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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4.08.08. 새벽예배 - 애굽사람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출애굽기 28)


출0628to0707 - 애굽 사람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출28).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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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 : 출애굽기 6장 28절 - 7장 7절



하나님께서는 “나는 여호와라 내가 네게 이리는 바를 너는 애굽 왕 바로에게 다 말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모세는 또 다시 대답합니다. “나는 입이 둔한 자이오니 바로가 어찌 나의 말을 들으리이까?” 이것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대화인데요. 사실 이 대화는 6장 12절 이하에서 하나님과 모세 사이에서 한 번 이루어졌던 대화가 다시 한 번 반복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중간에 나오는 모세와 아론의 족보를 빼놓고 보면  하나님께서는 가서 말하라고 하시고 모세는 안된다, 못한다고 하고… 하나님과 모세 사이의 실랑이가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이렇게 실랑이가 계속될 수 밖에 없는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이었는지가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여호와라” 그런데, 모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는 입이 둔한 자니이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를 보낸다, 너는 나를 바라 보거라’라고 말씀하시는데 모세는 ‘나는 말을 잘 못합니다’라고 대답합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과 모세 사이, 그리고 하나님과 우리들 사이의 대화가 서로 따로 겉도는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하나님을 주어로 말씀하시는데 우리는 자꾸 우리 자신을 주어로 말하니까 마치 기차 철로가 서로 끝없는 평행선을 달리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과 우리의 신앙이 서로 만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부분을 묵상하다가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제가 목회를 바라보는 시각과 같은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분명히 “내가 할테니 너는 나만 바라보아라”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러나 저는 계속해서 말합니다. “하나님 저는 못합니다.”라고 말입니다. 계속 희미해져 가기는 하지만 여전히 저의 기도와 생각 속에는 이런 대답이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이것은 제 속에 여전히 제가 무언가 하려고 하고 또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남아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어찌보면 목회라는 것이 점점 더 ‘나’를 주어로 해서 말하는 말들을 줄여가고 점점 더 하나님을 주어로 해서 말하는 것을 늘려가는 것인데, 아직은 ‘나’라는 주어를 더 많이 사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의 모세의 또 다시 반복되는 대답은 하나님을 향한 저의 대답과 너무 많이 닮아 있어서 저에게는 참 많이 아프게 느껴 졌습니다. ‘나’라는 주어를 버려야 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지만 그게 굉장히 더디게 이루어지고 있고 또 때로는 뒷걸음질 치기도 하기도 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으니까요. 여러분이 꼭 기도해 주십시오. 제 말에서 ‘나’라는 주어가 사라지도록, 하나님이라는 주어만 남도록 말입니다. 


사역도 그렇지만 성도로 사는 것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합니다. 어쩌면 우리가 성도로 살아가는 일이 그렇게 힘겹게 여겨지고 그래서 해 보기도 전에 포기하게 되기까지 하는 이유는 여전히 우리가 살아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물론 우리의 의지는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저 내 의지로만 순종하고 내 힘으로만 빛과 소금이 되어 살아가려고 하니 그것이 그렇게 힘들죠. 그래서 하나님은 ‘나를 믿고 가라. 나를 바라보며 순종해라’고 하시는데 우리는 계속해서 ‘나는 못합니다. 내 힘으로는 안됩니다.’라는 말만 반복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목회나 삶이나 믿음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러려면 우리는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나에게 그런 것들을 명하신 분이 여호와 하나님, 그러니까 명하셨기에 가게 해 주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붙들고 믿음으로 발걸음을 옮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바로에게 신이 되게 하였은즉” 그대로 번역하면 내가 너를 바로에게 이미 하나님처럼 되게 하였다는 뜻이 됩니다. 그런데, 7장 4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바로가 너희 말을 듣지 아니할 터인즉…”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미 모세가 바로에게 하나님처럼 되게 하셨는데 바로가 모세의 말을 듣지 않을까요? 우리는 대개 하나님의 뜻이 분명한 일에 반대자가 등장하면 그것을 잘 받아들이지 못해서 혼돈스러워 합니다. 장애물이 나오면 굉장히 힘들어 합니다. 그러나 당연히 있음직한 방해자나 장애물은 그것 자체가 하나님께서 그 일을 주관하지 않으신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3절에서 하나님은 그것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고…” 이 말씀이 정확하게 무슨 뜻이든지 간에 분명한 것은 바로가 모세의 말을 듣지 않는 것까지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일어난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다는 말씀은 정확하게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두셨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강퍅해 지는 것은 사실 사람들에게 특별한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죄인인 인간들에게는 오히려 당연한 것이죠. 바로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뜻에 반항했습니다. 계속해서 그럴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나중에는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의 뜻에는 완전히 무감각해지고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반항하는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말 그대로 마음이 딱딱해 집니다. 그런데, 이것이 모든 인간의 자연 그대로의 마음의 상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되고 또 하나님의 은혜에 기쁨으로 반응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을 여시는 특별한 은혜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냥 내버려 두면 모든 인간은 하나님께 대해서 마음이 강퍅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셨다는 말을 오해하실까봐 잠시 말씀드렸지만 아무튼 우리들은 우리의 마음이 바로의 마음처럼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항상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겸손해야 할 것입니다. 


역설적이지만 바로의 반대는 당연한 것이고 그것 또한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 있어서 허용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 내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물론이고 애굽사람들 까지도 하나님이 얼마나 대단한 하나님이신지를 알게 하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선하고 바른 길을 가다가, 혹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어떤 일을 하다가 난관을 만나고 방해자를 만나게 되면 그것이 하나님의 무능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가장 명확하게 드러내시기 위해서 그냥 내버려 두시는 일종의 무대장치라고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계속해서 그렇게 생각하는 연습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과 경험되는 것들에 빠져서 믿음을 잃어버리고 의심에 빠져 의기소침해 지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신앙이란 결국 나를 바라보고 내 속에 갇히느냐 아니면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세상과 나를 이기느냐 하는 끝없는 선택으로 이루어집니다. 물론 이 선택은 우리가 나의 소리, 세상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것인가 아니면 “나는 여호와라”고 우리 귀에 큰 소리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일 것인가에 달려 있고, 그 선택에 따라 우리 신앙과 삶 또한 전혀 다른 모습이 되겠지요. 


모세와 아론은 결국 여호와께서 자신들에게 명하신 대로 행했습니다. 결국 자신을 바라보는 눈을 돌려서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싸우는 믿음의 싸움의 본질입니다. 우리의 눈을 어디에 두고 무엇을 믿고 나아가느냐 하는 것 말입니다. 그리고 모세와 아론도 그랬듯이 분명히 이 믿음의 싸움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는 그 날까지 계속되어질 것입니다. 우리가 반대와 장애물까지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다는 것을 믿으면서 그 분께 눈과 귀를 고정한다면 우리는 이 싸움에서 더 많이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항상 하나님께만 눈과 귀를 열어 드려서 하나님께서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시며 승리하실 때, 함께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