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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4.07.20. 주일오전 -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룻기 5)



룻0208to23 -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룻5).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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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 룻기 2장 8-23절




진짜로 있었던 일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지만 미국에서 꽤 큰 부자로 살았던 한 성도에 관한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 분은 그렇게 큰 부자였지만 지구 저편의 가난한 사람들, 먹을 것이 없어서 죽어가는 이웃들에 대한 마음을 잃어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그들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주님, 여기 이 곳은 먹을 것이 넘쳐 나지만 저기 저 아프리카에서는 먹을 것이 없어서 하루에도 몇 천 명 씩 굶어 죽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주님, 그들을 불쌍히 여겨 주셔서 그들에게 먹을 것을 공급해 주시고 그래서 굶어 죽는 이들이 없어지게 해 주소서.” 이 부자는 진심으로, 마음을 다해서 때로는 눈물을 흘리면서 오랜 기간을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응답이 왔습니다. “그래 알았다. 그렇게 하마. 그런데 네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내가 너에게 준 재물을 그들에게 먹을 것을 공급하는 일에 사용하거라”


저는 사랑이라는 말을 떠올릴 때마다 이 이야기를 생각하곤 합니다. 물론 기도도 하지 않는 것보다 기도하는 것이 훨씬 더 많이 사랑하는 것일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로 기도 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서 기도를 하는 것이라면 몰라도 그 밖에도 할 수 있는 일이 있는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하지 않고 기도만 하는 일은 참된 사랑의 행위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사랑을 어떤 고상한 개념이나 아름다운 감정 쯤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식거나 없어지면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경향은 결혼과 이혼에 대한 생각에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는데요. 지난 2월 한 인터넷 잡지에서 50-60대를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설문 내용은 황혼이혼에 공감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은 50-60대 중에서 몇 퍼센트나 여기에 공감했을 것 같으십니까? 무려 10명 중 7명이 그렇다고 대답했는데요. 더 놀라운 것은 다른 설문조사에서 같은 연령대의 507명을 대상으로 질문을 했을 때, 그들 중에서 67퍼센트가 ‘사랑이 없으면 헤어져야 한다’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철 없는 나이도 아니죠. 50-60대면 이런 사안에 대해서 보수적으로 생각할 나이입니다. 그런데도, 그들 중에서 거의 70퍼센트가 결혼 생활의 지속 여부를 단지 사랑이라는 감정이 있는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에 묶어 놓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사람들은 점점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이 되어져 가고 있기 때문에, 사랑이 주는 달콤함은 누리고 싶어하면서도 그 사랑이 지우는 책임은 될 수 있는 대로 피하고 싶어하는 마음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고방식이 인기를 얻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단지 머리 속에 있는 고상한 개념이나 마음 속에 있는 애틋하고 행복한 감정이 아닙니다. 사랑에 있어서 더 중요한 것은 그 관계에 따르는 책임이 동반되는 구체적인 행동입니다. 사랑이 아름답고 고상할 수 있는 것은 사랑이라는 개념이나 감정 자체 때문이 아닙니다. 그 사랑의 가치와 진정성을 드러내 주는, 책임을 다하는 신실한 사랑의 행동이 있기 때문에 사랑이 아름답고 가치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에 대해서 알아가면서 그 사랑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이 진짜 사랑인지 고상한 언어와 완벽한 논리로 설명해 주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 분의 사랑에 감동하게 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것을 그 분의 삶과 죽음으로 직접 보여주시고 증명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참된 사랑에 대해서 그 누구보다도 고상하고 완전하게 사람들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예수님은 사랑에 관한 한 그 어떤 사람보다 탁월한 스승이십니다. 그러나, 그 분이 그 분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사람들을 사랑으로 감동시키시고 또 그 사람을 또 다시 사랑하는 사람으로 바꿔 내시는 이유는 예수님 자신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사랑으로 사시고 또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사랑 때문에 예수님은 하나님이셨지만 인간이 되셨습니다. 창조주께서 피조물을 온전히 사랑하시기 위해서 피조물됨을 취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그저 멀리서 쳐다보시면서 안타까워 하지 않으시고 직접 이 질곡 많은 인생 속으로 뛰어 들어 사람들이 죄 때문에 겪는 문제들을 손수 짊어지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그 사랑 때문에 높은 삶이 아니라 낮은 삶을 사셨습니다. 태어나시기도 가장 천한 목수의 집에서 태어나셨고, 그럴 듯한 산실이 아닌 마굿간에서 나셨습니다. 갈릴리 나사렛이라는 모두가 무시하는 동네에서 자라나셨고 낮은 사람들 틈에서 기꺼이 그 낮은 사람들을 섬기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 때문에 결국에는 그 귀한 하나님의 생명을 저주 받은 십자가 위에서 내어 놓으셨습니다. 그 사랑 때문에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한 마디 말씀하지 않으시고, 십자가에서 뛰어 내려와 이 세상을 심판하실 수 있으셨지만 끝까지 그 고통과 외로움을 견디어 내셨습니다. 그 분이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쏟으셨던 물과 피는 바로 그 분의 사랑이 다함이 없는 사랑, 끝까지 사랑하시는 사랑, 그 분이 말씀하셨던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내어 놓는 그 사랑이라는 것을 증명해 주기에 충분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얼마나 형편 없는 존재인지 제대로 깨닫고 나서 이 십자가 앞에 서는 사람, 그 십자가의 사랑이 나를 위한 것임을 깨닫는 사람은 그 사랑에 감동되어 그 예수님을 진실로 사랑하게 되고, 또 그 예수님의 사랑을 닮은 사랑을 흉내 내면서 살아가는 사랑의 사람으로 빚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그 사람 안에 역사해서 사랑의 기적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말로만 사랑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구체적인 행동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것도 변함없이 넉넉하고 너그럽게 끝까지 책임을 지는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십자가에 아들을 내어주시는 상상할 수 없이 크고 끈질긴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낟알을 줍고 있던 룻을 찾아간 보아스는 룻에게 이해할 수 없는 친절을 베풀었습니다. 보아스는 룻을 ‘내 딸아’라고 부르면서 다른 곳으로 가지 말고 자신의 밭에서 낟알을 주우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일꾼들에게 너를 해꼬지 하지 못하게 해 놓았으니 안심하고 낟알을 주워도 될 것이고, 또 낟알을 줍다가 목이 마르면 일꾼들이 길어온 물 주머니에서 마음대로 물을 마시라고 했습니다. 룻은 어안이 벙벙했을 것입니다. 룻의 입장에서는 자기 앞에 서서 자기에게 그런 친절을 베푸는 보아스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태어나서 처음 보는 사람이었을테니까요. 게다가 이방 여인인 자신의 처지, 그것도 그렇게 남의 밭에 와서 낟알이나 줍고 있는 자신의 처지를 생각해 본다면 그것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친절이었습니다. 그래서 룻은 그 친절함에 감동되어서 얼굴을 땅에 대고 보아스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나는 이방여인이거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보십니까?” 이 질문에 대해서 되돌아온 대답은 룻을 더욱 더 감동시켰습니다.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어머니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알려졌느니라.” 바로 이것이 보아스가 룻에게 그런 이해할 수 없는 친절을 베풀었던 이유입니다. 물론 보아스는 친절한 사람이었고 헤세드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날 보아스가 룻에게 그런 친절을 베풀었던 것은 보아스가 그런 선한 사람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룻이라는 이방 여인이 시어머니에게 베푼 사랑과 이스라엘 민족을 향한 진심 때문이었습니다. 


보아스는 자신이 친절을 베푸는 이유를 말해주면서 “네 남편이 죽은 후…”라고 말하는데요. 우리나라에서는 남편이 사망해도 어느 정도는 시댁에 대한 의무와 도리가 남아 있게 되지만 이스라엘과 그 당시 그 지역의 법도로는 남편이 죽으면 남편이나 그 남편의 집안에 대한 모든 의무가 사라지게 됩니다. 그 다음에는 아내가 어떻게 하든 그 누구도 뭐라고 할 수 없죠. 그래서 나오미를 떠나 자기 집으로 돌아갔던 오르바도 그 당시 문화에서 보면 잘못한 것이 아니라 나오미에게 충분히 한 것입니다. 이런 문화적인 배경에서 보면 룻이 남편이 죽고 나서도 계속해서 시어머니를 모셨으며 예루살렘까지 따라와서 변함없이 나오미를 섬긴 것은 당신의 기준으로 보면 다른 사람들을 감동시키에 충분했습니다. 그것은 룻이 유대인이 아니라 헤세드를 모르는 이방인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했습니다. 그런데, 보아스가 자신이 친절을 베푸는 이유를 설명하는 말을 살펴보면 그는 사랑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대신 이렇게 말하죠.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어머니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알려 졌느니라" 무엇이 보아스를 감동시킨 것이지요? 룻의 마음 속에 있던 사랑입니까? 룻이 알고 있었던 헤세드에 대한 지식입니까? 아닙니다. 룻이 나오미를 사랑했기 때문에 취했던 행동, 그리고 룻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일을 사랑했기 때문에 취했던 행동입니다. 그 행동, 정확하게는 그 행동으로 증명되고 드러난 사랑에 감동되어서 보아스는 그런 나오미에게 그렇게 커다란 친절을 베풀었던 것입니다. 헤세드가 거의 사라져 버린 시대에 자기 백성들이 아니라 이방인, 그것도 시어머니와 함께 자기 땅으로 와서 사는 이방 여인에게서 그토록 풍성한 하나님과 사람에 대해 헤세드를 베푸는 것을 본 보아스는 그 마음이 얼마나 기쁘고 감격적이었겠습니까? 그리고 이미 그 안에 하나님의 헤세드를 품고 있었던 보아스가 어찌 그런 룻을 보고 그냥 넘어갈 수가 있었겠습니까? 


우리가 룻기에서 만나게 되는 보아스의 그 속깊은 배려와 친절은 아무 이유 없이 그의 마음 속에서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보아스의 룻을 향한 헤세드는 룻의 나오미를 향한 헤세드가 씨앗이 되어서 보아스의 마음 밭에서 자라난 열매였습니다. 보아스는 그런 룻의 사랑의 행동에 너무 감동 되어서 룻을 축복합니다.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얼마나 위로가 되는 축복입니까? 말만 들어도 룻은 그 동안의 모든 설움과 슬픔이 씻겨 내려가는 것 같지 않았을까요? 룻은 정말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화답합니다.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나는 당신의 하녀 중의 하나와도 같지 못하나 당신이 이 하녀를 위로하시고 마음을 기쁘게 하시는 말씀을 하셨나이다.” 보아스가 룻의 헤세드에 자극을 받고 감동을 얻었다면 그것은 룻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룻도 보아스의 헤세드로 인해 감동되었고 그래서 치유와 기쁨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보아스는 말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식사를 할 때는 자신의 식탁에서 함께 식사를 하도록 배려했고 볶은 곡식은 배불리 먹고 많이 남을 정도로 주었습니다. 또 그저 안전하게 낟알을 줍도록 해 준 것이 아니라 일꾼들에게 특별히 부탁해서 일부러 단에서 이삭을 몇 개씩 빼어 룻이 충분히 양식을 얻도록 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룻이 그 날 주운 것이 한 에바쯤 되었다고 말하는데요. 한 에바는 우리 기준으로 하면 거의 두 말이 다 되는 양입니다. 룻이 그렇게 일곱 주간을 그 밭에서 낟알을 주웠다면 거의 열 가마니를 주운 셈이 됩니다. 룻과 나오미 두 사람이 몇 년을 먹을 수 있는 양입니다. 


옛 기독교 역사를 읽어보면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이 참 많이 나옵니다. 저절로 고개가 숙여질 만큼 남을 위해서 내어주고 섬기는 삶을 살았던 고상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 정말 많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런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아주 없지는 않지만 그 비율이나 숫자가 현저하게 줄어들고 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는 이유는 아주 여러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중에서 가장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있다면, 우리 앞에서 그런 삶을 살면서 그러한 삶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보여주는 사람들이 그만큼 줄어들고 있고, 또 지금 함께 그 길을 가는 사람들이 줄어들고 있기 때문인 것이 분명합니다. 바로 이전 시대의 믿음의 선배들이 참된 믿음의 삶을 살았다면 우리도 그렇게 살기가 훨씬 수월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함께 어울려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 중에서 정말 아름답고 향기로운 사랑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면 우리들 또한 그렇게 살아가기가 그만큼 더 쉬워질 것입니다. 예전에 서울에서 사역할 때, 그 교회의 한 집사님으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입니다. 서울에 가면 새벽기도로 유명해진 아주 커다란 교회가 하나 있는데요. 바로 그 교회에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그 집사님도 아는 분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라고 하면서 들려주었던 이야기인데요. 그 이야기를 들려주신 성도님의 이웃이 그 새벽기도로 유명해진 교회에 새로 출석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예수를 믿게 된 거죠. 그런데, 놀랍게도 이 분이 계속해서 새벽기도에 빠지지 않고 나가길래 그 분이 하도 기특해서 어떻게 처음 예수를 믿었는데도 그렇게 새벽기도에 열심이냐고 물었더니 오히려 이렇게 반문하더랍니다. “어? 원래 예수 믿으면 새벽기도에 나가는 거 아닌가요?”하고 말입니다. 이야기가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요? 왜 그 성도님을 새로 예수를 믿었으면서도 새벽기도에 참석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그 분이 출석하기 시작한 그 교회의 대부분의 성도들이 새벽기도에 나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처음 나가서 본 모습이 그런 모습이니 처음 예수를 믿었는데도 새벽기도를 어렵지 않게 출석했던 것입니다. 오랫동안 예수 믿어도 그렇게 참석하기 힘든 새벽기도회를 말입니다. 


모든 선한 일에는 그 일에 헌신하고 애쓰도록 자극하고 격려하는 자극제가 필요합니다. 그 자극제가 없을 때는 그렇게 하기 힘든 일도 그 자극제가 있으면 훨씬 하기 쉬워 집니다. 그 자극제란 바로 그 선한 일을 이미 하면서 살았던 사람들과 또 지금 그 선한 일에 헌신하면서 살아가는 다른 사람들입니다. 사랑이라고 그렇지 않겠습니까? 사랑도 똑같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처음 예수를 믿었는데요. 공교롭게도 우리가 처음 출석한 교회의 성도들이 서로를 정말 뜨겁게 사랑하는, 자기 보다 다른 이들을 먼저 돌보고 섬기는 그런 교회라고 한다면 그 교회에 나가는 우리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요? 그렇지 않은 교회에 나가는 것보다 훨씬 수월하게 그 분들의 사랑을 흉내 내다가 우리들도 그 분들처럼 사랑하게 되지 않을까요? 저는 분명히 그럴 거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남들이 잘 가려고 하지 않는 가치 있는 길을 가려고 할 때, 그 사람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함께 그 길을 가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외로움이니까요. 


오늘날 사회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교회 안에서 조차 참되고 넉넉한 사랑을 발견하기가 그토록 어려운 이유는 그 사랑으로 사랑하는 하는 일 자체가 힘들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은 자신의 삶과 행동으로 그러한 사랑이 정말로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너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이야기 하고, ‘사랑이 없다'고 한탄하는 사람은 많지만 정작 몸을 움직여 사랑을 살아내는 사람이 드물기 때문에 그 사랑에 용기를 내기가 너무 어렵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그 헤아릴 길 없는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만약 우리의 영혼 속에 그 분의 사랑이 숨쉬고 있다면 우리는 충분히 서로를 넉넉히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또 한 가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 사랑을 직접 몸으로 느껴 알 수 있고, 또 배울 수 있는 또 하나의 아주 중요한 통로를 허락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명 중 하나가 바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세상이 비로소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인 줄 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일 자체가 아니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모습이 우리가 누구의 제자인지를 보여주고 증명하는 일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요한 일서에는 더 충격적인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우리 안에 하나님이 계시고,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그 속에 하나님이 없다는 말씀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이렇게 보면 교회 내부적으로나 외부적으로나 성도가 서로 사랑하는 것보다 교회에게 더 중요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그 안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고, 사랑하지 않으면 이 세상에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릴 길이 전혀 없고,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제대로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이 없어지게 되니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서로 사랑할 수 있게 될까요? 재미있게도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 속에 이미 우리가 서로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이 들어 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향해서 그냥 사랑하라고 하시지 않고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랑이 일방통행이 아니라 쌍방통행이 되게 하라고 하신 것이죠.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사랑이 주님의 말씀대로 서로 사랑하는 사랑이 될 수 있을까요? 간단합니다. 모두가 딱 한 가지만 되면 됩니다. 그것은 바로 다른 사람이 먼저 사랑할 때까지 내가 사랑하는 일을 미루지 않으면 됩니다. 다른 사람이야 사랑하든 말든 내가 사랑하기 시작하면, 모두가 그렇게 하면 결국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게 됩니다. 만약 이렇게 하지 않고 모두가 ‘저 사람이 사랑하지 않는데 왜 내가 사랑해? 왜 내가 먼저 사랑해야 돼?’라는 생각으로 사랑하는 일에 몸을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사랑할 수 없고 그래서 그 누구도 사랑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비록 다른 사람들 모두가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작은 일에서라도 내가 먼저 사랑하기 시작하면 또 누군가가 그것을 보면서 자극을 받아서 사랑하기 시작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하나 둘 늘어가면 결국 그 교회는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는 그런 교회로 세워져 갈 것입니다. 


사실 성도들에게 사랑이란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새 계명이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정확하게 표현해서 예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이 됩니다. 주님 주신 하나 밖에 없는 계명에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남이 사랑하지 않아도 나는 사랑해야 합니다. 그게 당연한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칭찬받는 일입니다. 신앙 안에서 먼저 사랑하고 더 많이 사랑하는 일은 결코 손해 보고 어리석은 일이 아닙니다. 그것이 가장 영광스러운 일이고 또 가장 지혜로운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사랑을 머리나 가슴 속에만 두지 말고 그것을 몸을 움직여 바깥으로  꺼내 놓을 때, 그런 우리의 사랑은 놀랍게도 하나님의 사랑이 이 세상 바깥으로 나오게 하는 산파 역할을 하게 됩니다. 교회 안에서건, 교회 밖에서건 예수를 믿는 우리가 사랑하면 거기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나기 시작하고 그 사랑이 자라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사랑이시니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두 사랑에는 약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점에서는 저도 여러분 앞에서 할 말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누군가를 통해 사랑의 자극을 받는 일이 필요합니다. 다른 사람의 사랑에 감동되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라는 이름으로 한 몸을 이루어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서로를 자극하고 또 그 사랑으로 하나님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역할을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성도 여러분, 그 영광스러운 일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로부터 시작되어도 괜찮지 않을까요? 누군가가 그 사랑을 보여주기 전에 내가 먼저 그 사랑을 연습하고 흉내내어 그 그림자라도 보여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정말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작은 일에서 부터, 우리의 몸을 움직여 계산하지 않는 사랑을 보여주기 시작할 때, 그 사랑은 분명히 누군가의 가슴 속에만 묻혀 있는 사랑을 자극하게 될 것이고, 그 사랑을 움직여 그 사람 또한 몸을 움직여 사랑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이 교회는, 우리의 가정은, 일터와 이웃은 지금 보다 훨씬 더 넉넉하고 풍성한 곳이 될 곳이고, 서로가 서로에게 가슴 두근 거리는 기쁨과 감동을 주는 그런 곳으로 변해 갈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서로가 서로로 인해서 더 많이 사랑하게 되는 은혜와 서로의 사랑 속에서 하나님을 보게 되는 복을 누리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