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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4.07.09. 새벽예배 - 떨기나무 가운데서(출애굽기 10)


출0301to1206 -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출10).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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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 : 출애굽기 3장 1-6절




저는 어려서 부터 예수를 믿었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초등학교 4학년쯤이었던 걸로 기억되는데요. 정말 열심히 교회에 다니고 또 한 번도 예수를 믿지 않는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저의 인격 속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만난 것은 대학시절 처음 교회의 대학부 겨울 수련회에 참석했을 때였던 것 같습니다. 3박 4일 금식 수련회였는데, 그 때 하나님은 제가 육체적인 한계에 부딛혔을 때 급작스럽게 저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때 이후로도 제가 하나님이 다시 저를 찾아왔다고 표현할 수 있는 그런 경험을 통해서 저를 거듭해서 만나 주시곤 했습니다. 그렇게 만남이 거듭될 때마다 하나님은 저에게 큰 깨달음과 은혜를 주시고, 소명을 주셨고 제 속에 크고 작은 변화를 만들어 가셨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저를 찾아오셔서 만나실 때는 항상 제가 힘들고 어려울 때이지 아무런 문제가 없을 때나, 뭐 그럴 때도 거의 없었지만 영광스러울 때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저의 경우만 이런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거의 모든 성도들의 경험을 들어보면 행복하고 기쁠 때, 아무런 문제도 없이 평안할 때 하나님을 만난 것이 아니라 정말 힘들고 어려울 때, 심지어는 생명을 잃을 수도 있는 위기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보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찾아와 의미 있게 만나실 때는 거의 항상 우리들이 힘들고 어려울 때인 것 같습니다. 왜 그렇게 하실까 생각해 보니 그것은 하나님의 취향이 독특하셔서가 아니라 그럴 때 우리를 찾아오셔야 우리가 무방비 상태에서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은혜와 주시는 말씀을 받게 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인간이란 교만해서 당장 아쉬운 것이 없을 때는 하나님 앞에서 조차 고자세가 되는 못된 버릇이 있으니까요. 


하나님께서 모세를 찾아가셨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모세가 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을 칠 때” 모세를 찾아가셨다고 말합니다. 자기 양도 아닙니다. 우리 식으로 보면 이드로의 대릴사위가 되어서 이드로의 양을 치면서 광야를 돌아다닐 때, 그 때 하나님을 찾아가셨고 거기서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물론 모세는 그 이전에도 하나님을 믿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처음으로 하나님을 만났다고 표현할 수 있는 그런 만남은 광야의 호렙산에서 였습니다. 말이 산이지 이 호렙산도 나무 한 그루 없이 황량하기 그지 없는 돌산에 불과합니다. 그가 가장 낮고 어찌보면 의미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을 때, 그 외롭고 거친 땅 위로 하나님은 모세를 찾아가셨던 것입니다. 


처음에 모세가 본 것은 그저 이상한 광경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한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는데 그 불이 꺼지지를 않는 것입니다. 평상시 같으면 화르륵 그냥 타 없어져 버리고 말았을 텐데 말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다가가서 그 놀라운 광경을 보기로 합니다. 그리고는 그 나무를 향해 다가갑니다. 바로 그 때 그 떨기나무 한 가운데서 음성이 들려 옵니다. 그 음성은 모세를 부르는 음성이었습니다. “모세야, 모세야.” 이상하게 너무나도 친근하게 들리는 음성이었습니다. 모세는 반사적으로 대답했습니다. “제가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도 그랬지만 모세의 응답 또한 오래 전부터 섬겨온 주인의 부름에 응답하는 하인의 대답처럼 어색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만남은 사실 공식적으로는 하나님과 모세 사이의 첫번 만남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분명하게 밝혀 주셨습니다.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라고 말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불붙은 떨기 나무를 통해 찾아가셨던 것이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저 놀라운 일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 방법을 택하신 것이 아니라, 그 광경 속에 모세의 그 동안의 인생과 부르심, 그리고 앞으로 살아가야 할 삶의 모습을 모두 넣어서 보여주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불이 붙으면 금새 타 없어지고 마는 마른 떨기 나무, 그렇지만 불이 붙어 있는데도 꺼지지 않고 활활 타오르는 마른 떨기 나무… 이것은 모세에게 텅빈 그물이 베드로에게 의미했던 것과 같은 의미를 던져 주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모세의 지금까지의 삶은 자신이 그저 떨기나무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스스로 불을 질렀다가 금새 타 없어져 버렸던 떨기나무 같은 삶이었습니다. 뭔가 대단한 사람인 것 같았고, 그래서 자기 동족을 위해서 떨쳐 일어났지만 마치 절벽 위에서 수직하락을 하듯이 떨어져 내려서 아무도 알지 못하는 낮은 자리에서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마치 타다 만 검불이 들판을 굴러다니는 것처럼 말입니다. 


앞으로도 모세는 그저 한 그루의 떨기나무와 같을 것입니다. 만약에 스스로 타 오르려고 하면 스스로에게 불붙이려고 하면 금새 살라 없어지고 마는 그런 떨기나무 말입니다. 그러나, 계속 불타오르면서도 불 살라 없어지지 않을 수 있는 비결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스스로 자신에게 불을 붙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불로 불붙이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불은 불대로 꺼지지 않을 수 있고 모세 스스로도 타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로 우리가 힘들고 어려울 때, 우리가 한계에 부딛혔을 때, 우리를 찾아오시고 또 만나주시는 것은 우리에게도 모세에게 가르쳐 주셨던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가 고난과 역경으로 한계에 부딛혔을 때, 우리는 마치 불 타 없어진 가시떨기 같은 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그런 상태가 됩니까? 그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불을 질렀기 때문입니다. 그게 자기 인생이든 혹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이든 자기 의지와 열정, 그리고 능력으로 해 보겠다고 스스로에게 불을 질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쉽게, 그리고 스스로의 인생을 소진시키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나몰라라 하지 않으시고 그 때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찾아 오셔서 우리 자신의 참된 모습을 보게 하시고 그 다음에 앞으로 살아갈 날 동안 앞서 저질렀던 실수를 저지르지 않으면서 살고 또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십니다. 그 방법은 역설적이게도 모세가 보았던 그 떨기나무의 모습 속에 숨겨져 있습니다. 우리가 본문을 가만히 살펴보면요. 떨기나무 전체가 불에 타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절 앞 부분을 보시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불이 떨기나무 전체에 붙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불꽃은 그저 떨기나무 가운데서 부터 뿜어져 나오고 있었고 놀랍게도 하나님의 사자는 그 불꽃 안에서 나타났습니다. 


우리가 우리 삶을 최선을 다해서 살고 또 하나님께서 맡기신 소명을 열정적으로 감당하면서도 스스로 타 없어지지 않으려면 우리가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낸 불로 우리 자신을 불붙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얼마 지나지 않아 불도 꺼지고 우리 자신도 지쳐 버리고 맙니다. 불은 여전히 떨기나무에 불과한 우리 안으로부터 뿜어져 나와야 합니다. 그래야 불도 꺼지지 않고 우리 자신도 살라 없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도 여호와의 사자가 불 속에서 타나나신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듯이 불은 성경에서 하나님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스스로를 소멸하는 불이라고 말씀하시기도 하셨고 나중에 시내산에서 나타나실 때도 불로 나타나셨습니다. 


광야 같은 우리의 인생에 찾아오셔서 우리를 다시 만나주신 하나님께서는 이제 우리가 우리 자신을 불태우며 살지 말고 내가 너희 안에서 너희의 불이 되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나의 임재 가운데 살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항상 하나님의 은혜로 불붙어 있는 그런 삶을 살아서 비록 가시떨기 같은 우리이지만 항상 풍성함 가운데 타 없어지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