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4.11.09. 주일오전 - 제 삼일에 에스더가(에스더 8)



에0501to08 - 제 삼 일에 에스더가(에8).pdf


20141109SM.mp3.zip





성경본문 : 에스더 5장 1-8절




마태복음  10장 16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세상으로 파송하시면서 특별히 해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라는 말씀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 크리스챤들에게 정말 중요한 말씀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예수를 믿으면서 전에는 이리였다가 양이 된 사람들입니다. 원래는 이 사람들도 이리같이 서로 물어 뜯고 잡아 먹으면서 살았던 사람들이지만 예수를 믿으면서 양으로 거듭게 되었는데 그렇게 된 후에도 이전과 똑같은 환경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아가야 하니 자신이 원치 않아도 이리 가운데로 보냄을 받은 양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에서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갈 때, 우리는 예전의 방식으로, 그러니까 이리의 방식으로 그들과 싸우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이미 양이 되었고 양에게는 양에게 어울리는 삶의 양식이 있으니까요. 그런데 이 사실을 잘 모르는 성도들은 세상에서는  여전히 이리처럼 살아갑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과 서로 으르렁거리고 뒤엉켜 싸우면서 이리의 방식으로 이리를 이기려고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어렵게 얻은 양의 성품을 잃어버리고 다시 이리로 되돌아가 버리고 맙니다. 그렇지만 성도 여러분, 만약 그렇게 해서 이긴다고 한 들, 우리가 그렇게 하느라고 다시 이리처럼 변해 있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양의 모습을 해서는 이리와 이전투구를 벌이는 그 모습, 그 모습이 과연 아름답고 바람직한 모습이겠습니까? 오늘 교회와 성도들이 세상으로부터 욕을 먹고 수치를 당하고 있는 것은 우리들 중에서 여전히 이리처럼 사는 양이 많기 때문입니다. 양이 되어서 이리처럼 살아가고 있으니 그 모습이 이리들이 보기에도 딱해서 혀를 차고 있는 형국이 오늘날의 형국이 아닌가 합니다. 


이리에게는 이리의 삶의 방식이 있듯이 양들에게는 양들의 삶의 방식이 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양들에게는 이리와 싸워서도 이길 수 있는 주님께서는 주신 강력한 무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순결과 지혜입니다. 주님은 이리 가운데 들어가서 살며 또 일해야 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그러니까 주님은 양들의 무기는 이빨이나 발톱이 아니라 지혜와 순결함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말씀하신 무기라는 것은 이것을 가지고 싸우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승리를 거두기 위해서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무기가 하나가 아니라 둘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두 가지를 모두 사용해야 이리를 상대로 이기는 양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지켜보면 이 두 가지 모두를 적절하게 사용하는 성도들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대개는 하나를 포기합니다. 특히 믿음이 좋다고 여겨지는 분들은 지혜 쪽을 많이 포기합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확신하고는 앞 뒤 돌아보지 않고 그냥 밀고 나가는 거지요. 그런데, 순결한 믿음에는 항상 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와 어울려 살아가는 사람들은 우리의 신앙에 대해서 모르고 있고, 우리가 취하는 방법의 문제 때문에 불필요한 오해와 갈등을 만들어 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믿음의 순결함이 더럽혀 지지 않는 범위 안에서라면 충분히 지혜로워야 합니다.


에스더는 드디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위험하고 손해 보게 될 것이 뻔한 일이라 그 일에 끼어들지 않으려고 했지만, 일단 그 일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확신이 든 다음에는 그 일을 온전히 자신에게 맡겨진 일로 받아들이고 일의 전면에 나섭니다. 그 일을 위해서 우선 동족들에게 자신을 위해서 삼일 동안의 금식을 부탁하고는 자신도 금식에 들어갑니다. 이것은 에스더가 하나님 앞에서 했던 가장 지혜로운 선택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자신을 낮추고 은혜를 구하는 일만큼 지혜로운 일이 없습니다. 그렇게 몸과 마음을 낮춰서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며 기도할 때, 하나님은 일하시기 시작하시고 또 우리에게 꼭 필요한 지혜와 믿음도 새롭게 공급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급하고 중요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아니 그러면 그럴 수록 더 겸손하게 그리고 충분하게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기도를 통해서 일하시고 필요한 것들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에스더는 왕을 만나러 가는 디데이를 금식기간 끝난 다음이 아니라 금식기도를 시작한 지 사흘 째 되는 날로 잡았습니다. 그러니까 에스더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직 금식하며 기도하는 중에 왕을 만나러 갔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에스더는 백성들의 금식과 기도도 다 끝나기 전에 왕에게로 갔을까요?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향한 가장 가난한 마음이 되어 가장 간절하고 절실하게 하나님을 찾고 있을 때, 그 때 왕을 만나기 위해서 였을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전도사로 일할 때, 서울의 모 교회에서 부목사로 일하고 계셨던 지인 목사님께서 자기 교회에 있는 아주 아름다운 전통 한 가지를 말씀해 주신 적이 있습니다. 그 교회 예배당에는 설교단 뒤에는 아주 특별한 방이 하나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크지는 않은 방인데 그 방의 용도는 기도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방은 무엇을 위한 기도방이었을까요? 방의 위치로 미루어 이미 눈치 채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그 방은 예배 때 설교하는 설교자를 위한 기도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방은 설교 전에 설교자가 기도하는 방이 아니라 그 교회의 노권사님들이 설교자가 설교할 때 기도하시는 방이었습니다. 언제나 예배가 드려질 때는, 거기 노권사님들이 모여서 설교자가 전하는 말씀을 통해 은혜가 부어지고 역사가 일어나도록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듣는 동안 참 아름다운 전통이고 또 하나님께서 참 기뻐하실 일이라고 확신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하나님의 백성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가장 적절한 때에 응답해 주십니다. 그렇지만, 꼭 필요한 은혜가 있고 하나님만이 해결해 주실 수 있는 일이 있을 때, 그 때 하나님의 백성들이 마음을 낮추어 간절히 기도드리면 하나님께서는 그 순간에 그 기도를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에스더가 목숨을 걸고 왕을 만나러 가는 그 순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식을 하면서 하나님께 가장 간절하게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이야 말로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하심이 가장 필요한 순간이었으니까요. 에스더는 그 간절한 기도를 등에 엎고 왕에게 나아가려고 사흘이 다 지난 시점이 아니라 사흘이 되는 날 왕에게로 갔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꼭 이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중요한 일이 있을 때는 그냥 잘 되겠지 하고 계시거나 혼자서 끙끙거리지 마시고, 언제 몇 날 몇 시에 무슨 일이 있으니 꼭 기도해 달라고 성도들에게 부탁하시고 그 일을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그 때 그 일을 기도하는 성도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가장 적절하게 역사해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틀간의 금식기도를 마친 에스더는 금식하던 모습 그대로 왕을 만나러 가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왕후의 성장을, 격식을 모두 갖춰 차려 입고서 왕 앞으로 갔습니다. 에스더는 또 그냥 왕 앞으로 저벅 저벅 걸어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차려 입은 에스더가 왕궁 안 뜰, 그러니까 어전 맞은 편에 ‘서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에스더는 왕을 만나고 싶다는 의사표시는 확실하게 했지만 왕의 심기를 건드릴 수 있는 행동은 최대한 피하려고 애썼던 것입니다. 우리가 아주 중요한 일에, 그것도 하나님이나 다른 사람들을 위한 일에 헌신했을 때,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충분히 기도했다고 여길 때에는 그저 하나님만 생각하고 행동하게 되기 쉽습니다. 에스더를 예로 든다면요. ‘내가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했다, 그리고 금식하며 기도했다, 그리고 지금 하나님의 백성들이 금식하며 살려달라고 부르짖고 있다. 됐다. 나머지는 다 하나님이 알아서 해 주실거다. 가자! 죽으면 죽으리라!’라고 생각하고 그저 기도하던 부시시한 모습 그 대로 왕 앞으로 저벅 저벅… 이렇게 하기가  쉽습니다. 이것이 담대한 모습일 수도 있지만 사실은 상식적으로 본다면 굉장히 무모한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그것이 하나님의 일과 내가 해야 할 일을 망치는 이유가 될 수도 있구요. 그래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옳은 일이라고 하더라도, 정말 그렇게 하기가 불가능한 경우가 아니라면 최선을 다해서 그와 관련되어 있는 사람들도 충분히 배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주 신중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에스더는 아하수에로가 얼마나 즉흥적인 사람인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작은 부주의함이 일을 어렵게 만들거나 그르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특히 왕후가 왕 앞에 나가는 일 때문에 와스디가 폐위된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 자기가 법을 어기고 왕에게로 가는 일이 얼마나 예민한 일인지도 잘 헤아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에스더는 자기 때문에 일이 그르치는 것을 최대한 피하면서 동시에 그 일을 이루기 위해서 왕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을 수 있는 방식이 무엇일까 고심했고 그래서 왕이 제일 좋아할 만한 아름다운 옷을 입고, 그러면서도 가장 겸손한 모습으로 왕 앞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던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본 아하수에로는 에스더를 무척 사랑스럽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자기 손에 잡고 있었던 왕의 지팡이를 내밀었습니다. ‘사랑스럽다’는 말은 그저 예쁘다, 아름답다는 말하고는 차원이 다른 말입니다. 예쁘다, 아름답다는 말이 주로 그 대상을 바라보는 ‘감각’과 관련된 말이라면 ‘사랑스럽다’는 말은 무언가를 바라보고 생각하는 사람의 ‘마음’하고 관계된 말입니다. 그러니 이 말은 아하스에로가 에스더에게 마음을 빼앗겼다는 뜻이 됩니다. 한 달이 넘는 기간 동안 한 번도 보고싶지 않을 정도로 별 관심이 없었는데, 아하수에로는 그런 에스더가 눈앞에 나타나자 마자 이런 저런 생각할 것 없이 자신의 지팡이를 내밀 정도로 에스더에게 마음을 빼앗겨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저도 남자이기 때문에 잘 압니다. 남편이 아내와 살다가 평상시에는 자기 아내를 무심하게 바라보며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이유도 없이 그 아내가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어질 정도의 마음을 가지게 되는 일은 그렇게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자연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제가 목회를 하겠다고 마음을 먹게 되었을 때, 저에게는 걱정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제가 목사가 되겠다고 하면 저의 형도 아버지도 제가 목사가 되는 것을 반대할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는 저희 집안이 제가 취직을 해서 가정에 도움을 주어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 마음이 확실해진 다음부터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그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하나님께서 두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제가 엎드려서 책을 보고 있는데 형이 불쑥 방문을 열더니 제 뒤통수에다 대고 툭 던지듯이 말했습니다. “야, 너 목사 한다며?” 제가 갑작스런 질문이 너무 당황스러워서 “응? 으응.”이라고 대답했더니, 형은 정말 놀랍게도 이 한 마디를 더한 후에 문을 닫고 나가 버렸습니다. “그래? 뭐. 자기가 하고 싶은 일 하고 사는 게 제일 행복한 일이지.” 그 동안 걱정했던 것이 오히려 무색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저 어머니로 부터 그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아무 말도 없으셨습니다. 지금 기억으로는 그저 “잘 해라.”라는 한 마디만 하셨던 것 같습니다. 당연히 반대해야 할 두 사람이 너무 쉽게 넘어가니 괜히 싱겁기는 했지만 그 때 저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데 있어서 기도가 얼마나 능력이 있는지를 분명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도 하나님께서는 제가 어떤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달라는 기도를 드릴 때마다 그 기도만큼은 이례적으로 잘 응답해 주시곤 하셨습니다. 


그 삼일을 금식하며 기도하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과 에스더는 무엇을 위해서 기도했을까요?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려달라고 기도했겠지만, 삼일 후에 에스더가 아하수에로를 만나러 갈 때, 아하수에로의 마음이 에스더를 향해 열려지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을까요?  그 날 아하수에로가 에스더를 그렇게 사랑스럽게 여겼던 것은 그 기도의 응답이 아니었을까요? 저는 그렇다고 믿습니다. 혹시 여러분이 맡게 된 아주 중요한 일이 있을 때, 그 일을 이루는데 있어서 어떤 사람의 ‘마음’이 굉장히 중요하다면, 그 일 뿐만이 아니라 꼭 그 사람의 마음을 위해서도 기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또 개인적인 관계에서도 어떤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야만 하는 일이 일어나면 꼭 그 사람의 마음만을 붙들고 기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단순히 우리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면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무시하지 않으시고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에스더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에스더에게 지팡이를 내밀기는 했지만, 아하수에로는 에스더가 자기에게로 나아온 것이 에스더의 입장에서는 목숨을 걸만큼 위험한 일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에스더가 자신에게 그렇게 나아온 것이 자신에게 부탁할 아주 중요한 일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 차렸습니다. 그래서 에스더를 어전으로 이끌어 들인 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왕후 에스더여, 그대의 소원이 무엇이냐 나라의 절반이라도 그대에게 주겠노라” 아하수에로는 에스더를 안심시키면서 에스더의 손에 백지수표를 쥐어 준 것입니다. 그렇지만 에스더는 곧바로 자초지종을 말하고 다 죽게된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려 달라고 애원하지 않았습니다. 그 일이 정말 중요하고 급한 일이었고, 그 일의 해결을 위한 절호의 기회를 얻은 것이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대신 아주 차분하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 내가 왕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사오니 왕이 좋게 여기시거든 하만과 함께 오소서.” 


에스더는 비둘기 같이 순결한 여인이었지만 동시에 뱀처럼 지혜로운 여인이었습니다. 그 지혜는 우선 그의 말 속에 너무나 잘 나타나 있습니다. 에스더가 아하수에로에게 했던 말을 가만히 살펴 보면 “오늘 내가 왕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겠사오니…”가 아니라 “오늘 내가 왕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사오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원래 왕을 위해서 잔치를 벌이려면 이것과는 반대 순서로 해야 합니다. 먼저 왕의 의사를 물어보고 그 다음에 왕이 그 초청을 받아들이면 그 다음에 잔치를 준비합니다. 그 잔치가 왕을 위한 특별한 잔치이니까요. 그런데, 에스더는 그 일을 거꾸로 진행합니다. 미리 잔치 준비를 마쳐 놓고 왕을 찾아가서 당신을 위해서 잔치를 마련해 놓았으니 참석해 달라고 했습니다. 조금은 이상해 보이는 순서이지만 사실 이 순서 자체가 에스더가 왕을 얼마나 잘 알고 있고 또 신뢰하고 있는지를 표현하는 최고의 방식이었습니다. 에스더는 이 짧은 말을 통해서 이렇게 말한 것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저는 왕께서 저를 부르지도 않았는데 제가 왕을 만나러 왔다고 해서 저를 내치거나 벌하지 않으실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또 저의 초대도 거절하지 않으실 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미리 잔치 준비를 마쳐 놓고 왕을 모시러 온 것입니다. 부디 오셔서 자리를 함께 해 주시옵소서. 참! 원하시면 왕이 가장 신뢰하시는 하만도 동행하시면 더 좋겠습니다.” 어느 남자가 이렇게 사랑스러운 여인이 자신을 그렇게 관대하고 아량이 넓은 남자로 인정해 주는데 그 여인의 청을 마다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도 잔치에 오라는 데 말입니다. 여성 여러분, 간혹 그렇지 않은 남자들도 있기는 하지만 남자는 대개 모두가 다 이렇게 단순하답니다. 남자는 다그치고 조른다고 말을 듣는 족속들이 아닙니다. 칭찬하고 인정해 주고 믿어주면 속 없이 좋아하고, 있는 거 없는 거 다 내어주는 게 남자입니다. 나중에 꼭 이루어야 할 일이 생기거든 조르고 다그치고 비난하지 마시고 에스더식의 방법을 한 번 사용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마 바가지를 긁는 것보다는 훨씬 더 효과적일 것입니다. 


단순왕이었던 아하수에로는 너무 너무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에스더가 요구하는 대로 따르기 위해서 막 서둘렀습니다. 이미 잔치가 준비되어 있다고 하니 더 서두를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아하수에로는 하만에게 사람을 보내서 빨리 오라고 통보했습니다. 하만도 왕후가 왕과 자기만 특별히 파티에 초대했으니 우쭐해서 서둘러 입궐했습니다. 이제 잔치가 시작되고 좋은 음식으로 배가 부르고 술 기운이 거나하게 오른 아하수에로는 다시 한 번 에스더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말만 하면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고 호언장담합니다. 여기 남자를 손에 넣는 두 번째 방법이 나옵니다. 서양 속담에 ‘남자의 마음을 살 수 있는 방법은 그 남자의 위장으로부터 나온다’는 말이 있구요. 우리 속담에도 ‘박색은 데리고 살아도 음식 못하는 여인은 함께 살기 힘들다’는 말이 있는데 다 모두가 다 같은 맥락에서 나온 말입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이 한 분 계시는데, 그 아내되시는 사모님이 요리를 꽤 잘 하십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은 그 사모님 이야기를 할 때, 음식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얼마나 흐뭇해 하시는지 모릅니다. 아닌 척해도 표정에 그게 다 드러납니다. 남자를 손에 넣으려면 일단은 그 남자에게 그가 좋아하는 맛있는 음식을 배부르게 먹여야 합니다. 배고픈 남자는 거의 짐승이 되지만 배부른 남자는 한 없이 너그러운 군자가 되니까요. 좋은 음식으로 배를 충분히 채웠고 달콤한 분위기에 취한 아하스에로가 다시 한 번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고 했지만 에스더는 이번에도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이상하죠? 이제는 하만까지 한 자리에 있으니 그 이야기를 꺼낼 법도 한데 다시 한 번 더 뜸을 드립니다. 에스더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만일 왕의 목전에 은혜를 입었고 왕이 내 소청을 허락하시며 내 요구를 시행하시기를 좋게 여기시면 …” 에스더는 자기 소원을 말하기 전에 똑같은 이야기를 세 번이나 반복합니다. 그만큼 자신이 원하는 것이 간절한 것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면서도 그 모든 일의 성취는 전적으로 자신을 향한 왕의 호의에 달려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하고 나서도 에스더는 진짜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그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왕과 하만을 위하여 베푸는 잔치에 또 오소서 내일은 왕의 말씀대로 하리이다”  


에스더의 이런 행동 속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우선 에스더는 그렇게 함으로써 오히려 자신의 부탁이 너무나 중요하다는 것과 그래서 왕이 자신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두번째 그것은 사실 그 당시 왕에 대한 예의였습니다. 왕이 무언가를 제의할 때, 그것을 덥썩 받아들이는 것은 그 당시의 문화에서는 대단한 결례였습니다. 정말 중요한 이야기를 할 때에는 함부로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상례였구요. 그래서 에스더의 이러한 행동은 좋은 기회를 놓칠 수도 있는 지나치게 조심스러운 행동이 아니라 자신의 청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드러내는 동시에 자신이 왕을 얼마나 존중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표현하는 아주 중요한 수단이었던 것입니다. 이제 두 가지를 합쳐 보겠습니다. 우선 에스더는 왕이 들어주지 않으면 절대로 안될만큼 중요한 청이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표현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스더는 그 청을 앞세우지 않고 왕을 왕으로 존중하는 예의를 더 앞세웠습니다.  


우리에게 급하고 중요한 일이 있을 때, 그 일을 이루어가는 동시에 그 일과 관계된 사람들을 최선을 다해서 존중하고 그 사람들에게 예의를 다한다는 것은 정말 정말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렇지만 에스더는 그렇게 했습니다. 비록 그것이 자기 자신과 동족들의 운명을 좌우할만큼 결정적인 일이었고, 또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기신 너무나 중요한 소명이었지만, 에스더는 가장 사려 깊게 지혜를 사용했고, 또 그 과정 중에서 최선을 다해서 사람을 존중했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만 생각하느라고 사람을 등안시하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성경을 요약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또 그와 같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인 즉,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 이 두 가지는 취사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니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 안에서 사람을 사랑해야 하며, 사람을 사랑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그런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 이 세상에서 사는 성도들에게 ‘순결’과 ‘지혜’는 함께 추구해야하 할 최고의 덕목이자, 이리들 속에서도 양됨을 지켜가고 또 그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가장 중요한 통로가 되어 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두 가지가 절대로 함께 할 수 없는 경우가 아니라면 최선을 다해 두 가지 모두를 지키고 또 최선을 다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에스더는 가장 세속적이고 원칙이 없는 나라였던 바사에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기신 중요한 소명을 이루기 위해서 순결함 속에서 지혜를 사용했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 바사를 닮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제시해 주는 작은 불빛 같은 역할을 해 주는 여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기 때문에 순결해야 하고 또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지혜로워야 합니다. 그것이 이 세상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상에 물들지 않으면서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일들을 이루어 내며 또 사람들을 섬기는 방법입니다. 


항상 하나님 앞에 순결하면서도 사람들 앞에서 지혜롭기 위해서 애 쓰셔서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동시에 사람들도 제대로 사랑하는 참 아름다운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