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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4.07.04. 금요기도회 -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사도행전 68)


행1122to26 -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사도행전68).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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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도행전 11장 22-26절




계속해서 안디옥 교회에서 일어났던 부흥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데요. 오늘은 안디옥 교회가 아니라 그 교회를 돌보고 더 든든하게 세웠던 바나바라는 사람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모든 성도들은 그것이 자신이 다니는 교회이든 아니면 기독교교회 전체를 의미하는 것이든 교회가 불일듯 일어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은 참 좋은 일일 것입니다. 복음이 전해지고 그 복음을 통해서 사람들이 몸된 교회로 물밀듯 쏟아져 들어온다면 정말 얼마나 영광스럽고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이런 일들이 벌어지면 그렇기 때문에 생각하지 못했던 어려운 일들도 많이 발생하게 됩니다. 실제로 지금 한국교회가 겪고 있는 문제는 그래서 생겨난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 교회는 차분히 성장한 교회가 아닙니다. 전 세계가 놀랄 정도로 폭발적으로 성장한 교회입니다. 참 감사하고 영광스러운 일이죠. 그렇지만 그런 일은 한국 교회 안에 이제는 손도 대기 어려운 문제들을 많이 남겨 놓고 말았습니다. 


교회가 폭발적으로 성장한다는 것은 성도의 숫자가 어마 어마하게 늘어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두 가지 어려움이 생깁니다. 첫째는 교회 안의 질서와 덕이 깨지게 됩니다. 아직 온전히 거듭나고 성숙하지 않은 사람들이 교회 안에 들어와서는 자기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가치관이 생각들을 걸러내지 않고 그대로 쏟아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둘째로 성도들을 가르치고 지도할 목회자들을 충당하기가 굉장히 어려워 집니다. 사람이 갑자기 많아지면 그만큼 많은 목회자들이 필요하기 마련인데, 그래도 신뢰할 수 있는 목회자를 길러내는 것은 굉장히 긴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밀려드는 사람들은 그럴 여유를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속성으로 목회자들을 양성하게 되니까 결국 목회자들의 평균적인 자질이 떨어지고 그것은 교회의 신앙의 질적 저하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현실적인 면에서 본다면 개교회나 한 나라의 교회나 너무 급작스럽게 성장하는 것은 그렇게 좋은 것만은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사실 현재 한국 교회가 겪고 있는 문제는 바로 이런 일들 때문에 생겨나지 않았나 합니다. 


이렇게 보면 안디옥 교회 안에도 이런 문제들이 아주 없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을 붙들고 있어서 그런 문제가 바깥으로 터져 나오지 않았던 것 같지만 그냥 내버려 두면 결국 안디옥 교회 안에도 어려운 문제들이 많이 생겨날 수 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예루살렘 교회가 안디옥으로 파송한 바나바의 역할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교회를 세우고 또 성숙시키는 것은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일을 교회의 지도자라는 ‘사람’을 통해 하십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도구가 되고 하나님의 능력이 교회로 흘러 들어오게 하는 통로가 되기 때문에 그 사람의 역할 또한 무시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대개 하나님께서 들어 쓰신다, 하나님께서 귀하게 사용하신다는 말을 사용하는데요. 이게 우리야 어떻게 하고 어떤 상태에 있든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그렇게 하신다는 뜻으로 사용된다면 그건 정말 넌센스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만들거나 고치기 위해서 기계를 사용하려고 할 때도 그 기계를 점검하고 고장난 곳은 고쳐서 어느 정도는 제대로 기능을 발휘할 수 있을 때 사용하는 법인데, 하나님께서 그 중요한 하나님의 일을 시키시면서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을 닥치는 대로 사용하신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24절에서 바나바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간략하지만 아주 인상적으로 설명하고 있는데요. 왜 그랬을까요? 안디옥 교회의 부흥이라는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이야기하면서 왜 성경은 바나바 개인을 칭찬하는 듯한 이야기를 중간이 끼워 넣었을까요? 그것도 마치 안디옥 교회의 부흥이 바나바의 공로로 여겨질 정도로 직접적으로 그의 됨됨이와 부흥을 연결시키고 있을까요?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 사람의 됨됨이와 영적인 자질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둘 사이의 관계가 직접적이라고 할 만큼 말입니다. 안디옥 교회가 그렇게 순간적으로 수적인 면에서 폭박적인 성장을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이라는 영광스러운 별명을 얻었고, 그러면서도 계속해서 성장해 갈 수 있었던 데에는 바나바의 역할이 정말 컸습니다. 이것은 그의 능력이 탁월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가 능력이 대단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서 그렇게 아름다운 일을 행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경이 바나바에 대해서 설명하는 내용은 그런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첫째 성경은 바나바를 보고 ‘착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착한 사람을 좋아하십니까? 대개 사람들은 착한 것만으로는 안된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는 착한기만 한 사람을 싫어한다고까지 말합니다. 왜 이런 이야기들을 하는지 이해가 됩니다만 사실 이런 이야기들이 나오는 이유는 착하다는 말이 굉장히 심각하게 오해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성도들의 입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올 때에는 그 분은 성경이 착하다는 말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제대로 착한 것은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아주 중요한 자질입니다. 일반적으로도 그렇지만 성도에게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성도라면 지금부터 제가 말씀드리는 의미로라면 반드시 착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대개 착하다는 말을 들을 때, 선천적인 선량함을 생각합니다. 물론 이런 선량함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저처럼 이런 선량함이 부족한 사람들은 그것을 얻기 위해서 여분의 노력을 기울여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착함은 이런 의미를 포함하기는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닙니다. 토요일에 남성반 성경공부를 하다가 제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생각 없이 그냥 착한 것하고 성경적인 원리를 따라 제대로 생각할 줄 알면서 조금 못된 것 하고 둘 중에 어떤 것이 더 좋습니까? 신앙적인 입장에서 볼 때 둘 중에서 어떤 것이 더 바람직할까요?” 성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신앙적인 입장에서 볼 때, 그저 착한 것 하고 그만큼 착하지는 않아도 제대로 성경을 따라 생각하면서 그것에 따라서 살려고 노력하는 것, 성경은 더 가치있게 여기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두 번째입니다. 그것은 성경이 선하다고 말하는 것은 기준이 분명한 선함이고 사람이 그 기준에 따라서 살아갈 때 그 사람을 선한 사람이라고 평가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바나바는 그야 말로 착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차원에서만 착한 사람은 아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바나바에 대한 착하다는 평가가 사람들의 평가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평가라는 점을 잊으면 안됩니다. 성경이 어떤 것이나 어떤 일을 선하다고 말할 때, 그 의미는 하나님 보시기에 좋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의 눈에서는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기준으로 볼 때 좋으면 그것을 선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사람들이 되려면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선함의 기준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지식을 기준으로 해서 눈 앞에 보여지는 일들을 생각할 줄 알며, 그 생각에 따라서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적으로 볼 때는 못된 사람도 착하다는 평가를 들을 수 있습니다. 아직 덜 된 사람도 선하다는 칭찬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자기의 본능과 인격의 덜됨과 상관 없이 하나님의 뜻을 헤아릴 줄 알고 자기의 뜻과 욕심을 그 뜻에 복종시킬 줄 안다면 그 사람은 선하고 착한 사람입니다. 제가 쉽게 적용할 수 있는 무엇이 선한 것인가를 판단하는 기준을 두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것만 잘 사용하셔도 하나님이 선하다고 하시는 기준 하나 하나를 다 몰라도 충분히 하나님 보시기에 착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 자기 자신에게 정직한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선택하거나 옳다고 생각하는 일이 과연 나의 이익이나 입장, 혹은 어떤 사람과의 관계 때문은 아닌지 이런 것들을 냉정하게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아는 사람이니까 편들어 주고 내 가족이니까 역성 들어주고 내 고향이니까 무조건 편들어 준다면 그 사람은 절대로 자신에게 정직할 수 없고 그러면 무엇이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것인지를 판단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오히려 나와 가까이 있는 사람이고 내 입장이나 이익과 관계가 깊기 때문에 더 냉정해 질 수 있어야 비로소 우리 자신에게 정직해 질 수 있습니다. 참 쉽지 않은 일이지만 이것이 안되면 하나님께서 선하다고 생각하시는 것은 제대로 찾아낼 수조차 없습니다. 그러면 항상 자기 자신이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내가 선하다고 생각하는 이것이 과연 하나님의 영광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구체적인 답이 나와야 합니다. 내가 선택하고 또 취하려고 하는 이것이 하나님의 성품에는 어떻게 어울리는지, 그래서 어떤 식으로 하나님을 빛나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 묻고 거기에 정직하게 대답해야 합니다. 단순히 내가 좋으면 하나님도 좋아하신다는 식의 생각으로는 절대로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것을 찾아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이렇게 해서 찾아낸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것이 있다면 그것에 자신을 순종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 보시기에 착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구체적으로 아는 지식까지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이 정도만 잘 하셔도 충분히 하나님이 선하다고 하시는 것을 찾아내실 수 있고, 그래서 하나님 보시기에 착한 사람이 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착함은 노력을 통해 얻어지는 것입니다. 비록 아직 덜 착하고 또 저처럼 못됐다고 하더라도 많이 생각하고 순종하려고 애쓰면 얻을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착함입니다. 사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선천적으로 착한 사람을 제외하면 그 누구도 하나님 보시기에 착한 사람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둘째로 바나바는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흔히 성령충만하는 말을 들으면 뭔가 특별한 능력을 생각합니다. 물론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성령충만하면 우리 속에 하나님의 능력이 부어집니다. 그러나, 이 능력이라는 것은 넓게 보면 은사에 속하는 것이어서 기능적인 것이지 성령충만함의 본질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능력이라는 것도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특이한 능력과는 전혀 다른 것일 때가 많습니다. 성령님은 거룩한 영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거룩하게 살아가려고 애쓸 때 거기 필요한 능력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런 거룩한 삶과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십니다. 제가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깨닫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을 따라 하나님께 순종할 때 가장 아름답게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면 뭔가 겉으로는 큰 일을 하고 대단한 일을 하는 것 같은데, 결국 덕스럽지 못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하는 것을 볼 때가 있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는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그들이 성령이 아니라 육체로 일했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보여지는 일의 크기를 크게 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이루어지는 일의 크기 또한 하나님께서 정하시니까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 성령님을 따라 일할 만큼 성령충만한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충만하고 그래서 성령님을 따라 일할 때, 그 나타나는 결과가 미미해 보여도 그것은 성령님께서 행하신 일이 됩니다. 그러나 나타나는 결과가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우리가 성령충만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저 인간적인 열정과 능력만으로 했다면 그것은 성령님께서 하신 일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다지 의미있는 열매가 맺혀지지 않습니다.  잘 짜여진 수많은 프로그램, 커다란 규모의 행사, 거기에 동원되는 수많은 사람들… 그러나, 어떻습니까? 나타나는 결과는 미미합니다. 모일 때뿐이고 할 때 뿐입니다. 프로그램이나 행사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그 일을 계획하고 진행하는 사람들이 성령님께 의지하고 성령님께서 일하시도록 자신을 성령님께 내어드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그 일들이 교회 안에서 신앙의 이름으로 행해지지만 인간의 일이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성령 충만함이란 어떤 현상이 아니라 성령으로 꽉 찬 상태를 말합니다. 성령님이 그 사람의 존재를 꽉 채워서 흘러 넘치시는 상태, 그것이 성령충만한 상태입니다. 그래서 성령충만한 사람들에게는 자기 자신이 없습니다. 적어도 그렇게 만들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쳐 복종시키려고 애쓰고 힘씁니다. 그렇게 자신이 비워지지 않으면 성령님께서 자신을 통해서 마음껏 일하실 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나바가 성령충만한 사람이었다는 말은 바로 이런 뜻입니다. 그가 능력을 떨쳐 행하고 구름을 타고 하늘을 날거나 엄청난 능력을 행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가 하나님의 일을 행함에 있어서 항상 자신이 아니라 성령님을 앞세우며 성령님께서 자신을 통해 일하시도록 자신을 온전히 내어드릴 줄 아는 그런 사람, 그래서 성령님의 일을 인간의 일로 바꾸지 않은 그런 사람이었다는 뜻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살펴보고 나머지는 다음 금요일에 계속 살펴보겠습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항상 하나님이 선하시다고 여기실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분별해 내려고 애를 썼고, 그렇게 얻은 답을 따라서 살고 또 일하려고 애쓰고 힘쓴 사람이었습니다. 그 길을 따라서만 움직이기를 원했던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바나바는 성령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성령님이 주시는 은혜를 전하고 또 성령님께서 자신을 통해서 마음껏 그리고 능력있게 일하시도록 항상 성령님을 앞세우고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성령님의 소욕에 따라서 살며 일함으로써 하나님의 일이 인간의 일이 되지 않도록 할 줄 알았던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면서 크든 작든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려면 우리에게도 이 두 가지의 영적인 자질이 꼭 필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것을 따라 사는 착한 사람이 되어야 하며, 또한 성령님께 자신을 내어드릴 줄 아는 성령충만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항상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한 것에 합당한 삶을 살며 자신을 겸손하게 성령님께 내어드림으로써 삶으로 그리고 섬김으로 진정으로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귀한 하나님의 일꾼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