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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4.07.27. 주일오전 - 네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룻기 6)

 


룻0301to18 -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룻6).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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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본문 : 룻기 3장 1-18절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어도 사람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어 보셨지요?  이 말을 들을 때 여러분은 그 마음이 어떠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우리는 듣는 사람도 또 하는 사람도 어쩌면 이 이야기를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나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말을 이렇게 받아들이는 이유는 아마도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것과 일치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나를 보아도 또 다른 성도들을 보아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도 쉽게 그리고 크게 달라지지도 않는 것 같으니까요. 사람이 잘 변하지 않는다는 말이 틀린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리고 사람은 선해지기 보다는 악해지기가 훨씬 더 쉽고, 우리 주변에도 아름답고 선하게 변화되어져 가는 사람보다는 그렇지 않은 사람이 더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성도 여러분,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어도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이 말을 그냥 기정사실로 인정하고 받아들여야만 할까요? 우리가 그렇게 변화되지 않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거기 순응해서 살아가야 할까요? 그것 때문에 항상 상처를 주고 받으며  힘들어 하면서 말이죠. 물론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삶을 살고 또 여전히 신앙생활을 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이럴 때는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로서 스스로에게, 그리고 세상을 향해서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을 얻게 됩니다. 그것은 ‘내가 믿는 예수님은 과연 나의 생각과 가치관 그리고 마음과 성품 하나 바꾸지 못할 정도로 무능한 분인가? 나 하나 바꿔내지 못하는 믿음이 과연 세상을 이기게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과연 내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일인가?’하는 질문들입니다. 만약 하나님을 믿어도 사람이 변하지 않는 것이 정상이라면 우리는 이런 질문들에 대해서 긍정적인 대답을 내놓지 못할 것이며, 그렇다고 하면 우리는 우리의 신앙의 능력과 의미를 그다지 크게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신앙에 그다지 큰 기대를 걸지 못할 것이니까요.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이유는 죄 용서를 받고 구원을 얻기 위해서 입니다. 그리고 구원을 꼭 얻어야 하는 이유는 그래야 우리가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 이유의 전부라면 왜 우리가 예수를 믿고 난 이후에도 여전히 이 땅에서 살아가야 하는가, 하나님은 왜 우리를 계속 여기에 두시는가 하는 문제는 설명할 길이 없어집니다. 하나님은 필요 없는 일은 하지 않으십니다. 꼭 필요한 일만 하시지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 위에서 살아가도록 이렇게 두시는 것은 우리에게 그 과정이 꼭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란 바로 우리가 성화되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 때문에 우리를 계속해서 이 땅 위에 두시는 것입니다. 


성화란 예수님을 닮은 성품이 우리 속에서 더욱 더 확실하게 자리를 잡아가는 과정입니다. 예수를 믿어도 당장은 그 이전과 별로 달라진 것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이 제대로 달라지는 일은 대개 그렇게 쉽게 일어나는 일도 아니고 또 시간도 걸리는 일이니까요.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참으로 예수를 믿고 나면 그 사람은 변해야 하고, 또 변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시간도 많이 걸리고 일시적으로는 오히려 예전보다 더 못되게 변해버린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지만 분명한 것은 5년, 10년 이렇게 긴 세월을 놓고 보면 반드시 우리 속 사람에 새겨지고 있는 그리스도의 성품이 더 뚜렷해지고 분명해 진다는 것입니다. 이 성화가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이유는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성품이 분명해 질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 나라에 어울리는 영광스러운 사람들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1장에서 만나는 나오미의 모습은 비록 거칠지는 않지만 자신의 어려움에 빠져서 자기의 이름마저도 저주하는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나오미는 자신이 베들레헴을 떠날 때는 풍족하게 나갔는데 돌아올 때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비어 돌아오게 하셨다고 말하면서 전능자가 자기를 괴롭게 하고 치셨다고 말했습니다. 전능자, 그러니까 엘 샤다이라는 이름은 원래 보호하시고 대신 싸워 주시는 하나님의 이름인데, 나오미는 그 하나님께서 오히려 자신을 공격했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자신을 나오미라고 부르지 말고 마라, 그러니까 고통이라고 부르라고 했습니다. 기쁨이라는 이름조차 듣기 싫어할 정도로 나오미는 하나님께 대한 큰 상처와 실망 속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2장 마지막 부분과 3장에서 만나는 나오미는 다시 나오미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어 있습니다. 룻의 손에 들린 두 말이나 되는 풍성한 낟알을 보고, 또 룻에게 넘치는 친절을 베푼 사람이 자기 가문의 ‘기업무를 자’인 보아스라는 말을 듣고는 그 안에서 자신을 치시고 버리신 줄만 알았던 하나님의 친절하고 풍성한 사랑과 섭리를 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먼저 자신을 쳤다고 말했던 그 하나님의 이름으로 보아스를 축복합니다. 이것은 나오미가 하나님을 다시 그의 백성들에게 복을 주시는 선하신 하나님으로 여기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나오미가 여전히 하나님을 자신을 치시고 텅 비게 만드는 그런 분으로 생각하고 있다면 그 하나님의 이름으로 보아스를 축복할 수 없었을 테니까요. 그리고, 3장으로 넘어 와서는 나오미는 룻을 보아스와 결혼시키려고 합니다. 그것은 룻과 보아스의 만남을 룻에게 새로운 가정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섭리로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나오미에게 하나님은 자신과 룻의 인생을 돌보시고 채우시는 분으로 인식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신앙이 계속 성장해가고 또 그 성품이 변하려면 꼭 가지고 있어야 하는 감각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발견하고 경험하며, 그것을 하나님을 대하는 자신의 태도로 이어지게 할 수 있는 그런 감각입니다. 우리가 거듭 거듭 하나님의 선하심과 은혜를 경험하는데도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기쁨 커져 가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일상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지 못하고, 또 발견하더라도 그것을 믿음과 하나님을 향한 태도의 변화를 위한 재료로 사용하지 못합니다. 기뻐하고 감사하기는 하지만 거기서 끝입니다. 이렇게 되면 신앙은 항상 거의 제 자리에 머물게 됩니다. 아무리 많은 은혜를 경험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대하는 나의 태도는 크게 달라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와 복은 우리가 하나님을 더 확실히 신뢰하며 또 기뻐하고 사랑하기 위한 재료로 사용되어 질 때, 가장 유익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래야 나의 영혼이 더욱 더 단단하게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은혜를 주시고 선물을 주실 때, 그것을 여러분의 더 든든한 믿음과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를 위한 재료로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우리의 믿음은 자라나고 또 우리의 삶에 더 좋은 열매를 남길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태도가 달라지면, 그제서야 비로소 제 자리를 찾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들에 대한 마음과 태도입니다. 나오미의 하나님에 대한 태도 변화는 그가 사람을 대하는 마음과 태도를 바꿔 놓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보아스를 축복했고 룻에게 새로운 보금자리를 만들어 주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2장 20절로 돌아가 보면 나오미가 처음 보아스라는 이름을 듣고 나오미가 말했던 것은 보아스가 자신의 ‘기업 무를 자’ 그러니까 재산을 되찾아 주고 가문을 이어지게 해 줄 의무가 있는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3장을 보면 나오미는 보아스를 더 이상 자기 가정을 되살려 줄 책임을 지닌 사람이라고 보지 않고 그저 룻의 새로운 남편, 그러니까 룻에게 새로운 안식처를 선물할 사람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남자를 통해서만 재산이 상속되고 가문이 이어졌던 유대사회의 특성상 나오미 또한 보아스를 통해서 자기 가문을 잇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할 수 있었지만 나오미는 그것 보다 며느리인 룻의 행복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가족이든 누구든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가 자꾸 비인격적이 되고 자꾸 문제가 생기며 그 안에서 우리가 행복하지 못한 이유는 근본적으로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가 올바로 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관계가 바로 세워져 있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그래서 관계가 어려워 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내 삶을 챙겨 주시고, 또 나를 선대하고 계신다는 것을 확신하며, 하나님께서 내 삶을 채워주고 계심을 경험하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사람을 나의 만족과 행복을 위한 도구로 여기는 사고방식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고, 사람들을 그저 사람들로 대하고 또 사랑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만약 우리가 지금 인간관계에 있어서 어떤 어려움을 경험하고 있다면, 먼저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제대로 설정되어 있는지 챙길 필요가 있습니다. 많은 경우 여기에 문제가 있어서 아무 것도 아닌 일로 갈등하고 있을 수 있고, 또 정말 그 사람과의 관계에 정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설정되면 그 문제 또한 저절로 해결될 수 있으니까요. 혹시 여러분이 이런 어려움 가운데 있다면 그 당사자 하고만 문제를 풀려고 하지 마시고 먼저 하나님 앞에 여러분 자신을 바로 세워 보십시오.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세우시고 온전케 하시며 또 채워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이 진실로 믿어지고 삶에서 경험되는 그 지점까지 여러분의 믿음을 끌고 가 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 자신을 제대로 보게 될 것이고, 또 다른 사람들도 바른 눈으로 바라보며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사랑할 수 있는 길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제서야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을 긍정하게 되고 또 다른 사람들 또한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나오미는 룻을 친척인 보아스와 결혼시키기로 합니다. 그런데, 나오미는 이 계획을 아주 치밀하게 이루어 갑니다. 우리가 나오미의 행동을 자세히 살펴보면 정말 재미있습니다. 그것이 다름 아니라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좋은데 다시 시집 보내기 위해서 선택한 행동들이기 때문입니다. 나오미가 룻에게 처음 결혼 이야기를 꺼내면서 나오미는 룻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그가 오늘 밤에 타작 마당에서 보리를 까불리라 그런즉 너는 목욕하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고 타작 마당에 내려가서 그 사람이 먹고 마시기를 다 하기까지는 그에게 보이지 말고 그가 누울 때에 누운 곳을 알았다가 들어가서 그의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우라 그가 네 할 일을 네게 알게 하리라.” 


이건 뭐 완전히 007작전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보게 되는 것은 나오미는 이미 보아스가 그 날 어떻게 움직일지 그의 일정과 동선을 모두 확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아마도 나오미는 이미 측근을 통해 보아스의 일정표를 확보해 놓았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룻을 그 일정표에 따라서 치밀하고 은밀하게 움직이게 합니다. 룻과 보아스 사이에 다른 어떤 사람도 끼어들지 못하게 만들어 그 일이 철저히 두 사람 사이의 일이 되게 하기 위해서였죠. 게다가 나오미가 룻에게 지시한 것은 그저 보아스가 잠들었을 때, 그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우라는 것 까지였습니다. 그 다음에는 보아스가 알아서 하도록 만듭니다. 이것은 최대한 일이 되게 하면서도 보아스를 불쾌하지 않게 하고 또 룻의 자존심도 지켜주는 방법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찌보면 간단해 보이는 계획이 얼마나 치밀하고 세심한지,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좋은 데로 다시 시집 보내서 행복을 되찾게 해 주려면 이 정도의 치밀함은 기본인 것 같습니다. 


나오미의 행동을 살펴 보다가 저는 문득 로마서 16장 18절 말씀이 생각 났습니다. “너희가 선한 데는 지혜롭고 악한 데는 미련하기를 원하노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성도는 일단 무엇이 선한 일인지 악한 일인지를 제대로 구분해야 합니다. 일 자체도 그렇지만 그 일을 이루기 위한 방법을 정할 때도 그렇습니다. 일단 악한 일이거나 혹은 악한 목적이라고 생각되면 거기에는 미련하게 반응해야 합니다. 마치 그런 것은 전혀 모르는 듯이 그렇게 반응해야 합니다. 그것이 자기 일일 때도 그렇지만 다른 이들이 자신을 좋지 못한 일에 끌어들이려고 할 때도 그래야 합니다. 그렇지만 성도는 선한 일에는 지혜로워야 합니다. 어떤 일이 선한 일이 틀림이 없다면 이 일을 이루기 위한 방법을 찾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서 자신의 지혜를 사용해야 합니다. 물론 그렇게 찾아진 방법 또한 선해야 하겠지요. 그런 점에서 나오미는 며느리의 행복이라는 선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방법을 찾는데 있어서 선한 방법을 찾아 그 일이 되게 하는데 최선을 다했습니다. 나오미는 며느리에게 아무 생각도 없는 보아스를 유혹하게 만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랬다면 그 일은 과히 선한 일이 될 수 없었겠지요. 나오미는 룻에게 자신의 계획을 알려 주면서 그에게 “그가 네 할 일을 네게 알게 하리라”라고 말하는데요. 이 말은 나오미가 확신을 가지고 한 말이었습니다. 말인 즉, 그가 하라는 대로 하며 일이 다 잘 될 것이라는 뜻이니까요.


우리는 이미 보아스가 룻에게 베풀었던 친절과 사랑이 어떠했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 보시기에 그 친절이 100퍼센트 성도가 성도에게 베푼 순전한 사랑의 표현으로만 보이십니까? 아니면 그 안에 무언가 다른 감정이 보이십니까? 남자분들은 잘 아시지요? 저도 남자라서 잘 압니다만, 남자는 절대로, 거의 절대로 아주 순수한 사심 없는 마음으로는 지나친 친절을 베풀지 않습니다. 제가 아는 한 남자라는 존재는 소위 ‘흑심’이라고 부르는 것이 개입되어 있을 때라야만 여인에게 필요 이상의 큰 친절을 베풉니다. 게다가 그 사랑이 아주 세심한 배려를 동반하고 있다면 그것은 더욱 더 그렇습니다. 나오미는 룻을 통해 보아스가 룻에게 베푼 그 풍성하고 세심하기까지 한 친절에 대해서 전해 들었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헤세드를 닮은 사랑 뿐만이 아니라 한 남자의 한 여인을 향한 설레는 감정도 보았던 것입니다. 설마 보아스 같은 사람이 그랬을까 하실 수도 있지만요. 저도 다 근거를 가지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나중에 룻이 보아스에게 자신과 결혼해 달라고 했을 때, 보아스가 보인 반응이 그 증거입니다. 10절입니다. 한 번 같이 읽어 볼까요? “그가 이르되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네가 가난하건 부하건 젊은 자를 따르지 아니하였으니 네가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엄청 점잖게 표현되어 있지만 이야기인 즉, 네가 늙은 나를 선택해 주어서 너무 고맙다는 이야기입니다. 왜 고마워 합니까? 다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이런 감정 자체를 나쁘고 불순한 것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 감정을 품어도 되는 사이에서 생겨나는 감정은 전혀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안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런 감정이 생기니까 문제죠. 보아스는 남자였고, 룻은 홀몸이었고 또 나오미 집안의 기업 무를 자였기 때문에 자격과 조건에는 아무런 하자가 없습니다. 나오미는 그저 멍석을 깔아 준 것입니다. 모든 조건이 합법하니까, 그리고 이미 보아스가 룻을 마음에 두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까요. 나오미는 정말 선을 이루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 지혜를 짜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 그러니까 선한데 지혜로운 모습은 룻과 보아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먼저 룻입니다. 룻은 나오미가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물론 나오미 또한 자신에게 그렇게 큰 친절과 사랑을 베푼 보아스가 싫지는 않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를 남자로 사모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나오미가 그렇게 하라고 하고 나서야 움직이고 있고, 9절에 보면 여전히 보아스를 기업 무를 자라고 부르고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룻 또한 이 선한 일, 그러니까 자기 가문을 되살리고 보아스가 기업무를 자가 되게하는 선한 일을 이루기 위해서 굉장히 적극적으로 움직입니다. 보아스는 한 참을 자다가 암흑 속에서 자기 발치에 누워있는 여인을 발견하고는 너무 놀랐습니다. 그래서 누구냐고 묻죠. 사실 이 물음에는 그저 ‘저는 룻입니다’하고 하면 그만입니다. 나오미도 그저 그렇게 누워 있기만 하고 나머지는 다 보아스에게 맡기라고 했으니까요. 그런데 룻은 보아스의 질문에 이렇게 길게 대답합니다. “나는 당신의 여종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 이는 당신이 기업 무를 자가 됨이니라” 이 말은 굉장히 겸손하고 은근하면서도 아주 명확한 요구를 담고 있는 말입니다. 우선 룻은 자신을 보아스의 여종이라고 말합니다. 종이 아닌데도 그렇게 말합니다. 굉장히 겸손한 표현입니다. 그렇게 자기가 누구인지를 밝힌 후에 룻은 당신의 옷자락을 펴서 자신을 덮어 달라고 말합니다. 이 말 속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우선 룻은 옷자락을 펴서 자신을 덮어 달라고 요청하고 있는데요. 2장 12절에서 보아스가 룻을 축복할 때,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한다”는 말을 하는데요. 거기서 사용된 ‘날개'라는 말이 원래는 이 ‘옷자락’이라고 번역된 말과 똑같은 단어입니다. 그래서 룻의 이야기는 이런 뜻이 됩니다. 당신이 나에게 나를 덮는 여호와의 날개가 되어 달라는 것이죠. 당신이 바로 당신이 말한 여호와의 보상이 되어 달라는 것이죠. 그런데 옷자락으로 덮는다는 말은 남편의 아내를 향한 사랑을 표현할 때도 쓰이기 때문에 이 말 자체가 자신과 결혼해 달라는 간접적인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뒤에 나오는 ‘기업 무를 자’가 되는 일도 남편이 되어주는 일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그 의미가 더더욱 분명해 지지죠. 룻은 보아스에게 자신의 남편이 되어 달라고 요청합니다. 아주 적극적이죠. 그렇지만 그렇게 하면서도 전혀 보아스의 감정을 건드리지 않습니다. 보아스가 자신의 ‘기업 무를 자’라는 이야기만 해서 보아스가 자기의 요청에 응하는 일을 그저 하나님 앞에서 그의 의무를 다하는 일로 여겨지게 만듭니다. 그만큼 보아스를 배려한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보아스는 너무 너무 기뻐합니다. 그 감정을 감추지 못합니다. “네가 가난하건 부하건 젊은 자를 따르지 아니하였으니 네가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분명히 룻이 젊은 남자를 따라가지 않은 것은 나오미를 위한 것이었지만, 보아스의 입장에서는 그래서 자신이 룻을 아내로 얻게 되었으니 그것 또한 너무 기쁜 일이었습니다. 보아스는 룻의 제안을 100퍼센트 받아들입니다. 룻의 말대로 룻에게 다 해 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남편도 되어주고 또 나오미 가문의 기업 무를 자도 되어 주겠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보아스는 그 전에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다고 하면서 단서를 붙입니다. “참으로 나는 기업 무를 자이나 기업 무를 자로 나보다 더 가까운 사람이 있으니 …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려 하면 좋으니 그가 그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행할 것이니라 만일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행하기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기업무를 자의 책임을 내게 이행하리라” 보아스는 룻을 아내로 받아들이는 일을 굉장히 원하고 있습니다. 그의 말 속에 그 감정이 그대로 묻어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자신이 원하는 것을 취하려 들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게 원하는 일이지만 만약 기업무를 자의 우선권을 가진 사람이 그 일을 하겠다고 하면 자신은 물러 서겠다고 말합니다. 자신이 맹세코 기업무를 자의 의무를 행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율법의 원칙을 어겨가면서 까지 그렇게 하지는 않겠다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그리고, 보아스는 끝까지 룻의 좋은 평판을 지켜주기 위해서 애씁니다. 룻이 아무도 모르게 자기 곁에 새벽까지 누워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게 해 줍니다. 나오미를 위해서 보리쌀까지 넉넉하게 되어 주면서 말이죠. 


우리는 보아스와 룻의 결혼과 관계된 잔잔하고 차분하지만 너무 행복한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가 이렇게 그 어떤 것도 거리낄 것이 없는 모양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이 이야기 속에 나오는 세 사람들의 인격이 그만큼 아름답고 향기롭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들이 처음부터 타고나기를 이렇게 타고난 사람들은 아니었다고 확신합니다. 나오미를 보아서도 알듯이 그들 또한 이렇게 저렇게 흔들리기 쉽고 자기 중심적이 되기 쉬운 사람들이었을 테니까요. 그런 점에서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 보는 세 사람의 모습은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 것일 수 가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안에 머물렀고, 그 시간 동안 서서히 아름답고 향기로운 하나님을 닮은 사람들로 변화되어져 갔던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예수 믿는 일에 대해서 좌절한 사람들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연일 들려오는 교회와 성도들에 대한 아프고 창피한 이야기들 때문에 세상도 그렇고 우리들 스스로도 그렇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대해서 별로 큰 기대를 두지 않는 그런 시대를 살게 되었습니다. 이 시대가 슬프고 안타까운 일을 경험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일이 우리에게 주는 참으로 영광스러운 진짜 복을 놓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복은 바로 우리 아버지되신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며 아름답고 향기롭게, 그러나 당당하고 바르게 사는 사람들로 변해가는 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빚어가기 위해서 복음을 통해 우리를 부르시고 구원하시고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 처럼 변화되어서 정말 하나님의 형상으로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복되고 아름다운지, 그리고 이 세상에 하나님을 보여주는 일이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그것을 경험하며 누리면서 살도록 우리를 부르시고 구원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풍성한 삶을 사는 방법, 그리고 가장 아름답고 멋진 인생을 사는 방법은 돈을 많이 벌고 성공해서 사람들이 우리의 겉모습을 보고 부러워 하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우리의 존재가 견고해 지고 성품이 아름답게 변하는 것, 그것이 가장 복되고 행복한 삶을 사는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대해 주시는  것처럼 사람들을 사람 그 자체로 가치있게 대하면서, 선한 일을 이루기 위해서 열심히 선한 길을 가는 사람들, 그러면서도 그 안에서 사람을 배려하고 사랑하는 일을 놓치지 않는 사람들. 우리가 이런 사람들로 변화되어져 가며 그런 사람들로 살아갈 때,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풍요롭고 아름다운 존재를 가진 가장 행복하고 아름다운 인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 복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예수 믿어도 사람은 잘 안 변한다는 거짓말에 속지 마십시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그리고 그 그리스도를 항상 생각하고 바라본다면 더디더라도 우리는 분명히 그 분을 닮아갈 수 있습니다. 영광스럽게 변화될 수 있습니다. 절대로 그 소망을 버리지 마시고 그 복을 빼앗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꼭 그 복을 소망하시고 얻고 누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오늘날을 살아가는 룻과 나오미, 그리고 보아스와 같은 향기로운 사람들이 되게 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나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가 바로 세워지게 하소서. 그래서 사람들과의 관계도 다시 세워지게 하소서. 내가 그 일에 힘쓰겠습니다. 
  2. 내 속에 아름답고 풍성한 하나님의 성품이 분명해지게 하소서. 나를 새롭고 아름답게 변화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