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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4.09.28. 주일오전 - 왕이 좋게 여기실진대(에스더 2)



에0109to22 - 왕이 좋게 여기실진대(에2).pdf




성경본문 : 에스더 1장 9-21절





사람들은 흔히 겉모습이 대단하면 당연히 그 속과 내용도 대단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세계에서 제일 큰…’이라든지 혹은 ‘아시아 최고의…’라는 수식어에 열광하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겠지요. 그렇지만, 실제로 겉으로 보이는 크기나 규모, 그리고 외형적인 화려함은 그것이 가지고 있는 내용의 진실함이나 충실함과는 일치하지 않을 때가 많고 전혀 상관없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 말은 여러가지 뜻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이 말을 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라는 측면에서 생각해 본다면, 이 말은 우리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처럼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이 될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처럼 어떤 일이나 사람의 진짜 모습이나 본질을 꽤뚫어 볼 수 있는 능력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처럼 이 세상을 바라보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하고 또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어떤 것이나 어떤 일의 크기나 규모만 보고 현혹되는 것, 그리고 반대로 그것 때문에 어떤 것이나 혹은 사람을 무시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을 우리가 어떤 것을 바라보고 또 판단하는 일의 출발점으로 삼을 수만 있어도 우리는 겉모습에 속아서 오판을 내리고 우리의 삶의 방향이 그릇된 곳으로 흘러가는 것을 방지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겉모습과 내용물이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자꾸 눈에 보이는 것 때문에 절망하거나 겉모습만 그럴 듯하게 해 놓으면 내 인생과 이 세상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게 되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일에 우리는 에스더서의 배경이 되는 아하수에로 시대의 페르시아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페르시아는 얼마나 대단한 나라였습니까? 그 당시 북아프리카에서 아시아 초입까지의 광대한 영토를 다스렸던 나라였고, 인구수로 보면 그 당시 전세계 인구의 거의 3분의 1을 다스렸던 그야 말로 어마어마한 대제국이었습니다. 특히 아하수에로는 그런 페르시아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했던 왕이었습니다. 그의 권력과 그가 다스리던 왕국의 부강함은 그가 왕좌에 앉은 후 3년째 되던 해에 벌였던 잔치를 통해 엿 볼 수 있는데요. 그는 가장 화려하고 풍성한 잔치를 무려 반 년에 걸쳐서 벌였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렇게 하고도 그 나라는 아무런 타격을 입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어떤 나라가 반 년 동안 흥청망청 잔치를 벌이고도 전혀 나라살림에 타격을 입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런데 그 당시의 페르시아는 그랬습니다. 그 정도로 부강한 나라였습니다. 그리고 아하수에로는 이런 나라의 만인지상 무인지하 하나 밖에 없는 군주였습니다. 도대체 우리로서는 그 나라가 어떤 나라였는지 그리고 아하수에로가 얼마나 큰 권력을 가지고 있었는지 감을 잡기조차 어렵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에스더서 전체로 보면 그 거대한 왕국에 포로로 잡혀왔던 패전국 백성의 한 사람인 에스더가 어떻게 해서 그 나라의 국모가 되었는지 그 배경을 알려주는 아주 중요한 본문입니다. 그 배경이란 바로 에스더 이전에 그 나라의 왕비였던 와스디의 폐위된 사건인데요. 오늘 본문은 왜 와스디가 폐위되었는지 그리고 그 과정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짧은 이야기는 우리에게 그 이야기 뿐만 아니라 당시 페르시아라는 그 위대하고 부유한 왕국의 진짜 모습이 어떠했는지 그 민낯을 보여주고 있기도 합니다. 


귀족들과 고관대작들을 위한 180일간의 잔치가 끝나고 아하수에로는 이번에는 수산궁에 사는 평민들을 대상으로 일주일간의 잔치를 벌였습니다. 그 잔치는 왕국의 부요함과 아하수에로의 관대함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모습으로 계획되고 또 진행되어 졌습니다. 그 잔치는 정말 성공적이었습니다. 백성들은 그 위대한 아하수에로 왕과 함께 마음껏 먹고 마시면서 왕의 관대함과 은혜에 찬사를 쏟아내었을 것입니다. 이제 그 잔치가 끝나는 마지막 날입니다. 주흥이 오를 대로 오른 아하수에로는 그 순간을 위해서 준비해 놓았던 특별 이벤트를 시작합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왕비인 와스디를 군중 앞에 등장하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아하수에로가 그 일을 지시하면서 “왕후 와스디를 청하여 왕후의 관을 정제하고 왕 앞으로 나아오게 하여 그의 아리따움을 뭇 백성과 지방관들에게 보이게 하라”고 말한 것과 성경이 다시 한 번 “이는 왕후의 용모가 보기에 좋음이라”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와스디는 정말 정말 아름다운 여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페르시아 최고의 미인이었을 것입니다. 아하수에로는 잔치의 절정에서 화려하게 차려입은 아름다운 왕비를 백성들 앞에서 자랑하면서 자신의 영광을 한껏 뽐내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일곱 명의 내시가 왕비에게 보내졌습니다. 한 명만 보내도 되는데 일곱 명을 보낸 것 또한 왕비를 자랑하고 싶어하는 아하수에로의 과시욕이 어떠한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하지도 못했던 일이 충격적인 일이 일어납니다. 그 중요한 순간에 와스디가 아하수에로의 요구를 거절한 것입니다. 와스디가 다시 내시들을 돌려 보내면서 가지 않겠다고 통보한 것입니다. 우리가 후에 살펴보겠지만 당시 페르시아의 왕실은 완전히 남성중심적인 사회였습니다. 왕비라고 하더라도 왕이 부르지 않았는데 왕을 만나러 갔다가 만약 왕이 그것을 받아들여주지 않으면 목숨을 잃게 될 수도 있을 정도였습니다. 말이 왕비지 왕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거의 노예나 마찬가지의 위치에 있었습니다. 요즘 시대와는 너무 다르죠? 요즘은 부인께서 부르시는데 남편이 그 부르심에 순종하지 않았다가는 나중에 어떤 봉변을 당할지 모르는데 말입니다. 와스디는 자신이 왕의 요청을 거절한 일이 얼마나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지 충분히 알고 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도 와스디는 그 요청을 거절했습니다. 우리가 그 이유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이런 이유들 중의 하나였을 것입니다. 그녀가 자신의 미모를 너무 과신했기 때문에 기고만장 했든지 아니면 그래도 명색이 왕비인데 술취한 백성들 앞에서 구경거리가 되기 싫었기 때문이든지 아니면 아하수에로의 왕비로 사는 일에 신물이 나서 스스로 그 자리를 내려놓으려고 그랬던지 말입니다. 저는 세번째 이유가 가장 타당한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와스디가 그런 위험한 모험을 할 리가 없었을 테니까요. 


아무튼 이 일은 아하수에로에게 너무나 커다란 충격을 주었습니다. 온 천하를 손에 쥐고 있는 왕이 자신의 아내 때문에 자신을 신처럼 생각하는 백성들 앞에서 심한 모욕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왕의 마음은 분노로 불타올랐습니다. 그래서 이 일의 사후처리를 위해서 성경이 현자들이라고 부르고 있는 일곱 명의 법률가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왕은 그들에게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느냐고 묻습니다. 천하의 페르시아 대왕이 아내 하나 제대로 다스리지 못해 그런 수모를 당한 것도 우스운 일이지만 사실 그 일의 처리를 위해서 대신들을 불러 모아 의견을 묻는 것 또한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우스운 일입니다. 그런데 그 현자들은 왕을 정말로 걱정해서 직언을 하는 충신들이 아니었습니다. 결코 현명한 사람들도 아니었고요. 그들은 그저 왕의 낯빛이나 살피면서 비위나 맞추는, 그러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왕에게서 얻어내는 그런 사람들에 불과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왕의 최측근에 있었으니 그 나라가 제대로 돌아갔을 리가 없습니다. 


므무간이라는 사람이 그 일곱 사람 중의 우두머리였는데요. 그는 다른 지방관리가 있는 자리에서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왕후 와스디가 왕에게만 잘못했을 뿐 아니라 아하수에로 왕의 각 지방의 관리들과 뭇 백성에게도 잘못하였나이다” 이것은 전형적인 물타기 작전입니다. 왕 개인의 수치를 페르시아에 있는 모든 남편들의 수치가 되게 만들면서 그 초점을 흐려 놓으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만약 아하수에로 왕이 왕후를 오라고 청했는데 왕후가 그것을 거절하였다는 소문이 들리면 결국 그것은 결국 페르시아의 모든 여인들이 남편을 무시하는 결과로 이어지게 될 것이라고 그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문제는 엄하게 다루어야 한다고, 와스디를 폐위 시키고 왕후의 자리를 다른 더 나은 여인에게 주어야 한다고 조언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왕의 조서로 만들어 공표하면 왕국 안의 모든 여인들이 남편을 존경하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 이유가 그럴 듯 합니까? 그리고 그렇게 하면 정말 백성들이 그런 반응을 보일까요? 아주 적절한 예는 아니지만 만약 제 아내가 저를 무시한다고 해서 여기 계신 여성 성도 분들이 ‘거봐라. 장목사 사모도 그런다더라. 나도 꼭 본 받아야지?’하면서 집에 가셔서 여러분의 남편을 무시하시겠습니까? 그래서 결국 우리 교회와 연관이 있는 모든 남편들은 집에서 괄시받는 불쌍한 남편들이 되는 그런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아니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왕비가 왕을 존중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아는 모든 여인이 다 자동적으로 자기 남편을 존중하게 되지는 않습니다. 또 한 가지 므무간은 왕이 왕후를 그렇게 처리한 것을 법으로 만들어 공포하면 귀천을 막론하고 모든 여인이 자기 남편을 존경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데요. 성도 여러분, 부부지간의 존경과 존중이 법으로 정한다고 되는 일입니까? 그리고 만약 그렇게 법으로 정해지고 그 법을 어겼을 때 주어질 벌이 무서워서 남편을 존중한다면 그게 진짜 존중일 수 있을까요? 


그런데, 놀랍게도 므무간은 그런 제안을 했고 아하수에로는 그 제안을 좋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곧바로 단 한 번 왕후와 이야기를 나눠보지도 않고서 와스디를 폐위시키고, 그 예를 법으로 정해서 그 넓은 페르시아 영토 내에 있는 모든 지역의 모든 민족들에게 공포했습니다. 아하수에로가 이런 선택을 한 것은 그렇게 하면 적어도 남자들 앞에게는 자신의 자존심을 세울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면 최소한 왕은 자기 아내에게 무시당하고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한 못난 남자라는 소리는 듣지 않게 될 것이고, 동시에 가정 안에서의 자신들의 위치도 바로 세워질 테니 결과적으로 왕을 칭찬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과정에서 아주 우스운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사실 그 날 아하수에로 왕과 와스디 사이에서 있었던 일은 그렇게 크게 확대될 필요가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왕이 조금 진중했다면 충분히 왕가 안에서의 일로 끝낼 수 있었지요. 그런데, 그 사이에 끼어든 므무간의 과잉충성으로 인해서 그 일을 몰라도 될 모든 사람들이 그 사건을 알게 되었습니다. 므무간이 제안한 그 법은 어쩔 수 없이 왕비가 쫓겨난 일과 함께 선포될 수 밖에 없었으니까요. 게다가 그 법은 제국 안에서 살고 있었던 모든 민족들의 언어로 기록되어 선포되었습니다. 왕은 전국적인 동시에 국제적인 망신을 당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페르시아에 정복당했던 다른 나라 백성들이 그 사실을 알고 속으로 얼마나 웃으며 통쾌해 했을까요? 온 세상을 제 맘대로 할 것처럼 뻐기더니 자기 마누라 하나 어쩌지 못한다고 말입니다. 또 그것을 이렇게 이상하게 해결한다고 말입니다. 왕도 므무간도 그 일을 그런 식으로 물타기 해서 대충 넘어가려고 했겠지만 오히려 그것 때문에 일은 일대로 너무나 미숙하게 처리하고 망신은 망신대로 당하는 그런 결과로 이어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는 와중에 왕후는 단 한 번의 항변도 못하고 그저 자리에서 쫓겨나게 되고 말입니다. 얼마나 감정적이고 비인격적으로, 그리고 즉흥적으로 일이 처리되고 있는지 모릅니다. 


지난 주일 우리는 위대한 페르시아 제국의 겉모습을 살펴 보았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그 위대한 제국을 다스리던 왕과 신하들의 모습을 살펴 보았습니다. 이 둘 중에 어떤 것이 페르시아의 진짜 모습일까요? 그 제국의 겉모습은 정말 화려하고 대단했습니다. 역사 속에 존재했던 그 어떤 나라보다도 부유하고 강했으니까요. 그러나, 그 거대하고 화려한 나라의 속 모습은 전혀 그런 겉모습과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그 나라의 핵심인 왕과 그의 측근인 신하들은 모두가 다 즉흥적이고 생각이 깊지 않습니다. 신하들은 왕의 눈치만 보기에 바쁘고 왕은 그저 자기를 자랑하거나 반대로 자존심 지키기에만 급급합니다. 국가의 유익이나 국민의 안녕이 아니라 그것을 그들이 나라를 다스리는 국정원칙으로 삼았습니다. 그런 그들의 손에 그 큰 나라의 모든 일들과 모든 백성들의 삶이 달려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운명 또한 그들의 손에 쥐어져 있었습니다. 사실 에스더서가 기록하고 있는 말도 안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위기는 바로 그 나라가 이런 모양이었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었습니다. 


만약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속 내용이 항상 일치한다면 우리는 아무런 두려움도 불안도 느낄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겉모습이 든든해 보이고 충분해 보일 때는 그것 자체가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분명한 증거가 되니 불안해 하고 두려워 할 필요가 없을 것이고, 만약 그 반대라면 빨리 그 원인을 찾아내서 그것만 바로 잡아 놓으면 될 테니까요. 그러나, 이 세상은 우리가 페르시아의 모습을 살펴보면서 다시 한 번 깨닫게 되는 것처럼 겉과 속이 같지 않습니다. 그리고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는 진짜 속 모습이 훨씬 더 심각하게 망가져 있고 불안한 상태일 때가 대부분입니다. 사람들이 진실을 원하면서 막상 진실을 두려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겠지요. 무슨 일이든 항상 겉으로 보기 보다는 속이 더 심각할 때가 많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래서 진실을 알게 되면 더 불안해 질테니까요. 그래서 사람들은 마치 건강검진 받기를 두려워 하는 그런 마음으로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정치에 참 관심이 많습니다. 그만큼 이 나라의 정치가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는 뜻일 것이고, 그래서 아직은 우리가 정치에 무관심해도 좋은 그런 상태가 아니라는 뜻일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로서 항상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정치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정치를 생각할 때,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은 정치만 바로 세워지면 다 된다는 식의 정치만능주의에 빠져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성도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득 문득 놀라는 것은 참 신앙이 좋다고 생각되는 분들 중에서도   “이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다 되고, 이 사람이 지도자가 되면 다 해결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꽤 많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의 정치만능주의라고 할 수 있는데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기독교가 인간에 대해서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또 확실히 믿는 변함 없는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인간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능력도 부족하고 판단력도 부족하고 또한 도덕적인 면에서도 항상 부족한 것이 바로 우리들을 포함한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슈퍼맨처럼 생각하고 절대적인 신뢰를 보내는 그 사람도 결국 그런 인간들 중의 하나입니다. 그 또한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그 속에 아하수에로나 그의 신하들을 닮은 모습을 지닌 불완전한 존재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나 그런 사람들이 행하는 정치에 너무 과도한 신뢰를 두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거대하고 화려해 보이는 세상은 실제로 이렇게 그런 세상을 지탱할 만한 능력과 자질이 턱 없이 부족한 사람들에게 맡겨져 있습니다. 페르시아라는 거대한 제국이 아하수에로와 그의 신하들에게 맡겨져 있었던 것처럼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나라, 우리가 발 붙이고 서 있는 이 세상도 그런 사람들에게 맡겨져 있습니다. 안 그랬던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의 불편한 진실이고 또 피할 수 없는 현실이기도 합니다. 사회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의 지도자들 또한 부족하기 한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항상 잘못된 구석을 가지고 있고 언제든지 삐딱선을 탈 수 있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현실적인 면에서나 영적인 면에서 우리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렇다고 해서 너무 두려워 하거나 혹은 좌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현실이고 우리의 현실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에 대한 진실이지만 우리는 그 진실을 알아도 거기에 두려움과 분노로 반응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충분히 그런 현실에 무관심해 지지 않으면서도 충분히 애정과 소망을 품고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페르시아 같은 거대한 제국을 아하수에로처럼 즉흥적이고 제멋대로인 사람이 다스린다는 것,  그리고 그의 곁에는 그런 왕의 눈치만 보는 사람들만 있었다는 것은 분명히 그 나라에 존재하는 거대하게 갈라진 불안한 틈새였습니다. 그리고, 천하를 호령하던 만인지상의 권력자였던 아하수에로에게는 자신의 아내이자 왕후였던 와스디가 메꿀 수 없는 틈새였구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런 틈새들을 통해서 이 세상의 역사 속으로 뛰어 들어 오십니다. 그리고 바로 거기서 이 세상을 정말로 움직이는 것은 그런 불완전한 권력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증명해 보이십니다. 그 대표적인 이야기가 바로 이 에스더서이고 우리는 오늘 바로 그렇게 갈라진 첫번째 틈새를 본 것입니다. 


오늘 우리 귀에 들려오는 우리가 사는 이 나라와 이 세상의 이야기들은 우리를 즐겁게 하고 미소 짓게 하며 마음 든든하게 해 주는 것들 보다는 그렇지 않은 것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우리 개인의 삶이나 존재를 보아도 그렇지요. 불안하기는 우리 개인의 삶과 존재 자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를 보아도 갈라진 틈이고 저기를 보아도 갈라진 틈이니까요. 그렇지만 성도 여러분, 바로 그런 틈들이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이 세상과 우리의 삶 속으로 들어오게 만드는 문이고 하나님께서 앉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보좌입니다. 우리가 그 틈을 통해 뚫고 들어와 이 세상과 우리의 삶을 강하게 다스리시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볼 수 있다면 우리가 비록 흔들리고 갈라진 이 거대한 세상에서 부족함과 연약함을 안고 살아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안함과 두려움이 아닌 믿음과 소망으로 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틈새가 우리 손에 있을 때는 불안하기만한 틈새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주님의 손에 있을 때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가장 명확하게 드러나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보좌가 됩니다. 그 틈새는 결국 하나님만이 참된 왕이라는 진리를 선포하는 커다란 나팔이 되기 때문입니다. 에스더서는 틈새 투성이인 세상과 인생들의 경연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 우리는 보이지 않게 그 모든 틈새들을 메꾸시고  선하고 바른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이 세상의 참된 왕이신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에스더서를 살피는 동안 이 하나님을 진실로 믿게 되고, 또 이 하나님을 참된 왕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이 커다란 복을 깨닫게 되어, 하나님 안에서 참 평안을 알고 누리게 되는 은혜를 누리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