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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4.10.03. 금요기도회 - 바예수라하는 유대인(사도행전 78)







본문 : 사도행전 13장 4–12절





우리가 마땅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그럴 수 있다고 생각되는 일을 저지르는 것을 볼 때는 별로 놀라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전혀 그럴 것 같이 생각되지 않았던 사람이 예상 외의 일을 저지르면 놀랄 뿐만 아니라 충격을 받습니다. 전력이 많은 범죄자가 또다시 죄를 지으면 그저 또 그랬구나 할 뿐이지만 그래도 지도급에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이 파렴치한 일을 저지르면 우리는 그야 말로 충격에 빠지고 마음에 분노마저 품게 됩니다. 우리의 사고방식에는 형식과 내용이 그래도 어느 정도는 맞아 떨어져야 마음이 편합니다. 이게 많이 어긋나거나 아얘 서로 틀어져 버린 일을 보면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계속해서 마음이 불편하지요. 그게 정확하게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답하기가 쉽지 않지만 사람들은 어떤 것을 보고 또 어떤 사람을 볼 때, 그것 답고 그런 사람 다워야 마음이 편안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인간 다워야 하고, 학생은 학생 다워야 하며, 어른은 어른 다워야 합니다. 대통령은 대통령 다워야 하고 국회위원은 국회위원 다워야 합니다. 목사는 목사 다워야 하고 성도는 또 성도 다워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마음은 편안한 기쁨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분명히 물건은 그 물건 다워야 하고, 사람은 자신이 그렇게 불리는 신분이나 위치 다움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그게 정상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애석하게도 그렇지 않은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왜냐하면 ‘답다’는 것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목사를 예로 든다면, 목사가 목사 다우려면 일단 목사가 자신은 꼭 목사다워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목사다운 것인가에 대한 확실한 기준이 있어야 하지요. 그리고 나서 가장 어려운 것은 끊임없이 그 기준에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 애쓰고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점점 더 목사다워질 수 있습니다. 반대로 자신이 목사다워야 한다는 것도 모르고, 목사답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또 스스로 목사다워지기 위해서 기도하면서 뼈를 깍는 듯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절대로 목사다워질 수 없습니다. 그러면 자신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하나님도, 그를 바라보는 성도들과 세상도 그를 ‘그래도 목사답다’라고 인정해 줄 수 없을 것입니다. 


제가 목사의 예를 들었지만 이것은 성도다워지는 것도 마찬가지이고, 또 심지어는 인간다워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모든 것이 저절로 되는 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더 많은 사람들은 ‘무엇’다워지는 것보다 그저 ‘무엇’이 되는 일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그저 목사가 되고, 성도가 되고, 의사가 되고, 변호사가 되고, 판사가 되고, 교수가 되는 일에만 관심을 가집니다. 그리고 되기만 하면 다 된다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적어도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점점 더 이렇게 되어져 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정말 엄청난 영적인 특권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오히려 정반대로 그 ‘다움’을 잃어버린 채로 하나님 앞에서 가장 비참한 인생으로 전락해 버린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바로 ‘바예수’입니다. 이 이름은 히브리 말로 구원의 아들, 혹은 여호수아의 아들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름만 보면 정말 하나님의 백성 중에서도 가장 하나님의 백성다운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실상은 그와는 완전히 딴 판이었습니다. 우리가 본문에서 바예수라는 이름을  처음 듣는 순간부터 그런 모습이 드러나지요. 바예수는 바나바와 바울이 구브로 섬에 가서 처음으로 만난 두 사람의 대적이었는데요. 이 사람은 거기서 한 자리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구브로의 총독인 서기오 바울에게 적지 않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으니까요. 


두 사람은 구브로 섬을 가로지르면서 유대인의 회당마다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아마도 회심하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생겨났겠지요. 그래서 두 사람의 소문은 총독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었고, 총독은 두 사람을 불러서 복음을 들어보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을 초청했지요. 그런데, 총독과 함께 있던 바예수가 두 사람의 사역을 방해할 뿐만 아니라 총독이 믿음을 가지는 일도 방해했습니다. 아마도 근거 없는 모함을 해댔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사람을 우리에게 소개하면서 처음부터 이렇게 말합니다. “유대인 거짓 선지자 마술사 바예수….” 바예수는 유대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예수의 복음이 선포되기 전까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신들을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여기며 그 자존심으로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이들을 특별대우 하셔서 이들에게만 특별한 은혜를 주시고, 율법과 하나님의 말씀을 맡기셨습니다. 바예수는 그런 유대인들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이 그가 유대인이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다음에 곧바로 이 사람을 ‘거짓 선지자 마술사’라고 말합니다. 일단 거짓 선지자입니다. 선지자가 어떤 사람인가요?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뜻을 말해주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바예수는 진짜 선지자가 아니라 가짜 선지자였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빙자하여 사람들에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려 주면서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거짓말을 하는 것을 업으로 삼았던 사람입니다. 주로 책임질 수 없는 좋은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아니면 근거 없이 겁을 주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성경은 그가 마술사였다고 말합니다. 마술사는 악한 영의 힘으로 보통 사람들이 할 수 없는 일을 일으키고 그것으로 사람을 겁주고 현혹해서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아주 악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거짓 선지자는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 쪽에서 보면 가장 질이 나쁜 사람이고 마술사는 잡신을 섬기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악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그것이 하나님이건 이방신이건 자신을 위해서 거침없이 이용하고 그것으로 사람들을 속이는 사람이 바로 바예수였던 것입니다. 


“유대인, 거짓 선지자, 그리고 마술사…” 이것이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타이틀이라는 것이 정말 이상하게 여겨질 정도입니다. 유대인은 거짓 선지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마술사가 되어서는 더더욱 안됩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서로 하나도 어울리지 않고 서로 모순되기만 하는 칭호를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그것을 즐기며 그것을 영광스러워 하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그가 바나바와 바울이 총독 서기오 바울에게 복음을 전해서 그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려고 하자, 서기오 바울과의 관계와 영향력을 이용해서 그 일을 집요하게 방해했습니다. 참던 바울이 드디어 성령님의 지시를 받아 이런 바예수에게 하나님의 진노를 선포했습니다. 먼저 바울은 벌을 선고하기 전에 바예수를 고소합니다. “모든 거짓과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정말 엄청난 정죄를 당하고 있습니다. 성령충만한 바울의 눈은 곧 하나님의 눈입니다. 바예수는 하나님의 눈으로 보기에 그런 사람이었고 지금 그런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참과 선한 것이 없습니다. 그저 그의 삶과 존재는 모든 거짓과 악행으로 가득 채워져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마귀의 자녀가 되어 있었고 모든 의로운 일을 거슬러 불의를 행하는 원수 노릇을 하고 있었으며, 지금은 그것으로도 모자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를 구하시려는 그 일을 노골적으로 방해하고 있습니다. 


하는 일로만 보면 그는 거짓 선지자이고 마술사입니다. 이것을 업으로 삼고 자기 힘과 부의 원천으로 삼고서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내면적으로는 거짓과 악행이 가득 차 있는 사람이고 마귀의 자녀이며 불의로 가득 찬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기 자신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몰랐고 여전히 하나님과 복음의 대적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사람은 유대인입니다. 유일하게 하나님을 알고 있었고, 자신을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 율법이 무엇을 가장 미워하고 있는지, 그리고 무엇을 가장 강하게 금하고 있는지 아는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예전에 신대원에 다닐 때 친하게 지내던 형님 한 분은 미국 예일대학에서 행정철학 박사학위 과정을 하시다가 부르심을 받고 신학교에 입학한 분이었습니다. 이 분이 자신이 학교에서 겪은 한 교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아마 그 교수도 유대인이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는데요. 그 교수님은 그 분야에서 실력은 정말로 탁월했다고 합니다. 누구나 인정할 수 밖에 없을 만큼 말입니다. 그런데, 그의 인격은 세상에 이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괴퍅하고 오만했다고 합니다. 처음에 그 형님은 그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어떻게 이 분야의 최고 실력자 중의 한 사람이 그런 인격을 가질 수 있을까 하고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정말 어려웠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사람의 실력과 인격, 명성과 인품은 저절로 일치되는 것은 아니다”라는 깨달음을 얻고는 조금은 마음이 편해 졌다고 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이 교수는 자신이 그런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런 명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인식했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그런 실력과 명성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런 실력과 명성 때문에 더욱 더 괴퍅하고 오만한 사람이 되었겠지요. 


비록 바예수를 정죄하고 그에게 하나님의 징벌을 선고하기는 했지만, 유대인인 바예수를 바라보는 바나바와 바울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로마인 총독인 서기오 바울도 그렇게 진중하고 진리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보이는데,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람이 그 사람 앞에서 그런 모습으로 살고 있고 또 그런 악한 일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으니 같은 유대인이요 또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얼마나 부끄럽고 당황스러웠겠습니까? 


저도 분명히 온전하지도 못하고 또 훌륭한 편도 못되지만 그래도 요즘은 정말 제가 목사인 것이 부끄러울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세상을 향해 흘러나가는 소식, 특히 목사들에 대한 소식들이 이건 정말 믿지 않는 사람들도 하지 않을 악한 일을 했다는 소식들이고, 그러면서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어디가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조차 모르는 뻔뻔한 모습과 그것을 당연한 듯이 변호하는 내용들이 여과 없이 전파를 타고 나라 구석 구석에 알려지고 있으니까요. 어떻게 목사가 되어서 저렇게까지 망가졌고, 그러면서도 여전히 목회를 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마다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나도 그들과 같은 목사라는 사실 때문에 정말 부끄럽기가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 때문에 그러지 않아도 힘들게 목회하고 있는 얼마나 많은 소박하고 정직한 목회자들이 한꺼번에 욕을 먹고 있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교회가 얼마나 큰 모욕을 당하고 있는가를 생각할 때, 정말 화가 치밀어 오르기도 합니다. 


내가 무엇이라고 불리는 것과 내가 그 부름에 합당한 사람이 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그것을 잊어버립니다. 성도면 되고, 목사면 된다고 생각하지요. 그러니 우리는 우리다워지지 않습니다. 유대인인 바예수가 유대인이었으면서도 거짓 선지자와 마술사가 되었고, 그 안에 거짓과 악이 가득 채워진 마귀의 자녀가 되었고 결국 하나님을 정면으로 대적하는 사람이 되었듯이 오히려 우리다움을 잃어버리게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귀신에게 괴롭힘을 받다가 구원을 받은 한 사람의 예를 드시면서 이런 비유를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 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이렇게 되리라” 


우리가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후에는 우리는 우리의 존재와 삶을 그냥 비워두면 안됩니다. 그 안을 성령님으로 가득 채우고 그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거룩한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 삶과 존재라는 집을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들로 채워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비록 우리가 구원을 얻었다고 해도 우리는 마치 무주공산처럼 되어 버립니다. 바예수는 유대인이었지만 유대인 다움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고, 유대인 다워지기 위해서 애쓰지도 헌신하지도 않았습니다. 그 결과 그는 유대인이면서도 가장 악한 마귀의 자녀가 되어 버렸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우리 다워야 합니다. 우리는 성도 다워야 하고 또 목사 다워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자녀다워야 합니다. 마음과 생각, 그리고 됨됨이가 날마다 우리 아버지이신 하나님처럼 되어져 가야 합니다. 무엇이 우리 다운 것인지, 무엇이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인지를 생각하면서, 그 대답에 우리의 삶과 존재의 방향을 맞춰가야 합니다. 우리다워지는데 헌신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들 또한 우리들 다움을 잃어버리고 자녀의 영광을 잃어버린 서글픈 모습이 될지도 모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셨습니다. 이 부르심은 자녀다움으로의 부르심입니다. 물론 이 일이 우리의 노력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워지는 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부르심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날마다 그 부르심에 응답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것만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다운 영광을 잃어버리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오늘 우리나라의 영적인 상황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이 부르심에 순종할 것을 강하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이 시대가 그 어느 시대보다도 기독교가 욕을 먹고 있는 그런 시대이니까요. 이런 시대를 살고 있다고 불평할 것이 아니라, 우리라도 나서서 우리가 사랑하는 아버지의 불명예를 씻어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삶의 자리에서 거룩하고 정직하게, 그리고 사랑하면서 사시기 위해서 애쓰시기 바랍니다. 이기심과 자기 중심적인 생각들과 싸우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이미 깨끗해진 우리 속 사람에 다시는 악한 것들이 들어와 진을 치지 못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우리의 존재와 삶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 부르심에 응답하여 스스로도 영광스러워져 가며 하나님도 영예롭게 해 드리는 아름다운 형상으로 살아가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