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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4.09.07. 주일오전 -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교회(빌레몬서 3)



빌레몬서3.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교회.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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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빌레몬서 1장 15-25절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미국의 목사이자 윤리학자였던 라인홀드 니버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이 분은 교회에서 사역을 하고 또 가난한 이웃들을 섬기면서, 그리고 미국 사회와 나치 치하의 독일을 보면서 왜 개인은 그렇게 악하지 않은데, 그들이 모인 사회는 이렇게 악할 수 밖에 없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고민하다가 그 결과를 ‘도덕적 인간 비도덕적 사회’라는 아주 유명한 책으로 정리했습니다. 이 책이 우리에게 말해 주는 아주 중요한 사실 중의 하나는 개개인의 악을 모두 합한 것보다 사회나 집단 전체가 가지는 악의 크기가 항상 더 그리고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는 것입니다. 니버 목사님은 그 이유를 우리가 구조악이라고 부르는 것에서 찾았는데요. 항상 집단과 사회는 구조적으로 악한 부분을 가지고 있게 마련인데, 이 구조악 속에서 개인의 악이 증폭되고 심화되어서 어떤 집단이든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악보다 그 집단이 가지고 있는 악의 총합이 훨씬 더 커지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가 사는 이 사회가, 그리고 우리가 속한 어떤 집단을 볼 때 이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자주 확인하게 됩니다. 사람들을 만나보면 개개인은 나쁜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알고 보면 모두 좋은 사람이다'는 말이 진실인 것 같이 느껴집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집단을 보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악합니다. 도무지 그 좋은 개인들이 모여있는 곳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정말 니버 목사님의 말대로 개인은 그래도 도적적인데, 사회는 비도덕적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도덕적인 개인도 하나의 사회에 속하게 되면 비도덕적으로 변해 버리는 일도 드물지 않습니다. 


교회도 하나의 사회이고 보니 이 법칙이 그대로 적용되는 것 같습니다. 성도들을 개인적으로 만나보면 교회는 천국 같아야 정상입니다. 한 분 한 분 거의가 다 좋은 분들이니까요. 그런데, 실제로 그런 성도들이 모여서 만든 교회는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도 여전히 많은 문제가 있으며 정직하게 말씀드려서, 전혀 성경적이지 않은, 때로는 교회 바깥보다도 못한 모습들이 많이 존재합니다. 교회도 여전히 어쩔 수 없는 악한 구석들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이고 보니 ‘개인이 가지는 악의 총합보다 집단이 가지는 악의 크기가 훨씬 크다’는 법칙에서는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어떤 사회나 집단을 바꾸기 위해서는 제도를 바꾸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반대편에서는 결국 모든 것이 사람의 문제이기 때문에 사람의 개혁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제 생각에 이 두 가지는 함께 진행되어져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어떤 집단이든 사람들이 모여서 만드는 것이니 그 집단을 이루는 사람의 생각과 마음을 바꾸는 작업과 그들이 속한 집단의 제도 속에 있는 옳지 못하고 비도덕적인 요소들을 함께 제거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결정적인 것은 사람입니다. 사람이 변하지 않으면 결국 억지로 바꾼 제도도 제 자리로 갈 수 밖에 없으니까요. 그래서 결정적으로 변화되어야 할 것은 조직이나 제도가 아니라 사람입니다. 교회의 변화와 회복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도 사람으로 이루어진 집단이기 때문에 두 가지의 변화가 함께 이루어져 가야 하지만 결국 그 속의 사람의 변화가 더 결정적입니다. 제도나 구조의 변화 또한 일시적인 변화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두 주에 걸쳐서 복음 안에서 바울, 빌레몬, 그리고 오네시모가 어떤 사람으로 변화되어 갔는지를 살펴 보았습니다. 오늘은 바로 이 두 사람이 속했던 교회의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이미 말씀드린대로 빌레몬서는 바울이 빌레몬에게 보낸 개인적인 부탁을 담은 개인적인 편지입니다.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이 편지의 수신인은 교회 전체로 되어 있습니다. 2절을 보면 “… 자매 압비아와 및 우리와 함께 군사된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게 편지하노니” 라고 되어 있습니다. 수신자가 개인이 아니라 빌레몬의 가정에 모인 교회 전체입니다. 그렇다면 왜 빌레몬 개인에게 개인적인 부탁을 담은 편지를 쓰면서 사도 바울은 빌레몬의 가정에 모인 교회 전체를 편지의 수신자로 삼았을까요?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문제는 얼핏보면 빌레몬 개인의 문제인 듯이 보입니다. 오네시모의 주인이 빌레몬이었고, 오네시모가 손해를 끼친 것도 빌레몬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사실 오네시모를 받아들이는 것은 빌레몬 개인의 일을 넘어서서 그의 집에 모인 교회 공동체 전체의 문제였습니다. 오네시모는 종이었습니다. 그것도 주인에게 큰 손해를 끼치고 도망갔던 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교회는 그런 오네시모를 예수 안에서 형제로, 그리고 함께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는 동역자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것이 과연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는 쉬운 일이었겠습니까? 만약에 어떤 사람이 교회에 들어와서 사람들을 속여 금품을 갈취하고 외국으로 도망쳤는데, 그 교회를 세워 놓고 선교사로 떠났던 목사님이 거기서 그 사람을 만나 전도를 한 후에, 그 사람을 돌려보내면서 교회의 온전한 일원으로 용서하고 받아들이라고 한다면 그 교회의 사람들은 그 사람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교회가 죄인들이 모이는 곳이고, 또 부족한 사람들이 함께 하는 곳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렇지만, 막상 그런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오면 그런 사람들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일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 일은 언제나 갈등과 고민을 만들어 냅니다. 어느 교회나 겪는 일입니다만, 가끔씩 노숙인들이나 술 취한 사람들, 그리고 정신이 온전치 못한 분들이 예배를 드리러 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함께 예배드려야 할까요? 잘 권면해서 돌아가게 해야 할까요? 고민이 생겨날 수 밖에 없습니다. 분명히 원칙적으로는 그런 사람들을 더 환영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게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분들이 교회에 들어오는 것을 꺼리는 분들이 교회 안에 있습니다. 인간적인 거부감도 때문이기도 하지만, 예배가 방해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도 작은 문제는 아닙니다. 교회는 누구든지 와서 예배드릴 수 있는 곳이라는 사실과 예배가 방해되어서는 안된다는 사실, 이 두 가지가 서로 부딛히면서 고민스러운 상황을 만들어 냅니다. 다수의 교회는 그런 분들을 예배드리는 회중과 격리시키는 방향으로 이 일을 처리합니다만 과연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도 옳은 일인지는 확신할 수가 없습니다. 


교회가 오네시모를 받아들이는 문제는 이런 문제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더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그것은 노예를 말하는 당나귀라고 생각했던 시절에 도망쳤던 노예를, 자신과 동등한 성도와 형제로 받아들이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교회를 향해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온전히 받아 들여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만약에 빌레몬의 집에 모였던 교회가 이 문제를 성경적이고 신앙적으로 처리할 만큼 충분히 성숙해 있다는 판단이 서지 않았다면, 사도 바울은 빌레몬과 교회에 이런 요구를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오네시모를 받아들여야 할 교회가 오히려 그를 배척하고 괴롭게 할 것이 분명하니까요. 이렇게 보면 빌레몬의 집에 모였던 성도들은 바울의 요구를 충분히 받아들일 정도로 신앙적으로 성숙해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빌레몬이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사람이며 또 어떻게 변화되어 갔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렇지만, 빌레몬만이 아니라 빌레몬이 속한 교회의 성도들도 빌레몬처럼 성숙해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자신들이 부리던 종을 형제요, 자매로 받아들일 수 있었으며, 회개하고 변화되었다면 큰 죄를 지은 사람의 과거도 문제 삼지 않을 정도로 큰 포용력을 가진 사람들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가 사는 사회와 시대의 통념과 사고방식을 넘어서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당시에는 도망친 노예가 잡히면 그를 매질해서 죽이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십자가에 달기도 했습니다. 다른 노예들에게 경고를 주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러나 빌레몬과 그의 집에 모인 성도들은 오네시모를 자신들의 형제와 동역자로 받아들여 주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당시의 사람들과는 다른 기준과 눈으로 오네시모를 보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런 눈으로 보았기에 오네시모가 주인에게 손해를 끼치고 도망친 노예라는 사실이 변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한 형제로 받아들여 주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은 다 악하고 부족합니다. 그래서 누구나 속속들이 알고 나서 그 사람을 사랑하고 용납하기는 정말 어렵습니다. 이해하고 용납해 보려고 하지만 그러한 노력은 성공할 때보다 실패할 때가 훨씬 더 많습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신앙생활한 성도들치고 교회 안에서 사람을 사랑하려고 하다가 상처를 받지 않고, 사람을 용납하는 일에 대해서 좌절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하고 용납하는 아름답고 선한 일이 우리에게 이렇게 힘들고 상처가 되는 이유는, 그 사람이 정말 그렇게 사랑하고 용납하기가 힘든 사람이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우리가 상대방을 그저 우리 눈에 보이는 대로만 바라 보면서 그를 용납하고 사랑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모두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라면 서로를 바라볼 때, 꼭 인정하고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할 ‘사실’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 내 눈에 보이는 상대방의 모습이 어떻든지 간에 그 사람이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 들어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정하는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누구든지-이 일에는 예외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이것은 단순한 선언입니다. 우리가 아니다 맞다를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이미 일어난 사실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그 사람이 지금 어떤 상태에 있건, 또 누구이건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그는 이미 새롭게 지음 받은 새 사람입니다. 내 눈에 보기에 여전히 옛 사람처럼 보인다고 해도 그는 이미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그것이 그 사람에게 일어난 실제의 사건입니다. 


그의 과거는 형편없었습니다. 주인에게 손해를 끼치고 도망친 무익한 노예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되었습니다. 복음이 그를 전혀 다른 새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사람 개인만 보면 기대할 것이 없습니다. 믿을 수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주님 안에 있을 때, 그는 기대할 것이 있고, 신뢰할 수 있으며, 충분히 받아들여질만한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렇게 되어져 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빌레몬의 집에 모였던 교회는 오네시모를 그런 눈으로 바라보고 그렇게 용납할 줄 아는 그런 교회였던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예수를 믿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인격이나 삶이 갑자기 매력적인 삶으로 바뀌었거나 우리의 인격이 고매하며 사랑스러워지진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그런 것과는 상관 없이 우리가 그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또 계속 그 분 안에 거하고 있다는 그 사실만으로 그냥 믿고 기다려 주십니다. 내쫓지 않으시고, 정죄하지 않으시고 말입니다. 과거는 추궁하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작은 변화라도 그대로 인정해 주시며, 그 변화의 길을 가도록 용기를 주시며, 거기 필요한 모든 은혜를 공급해 주고 계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과 기다리심 덕분에 오늘 우리가 이렇게 주님을 섬기며 은혜 가운데 살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가 자주 그러는 것처럼 하나님 자신의 기준을 전혀 양보 없이 우리에게 적용하신다면 오늘 이 자리에 있을 사람은 우리에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때로는 악하고, 때로는 부족하고, 때로는 매정하고, 때로는 참 믿음이 없어도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그 사실만으로 변함 없이 사랑해 주시니 지금 우리가 이렇게 주님을 믿고 예배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처음 예수를 믿고 변화를 경험한 후에 기쁘고 기대에 찬 마음으로 교회에 들어왔다가 자신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에 상처를 입은 분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이죠. 그런데, 그 분들의 이야기는 한결 같습니다. 정말 힘들게 교회 안으로 들어왔는데 오히려 그런 자기를 의심하고 자기를 경계하더라는 것입니다. 당장 보이는 모습만으로 자신을 평가하고 정죄하더라는 것입니다. 그 일 때문에 상처를 입고 이제 막 시작된 신앙의 여정에 브레이크가 걸렸다고 말합니다. 얼마나 안타깝고 미안하고 죄스러운지… 저는 이것이 예수믿는 우리들의 모습이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은혜 덕분에 주님 앞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를 망각한 모습이니까요. 


동료 목사님이 이런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앞에 가던 차 두 대가 접촉사고를 냈는데, 서로 가지 않고 내가 잘했느니, 네가 잘못했느니 하면서 따지더라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길이 막혀서 가지 못하던 다른 차를 운전하던 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답니다. “저거 저거 저렇게 따지는 거 보니 분명히 예수쟁이들이다.” 그 목사님은 그렇게 말한 사람에게 뭐라고 변명을 하고 싶었지만 


성도 여러분, 이것이 어쩌면 믿지 않는 사람들이 저와 여러분을 바라보는 시각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사랑과 용서에 대해서 이야기는 정말 많이 합니다. 성도이든 목사이든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지만,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지면 사랑하고 용서하기 보다는 잘잘못부터 따집니다. 평가하고 정죄하기에 바쁩니다. 우리가 믿는 진리라는 것 자체가 본질적으로 옳은 것과 그른 것의 문제이고, 항상 그런 진리를 상대하면서 살아가다 보면 이렇게 되기가 정말 쉽습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영적인 핸디캡입니다. 우리는 우리 모두가 이미 그렇게 되기 쉬운 환경 속에서 사는 그런 경향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들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용서와 사랑을 말하지만 행동은 정반대인 그런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다른 사람에 대해 알고 있는 것보다 우리들에 대해서 훨씬 더 많은 것들을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과거를 완벽하게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어떤 죄를 지었으며,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잘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지금도 믿는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마음에 얼마나 악한 것들을 많이 품고 살아가고 있는지도 아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주님이 우리를 전혀 인정하시지 않고, 우리를 의심하시면서 배척하신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는 얼마나 비참하고 소망없는 삶을 살게 될까요? 우리가 믿음 안에서 든든함과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것, 그리고 은혜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전혀 이런 분이 아니신 덕분입니다. 


사실 사람을 믿어 준다는 것, 그리고 참고 기다린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이 그러셨듯이, 그리고 지금까지 주님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던 수많은 성도들이 그랬듯이 우리도 서로를 향해 믿고 용납하고 기다려 주어야 합니다. 항상 서로의 변화를 믿어주고 또 격려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다가 속으면 어떻게 하냐구요? 그런 일에는 속아도 좋습니다. 이렇게 속는 것은 주님 때문에, 그리고 주님 안에서 속는 것이고 그래서 아름답고 덕스러운 것이니까요. 


사람은 악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모인 사회는 더 그렇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똑같은 사람들이 모였으니 자연적으로는 교회도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런 교회를 아름다운 교회, 행복한 교회, 누구나 용납될 수 있는 교회로 가꾸어 가야 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그 해답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일에 있ㅅ브니다. 사람은 실패해도 하나님은 실패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날까지 그 착한 일을 이루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 속에서 그렇게 일하고 계신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를 바꾸어 가시는 하나님께서, 그 사람도 반드시 바꾸어 가실 것을 기대해고 또 믿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좋은 교회는 누가 만들까요? 좋은 교회는 좋은 사람이 만듭니다. 주님의 교회는 주님의 사람들이 만듭니다. 주님의 눈과 마음을 가진 사람들만이 좋은 교회, 주님의 교회를 만들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마음에 맺힌 것들을 푸십시오. 넓은 마음을 가지십시오. 이것을 위해서 항상 기도하십시오. 주님의 눈으로, 주님의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하게 해 달라고, 사람을 보고 실망하고 지칠 때, 그 속에서 여전히 일일하시고 기다리고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서로를 그저 인간적인 눈으로 바라보아서는 안되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모두를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으니 하나님께서 새롭게 지어가고 계시는 사람, 그래서 우리가 믿어주고 용납하며 용기를 주고 기다려 주어야 할 사람들로 여기고 그렇게 대해 주어야 합니다.

빌레몬은 그리고 그의 집에 모였던 성도들은 주님의 눈과 마음으로 사람을 바라볼 줄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교회는 오네시모같은 실패한 인생도 편안히 들어와 마음껏 쉬며 더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져 가는 그런 교회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주님의 눈과 주님의 마음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바다처럼 넓고 큰 사람들이 되게 해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교회가 넓은 바다와 같은 교회, 모든 물고기들이 마음 놓고 헤엄치며 성장해 가는 그런 대양과 같은 교회로 세워져 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