의 힘과 우위를 과시하며 자기 존재를 증명해 보이려고 했던 것이죠. 그런데, 그 날은 모세가 그 광경을 보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참지 못하고 나서서 여인들을 도와 곤경에서 건져 주고 물을 길어 가도록 해 주었습니다. 


모세는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습니다. 광야를 떠도는 처량한 도망자 신세가 되었는데, 그런 귀찮고 어떻게 보면 위험하기까지 한 일에 끼어들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했습니다. 이렇게 보면 모세는 자기 동족들 뿐만 아니라 부당하게 괴롭힘을 당하는 약자들을 도와주려는 마음이 굉장히 강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닮은 아주 바람직한 지도자의 자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애굽에서 바로 그런 마음을 따라 행동을 취했다가 광야의 떠돌이 신세가 되었고 도망자 신세가 되었지만 여전히 그 마음을 잃어버리지 않고 있던 것입니다. 약한 사람들을 보면 돕고 싶어지고 부당하고 불의한 일을 보면, 의로운 분노를 느끼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에게는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사용하는데 있어서는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모세는 애굽에 있을 때는 자기 안에 있는 좋은 마음을 행동으로 옮기는데 있어서 무분별했습니다.그래서 그런 낭패를 보게 된 것이죠. 그러나 이번에 모세는 똑같은 마음을 따라 행동했지만 분별력 있게 행동했습니다. 


모세는 이 일로 인해서 르우엘 집안과 인연을 맺게 됩니다. 자초지종을 들은 르우엘이 모세를 초청했고 모세는 그 초청을 받아들여 그 집에서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거기서 모세는 르우엘의 딸 십보라를 아내로 맞이하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떠돌이 신세를 면하고 가정을 얻게 된 것입니다.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개 올바른 일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행하면 그 일은 이런 식으로 흘러갈 때가 많습니다. 순적하게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선한 마음을 따라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지 않은 방법으로 반응하면서 살게 되면, 그것이 당장은 손해 보는 것처럼 여겨져도 결국에는 오히려 예기치 못한 좋은 열매로 드러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적어도 과정 중에서 스스로 뿌릴 수 있는 좋지 않은 씨앗들은 최소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십보라에게서 아들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그 아들에게 조금은 독특한 이름을 붙여 주었습니다. 그 이름은 게르솜이었는데, 나그네라는 뜻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타국에서 나그네가 되어 살아가는 자신의 신세를 처음으로 얻은 아들에게 그대로 투영했던 것입니다. 모세는 자기 자신을 ‘나그네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는데요. 그렇다면 그는 그의 말처럼 이제서야 타국에 와서 사는 나그네가 ‘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원래 나그네였습니다. 애굽도 그의 고향이 아니었고, 그래서 그는 나그네 였습니다. 그저 바로의 궁에서 유복하게 살아가느라고 그 사실을 느끼지 못했다가 미디안 광야에 나와서 살아가면서 비로소 자신의 나그네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애굽에서 그토록 힘겨운 삶을 살게 되었던 이유는 그들은 거기서 영구 거주자가 아닌 나그네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터를 잡고 살아가야 할 곳이 따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바로의 궁에서 광야로 도망쳐 나와 살면서 자신이 나그네임을 절감했습니다. 그리고 내일 보겠지만 이스라엘 민족은 요셉 덕분에 편안하게 살던 세월이 끝나고 곧바로 이어진 모진 압제로 인해서 자신들이 나그네라는 것을 깨닫고 되었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지도자도 그리고 백성들도 나그네 삶을 끝내고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지도자도 백성들도 자신들이 가야할 곳으로 갈 준비를 마치게 된 것입니다. 


성도들에게 있어서 가장 위험한 것은 바로 이 세상이 우리가 영원히 거할 곳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도가 이런 생각을 품게 되는 이유는 항상 똑같습니다. 이 세상이 너무 편하고 너무 좋기 때문입니다. 너무 좋으니 나그네로 살아가기가 싫어지는 것이고 또 나그네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성도는 세상과 뒤섞여 버리고 맙니다. 생각도 마음도 그리고 목적이나 살아가는 모습도 믿지 않는 사람들과 전혀 구별이 없어지고 맙니다. 저는 현대의 기독교회가 상당부분 이미 이렇게 되어 버린 것이 아닌가 합니다. 목회자들은 더 이상 하늘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성도들의 마음 속에서도 하늘에 대한 소망이 희미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설교자들은 이 땅에서 새련되고 복되게 살아가는 방법을 설교하며, 성도들은 땅의 복을 누리는 방법을 듣고 싶어 합니다. 목회자는 나그네임을 잃어버린 모세가 되었고 성도들은 나그네임을 잃어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제는 세상이 교회를 핍박하기 시작했습니다. 욕하고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애굽이 애굽생활에 익숙해져 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을 핍박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일부러 이 세상과 갈등을 일으킬 필요는 없습니다. 나그네라고 항상 자신이 여행하는 세상을 향해 적대감을 품고 싸워야 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그렇지만 그렇게 나그네로 살기 때문에, 여전히 본향을 향해서 여행하고 있기 때문에 생겨나는 불편함이 있다면 그것을 마다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만약 진짜 성도라면 우리가 아무리 그렇게 한다고 해도 이 세상이 우리의 영원한 본향이 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 자신답게 살려고 하다가 우리에게 다가오는 불편함이나 손해가 있을 때는, ‘아, 내가 나그네라서 그렇구나. 여기가 나의 영원한 본향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구나.’ 하면서 내가 누구인지 그리고 지금 내가 사는 이 곳은 그런 나에게 어떤 곳인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이 세상을 여행하는 나그네라는 사실을 확실히 인식하고 잊지 않으면서 살아갈 때, 비로소 우리가 가야 할 본향으로의 여행을 계속할 수 있습니다. 항상 하나님께서 주신 선한 생각과 마음을 분별력 있게 사용하시면서 최선을 다해서 나그네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나그네로 사는 삶을 두려워 하거나 피하려고 하지 마시고 그것이 나를 하늘로 여행하는 여행자로 살게 하는 힘이 됨을 기억하시면서 한 걸음 한 걸음 영원한 본향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