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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4.11.23. 주일오전 - 그러나 만족하지 아니하도다(에스더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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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에스더 5장 9-14절




우리가 책이나 영화를 통해 접하게 되는 거의 모든 이야기 속에는 의인과 악인이 등장합니다. 우리가 이야기를 보거나 듣다 보면, 커다란 반전을 가지고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면, 대번에 이 사람은 의인이고 저 사람은 악인이라는 판단이 서게 마련인데요, 그렇다면 우리들은 무엇을 근거로 해서 어떤 사람이 의인인지 악인인지를 판단하는 것일까요? 너무나 당연한 대답이지만 우리에게 그런 판단을 하게 하는 것은 바로 그 사람의 행동입니다. 악한 행동을 하면 악인이고 의로운 행동을 하면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의인과 악인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성경은 의인과 악인이라는 직접적인 표현을 자주 사용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성경책이 바로 시편인데요. 거기서 우리는 의인이 어떻고 악인은 어떤가 하는 설명을 아주 많이 듣게 됩니다. 그런데, 성경이 어떤 사람이 의인이냐 악인이냐를 평가하는 기준은 일반적인 기준과 많이 다릅니다. 물론 결국 의인은 의로운 행동을 합니다. 그리고 악인은 악한 행동을 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성경에는 때로는 별로 의롭지 않아 보이는 행동을 하는 의인도 있고, 반대로 그 행동 자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고, 사람들이 보기에는 의로운 행동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악인으로 평가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참 이상한 일이지만 이것은 성경이 가지고 있는 악인과 의인을  판가름하는 기준이 일반적인 기준과 정말 많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어떤 사람을 의인인가 악인인가 판가름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바로 그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또 믿지 않으면 그 사람은 겉으로 보기에 아무리 선한 삶을 살아도 성경은 그 사람을 의인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부족하고 또 죄를 짓기도 해도 그 사람이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성경은 그 사람을 의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는 성경이 말하는 악인은 악한 행동을 하는 악한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반대로 성경이 말하는 의인은 그 행동에 있어서도 의로운 행동을 하는 의로운 사람이 되어 갑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할 때만 이 세상에 참된 선이 있다고 믿게 되어 있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선이 바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것이고 그래서 계속 악을 행하면서 선하신 하나님을 섬길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만이 에스더가 벌인 첫 번째 잔치에 참석하고 나서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그리고 하만이 집으로 돌아가자 마자 그의 집에서 있었던 일화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이전 이야기에서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중요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하만이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대한 조금은 세세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기도 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하만은 에스더서에 등장하는 최고의 악인이고 악당입니다. 그래서 하만의 세세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는 이야기는 곧 우리에게 악인의 내면이 어떤지를 보여주는 역할을 합니다. 


오늘 설교를 들으시다가 혹시라도 자신에게서 하만을 닮은 모습을 보고서 “어, 그러면 나는 악인인가?”라고 하시면서 기분나빠 하실 분이 있을지도 몰라 노파심에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성경이 말하는 악인은 하나님의 관계가 깨어진 사람을 말합니다. 하만은 그런 사람들 중의 전형적인 인물이구요. 그래서 우리는 오늘 본문말씀을 통해서 악인이 어떤 사람인가를 보려고 하기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고 또 느슨해져 갈 때 우리 삶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날 수 있는지를 살피고, 하만의 모습을 타산지석으로 삼는 것이 더 유익할 것입니다. 


첫날 잔치에 참여한 후에, 궁궐을 빠져 나오는 하만은 정말 구름 위를 걷는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왕과 자신만이 참석했던 그 잔치를 통해서 드디어 왕 뿐만 아니라 왕후까지도 자신을 귀하게 여기며 신임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하만의 들뜬 기분에 찬물을 끼얹은 사람이 바로 모르드개였습니다. 그 날도 모르드개는 성문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왕궁을 빠져 나온 하만은 그 성문을 통과해서 집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하만이 나타났으니 성안은 난리가 났습니다. 모두들 하던 일을 멈추고 길거리에 고개를 조아리고 엎드렸습니다. 하만은 그런 모습에 더욱 더 신이 났겠지요. 그런데, 그 날도 어김 없이 모르드개는 자리에 앉은 채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저 그 자리에서 자기가 하던 일만 했습니다. 


하만은 다른 날도 모르드개가 굉장히 기분이 나빴지만 그 날은 더더욱 기분이 나빴습니다. 그 날은 그 영광스러운 잔치에서, 왕후의 인정과 신임까지 받고 나오는 길이었기 때문에 기분 나쁜 것을 넘어서서 극도로 화가 났습니다. 그렇지만 하만은 그 분노를 참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우러러 보고 있는데, 그 사람들이 보는 데서 자기에게 절하지 않는 한 사람 때문에 화를 내고, 또 벌을 준다면, 자신의 좁은 속이 다 들통 나 버리고 사람들이 자신을 비웃을 것이 분명하니까요. 그래서 하만은 정말 울며 겨자 먹기로 치밀어 오르는 화를 꾹꾹 눌러가면서 집으로 돌아 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집에 도착한 하만은 아내인 세레스와 친구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그리고는 일장연설을 늘어놓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뭐 대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왕후의 잔치에 참여했더니 왕께서 나에게 이렇게 중요한 것을 의논해 오셨다든지, 이런 비밀을 말씀해 주셨다든지 그런 묵직한 내용들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은 하만이 그 사람들을 불러 모아서 늘어놓은 이야기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의 큰 영광과 자녀가 많은 것과 왕이 자기를 들어 왕의 모든 지방관이나 신하들보다 높인 것을 다 말하고…” 이런 말을 듣는 세레스와 하만의 친구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요즘 사회생활에 성공하려면 리엑션을 잘 하는 것이 중요하다던데, 아마도 이들은 하만의 이런 이야기에 정말 대단하다고 정말 훌륭하다고 맞장구를 쳤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하만이 했던 이야기들을 가만히 뜯어 보면, 그것은 제가 제 아내와 친구들을 모아 놓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말야. 광현교회에 하나 밖에 없는 담임목사다.  우리 집안에서도 내가 우두머리다. 그리고 놀랍게도 나에게는 삘기같은 아들이 둘 씩이나 있지. 또 우리 엄마는 내가 최곤 줄 안다. 나 정말 대단하지 않냐?” 여러분, 이런 것들이 자랑거리입니까? 이런 이야기들이 자기 아내나 친구들을 모아 놓고 새삼 스럽게 다시 들려주어야 할만큼 가치있고 놀랍고 훌륭한 일입니까? 아마 제가 진짜로 이렇게 한다면 모두들 제가 정신이 어떻게 된 줄 알고 저를 불쌍히 여길 것입니다. 아니면 얘가 바쁜데 사람들 모아 놓고 헛소리 한다고 머리통이나 얻어 맞겠지요. 


하만이 한 이야기는 거기 모인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이야기 였습니다. 세상에 자기 아들이 몇 명인지 모르는 엄마가 어디있겠고, 친한 친구, 그것도 상전으로 모시는 친구의 자녀 숫자를 모르는 친구들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또 거기 하만이 그 나라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하만은 급하게 아내며 친구들을 불러 모아 놓고는 그런 유치하기 그지 없는 이야기를 자랑스럽게 늘어놓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만은 왜 이렇게 유치한 행동을 할 수 밖에 없었을까요? 그 이유는 모르드개가 자신을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하만은 그것이 불만스러웠기 때문에 그 불만을 해결하려고 언제나 자신의 말에 훌륭하게 리엑션을 보이고 또 자신을 인정해 주는 아내와 친구들을 불러 모았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들은 이 날 모르드개를 대신하여 그 자리에 불려왔고, 하만 앞에서 모르드개가 하만에게 보여주어야 할 모습을 대신해서 보여주는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사람이 성숙하지 못할 수록 인정받고자 하는 요구가 그만큼 크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바라는 만큼 인정받지 못하면 그것에 대해서 더욱 더 못 견디어 하게 마련입니다. 저는 지금도 그리 성숙하지는 못하지만 30대 초반까지는 제가 생각해도 정말로 미성숙했던 것 같습니다. 물론 모든 면에서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인격과 성품의 여러 부분 부분이 굉장히 덜 자라 있었습니다. 저는 그 때까지만 해도 남이 무슨 부탁을 하면 거의 거절을 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착해서 였을까요? 전혀 아닙니다. 남을 도와주기를 좋아해서 였을까요? 아닙니다. 그랬던 이유는 딱 한 가지입니다. 제가 그것을 거절하면 그 사람이 나를 싫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항상 사람들이 제 앞에서 웃고 즐거워 해야만 안심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저에게는 제가 거절 받지 않는다는 증거로 여겨졌으니까요. 그리고, 그러면서도 저는 저 자신의 결점에 대해서 늘어놓기를 좋아했습니다. 나중에 그 사람이 저의 결점을 발견하게 되면 그 때 나를 떠날까 그것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나를 싫어한다는 느낌이 들면, 그리고 나 때문에 기분 나빠하면 그것 때문에 정말 몇 날 며칠을 신경 쓰며 살았습니다. 인생 참 힘들게 살았죠? 그런데, 제가 남들의 인정에 대해서 이런 반응을 보였던 것은 제가 강자가 아니라 약자였기 때문입니다. 약자였기때문에 소극적으로 자신을 탓하며 남에게 맞춰주면서 살았던 것이지 아마 제가 강자였다면, 스스로를 강자라고 여겼다면 저는 분명히 저를 인정해 주지 않는 사람들 앞에서 정반대로 행동했을 것입니다.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사람들을 모아 놓고 하만처럼 자기 자랑을 늘어놓거나 아니면 화를 냈을 것입니다. 


하만은 듣는 사람들도 이미 다 아는 자랑거리도 아닌 자기 자랑거리를 잔뜩 늘어놓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왕과 왕후에게 커다란 인정을 받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정상적으로라면 그래서 난 참 기쁘고 행복하다.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말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하만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유다사람 모르드개가 대궐 문에 앉은 것을 보는 동안에는 이 모든 일이 만족하지 아니하도다” 참 아이러니 합니다. 하만은 정말 모든 것을 얻지 않았습니까? 모든 것을 가지지 않았습니까? 권력이면 권력, 재산이면 재산, 그리고 사람들의 존경이면 존경… 정말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하만은 전혀 만족할 수가 없었습니다. 행복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온 세상에 딱 한 사람, 그것도 자기와 비교할 수도 없이 낮은 위치에 있는 모르드개가 자기에게 절하지 않는 것, 그것 하나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기분이 좋지 않을 수는 있습니다. 괴씸할 수도 있구요. 그렇지만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을 다 가졌으면서도 전혀 만족할 수 없다는 것은 도가 지나쳐도 한참 지나친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세레스와 친구들은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그들은 더 이상 참지 말라고 했습니다. 체면이고 뭐고 다 접어 놓고 그 문제부터 해결하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말했습니다. “높이 오십규빗 되는 나무를 세우고 내일 왕에게 모르드개를 그 나무에 매달기를 구하고 왕과 함께 즐거이 잔치에 가소서” 그제서야 굳었던 하만의 얼굴이 풀어졌습니다. 그리고는 20미터가 넘는 나무를 세우도록 명령했습니다. 그 나무는 다음 날 왕의 허락만 받으면 모르드개를 꼬치처럼 꿰어서 높이 달아놓을 나무였습니다. 그 나무를 바라보는 하만은 흐뭇했을 것입니다. 이미 그의 눈에는 그 꼭데기에 달려서 그제서야 자기를 향해 고개를 숙여 절을 하는 모르드개의 모습이 보였을 테니까요. 이것이 무엇엔가 집착해 있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집착이 강한 사람들은 자신을 집착하게 하는 것을 자기 손에 넣거나 반대로 그것을 가진 사람을 세상에서 사라지게 하기 전에는 만족이라는 것을 모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정작 반대편에 있는 모르드개는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모르드개가 딸처럼 키웠던 에스더가 대제국 바사의 왕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모르드개는 자신이 에스더와 어떤 관계에 있다는 것을 밝히지도 않고 또 그 일을 통해 한 자리 차지하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우리나라 조선시대의 역사를 보면 왕비와 관계된 문제들 안에는 꼭 그 아버지나 혹은 오빠가 개입되어 있었던 것을 보면 모르드개가 취했던 행동이 얼마나  도드라지는 행동인지 알 수 있습니다. 또 2장 19절 이하를 보면 모르드개는 빅단과 데레스라는 두 내시가 왕을 죽이려고 공모하는 것을 에스더에게 알려줘서 왕의 목숨을 구하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정말 엄청난 공로입니다. 왕을 살렸을 뿐만 아니라 바사라는 나라를 구한 것이기도 했으니까요. 그런데, 아하수에로는 그 일을 왕실일기에 기록하고는 그것으로 끝입니다. 상을 주거나 진급을 시켜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일 때문에 모르드개가 어떻게 반응했다는 이야기 자체가 성경에 없습니다. 그는 자신이 왕후의 아빠같은 사촌오빠라는 것을 알리려고 하지 않았고, 자신의 공로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속상해 하거나 그것을 보상받으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성경은 그저 묵묵히 그 이전처럼 자신이 맡은 그 일을 하고 있는 모르드개의 모습만 보여줄 뿐입니다. 사실 더 속 상해 하고 자신을 알리고 인정받기 위해서 무언가를 해야 할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모르드개일 것입니다. 모르드개는 지금 자신의 신분과 공로에도 불구하고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었고 그 누구의 인정도 받지 못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런데도 모르드개는 정말 하만과는 정반대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것은 정말 역설적인 모습일 수 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안에 주체할 수 없는 불안과 분노가 있을 때, 대체 그것이 어디서 생겨나는 것인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더 많이 모으고 더 많이 쌓아 놓으면 불안이 없어지고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 보이고 사람들의 인정을 많이 받으면 그 모든 분노들이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막상 자신이 그 정도면 불안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만큼 쌓아 놓고 이 정도면 충분할 것이라고 생각한 정도로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나면 그게 답이 아니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물론 우리에게는 우리가 사용할 물질도 필요하고 또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일도 필요합니다. 우리는 물질적인 것들이 꼭 필요한 몸을 가지고서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결코 그런 것들이 충분하다고 해서 우리가 우리 삶을 흔드는 분노와 불안함을 떨쳐 버릴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가진 것이 많아도 무언가 불안하고 사람들의 인정을 많이 받아도 여전히 허전한 구석이 있습니다. 단잠을 이루기가 이전보다 더 힘들고 또 조금만 무시 당해도 견디기가 더 힘들어 집니다. 그래서 더욱 더 그런 것들에 집착하게 되지만 거기서 얻게 되는 것은 더 깊은 불안과 분노 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성경에서 발견하는 하만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하만이 이런 모습으로 살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그가 사람, 그러니까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바라보며, 거기서 만족을 찾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신을 보고 또 다른 사람들을 보며 살아갈 때, 그 사람은 반드시 가장 손쉽게 자신을 만족시키고 또 사람들의 인정을 받게 해 준다고 믿는 것들을 얻기 위해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재산과 명성을 얻기 위해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제가 동영상 하나를 본 적이 있습니다. 탁자 한 쪽에는 엄마가 있고 다른 쪽 탁자 위에는 그 엄마의 아기가 있습니다. 아직 기어다니는 아기입니다. 그런데 그 탁자 양쪽 50센티미터 쯤은 나무로 되어 있고, 가운데 부분은 유리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아기는 그 중간이 비어 있는 줄 압니다. 먼저 엄마가 얼굴표정을 굳게 하고 아이에게 별로 눈길을 주지 않습니다. 아기는 엄마에게 가고 싶어서 몇 번이나 애를 쓰지만 그 유리가 있는 중간으로 넘어오지 못합니다. 그 다음에는 엄마가 미소를 짓습니다. 환하게 아이를 향해 웃습니다. 이리 오라고 손짓합니다. 아기가 어떻게 했을까요? 그냥 유리 안으로 뛰어 듭니다. 그리고는 엄마를 향해서 마구 기어 가 엄마 품에 안깁니다. 


인간에게는 영혼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영혼에도 만족시켜 주어야 할 욕구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영혼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일이 우리 몸과 본능의 필요를 만족시키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영혼의 욕구가 채워져야 인간은 비로소 만족과 평안을 얻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영혼이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께 받아들여 졌고 환영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확신을 갖는 것입니다. 인간은 저 멀리서 나를 향해서 미소지어 주시는 하나님이 보일 때, 그 때 진짜 평안과 만족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힘으로 불안과 분노를 넘어서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모르드개는 가진 것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당연하게 받아야 한다고 생각되는 그 어떤 것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모르드개는 그런 것들에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낙심하거나 불안해 하지 않았고, 분노하지도 않았습니다. 모르드개가 어떻게 이런 사람이 될 수 있었는지 이제 그 이유를 아시겠지요? 그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며 사는 사람이었고,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확실하게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비록 자신과 동족들이 다른 나라에 포로로 잡혀와 살고 있지만, 자신들이 하나님이 돌보시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또 그는 지금 비록 이방나라의 관리로 살고 있지만, 그 자리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자리이며, 자신은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그에게 참 평안과 만족을 주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지금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만큼 그 사람을 견고하게 하고 풍성하게 만드는 것은 없습니다. 그것을 확신할 수 있을 때는 누가 뭐래도 흔들리지 않고 가진 것이 없어도 든든합니다. 얼마나 자신이 있고 여유가 있는지 모릅니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이미 그의 영혼이 가장 큰 만족을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확신이 없을 때에는 같은 사람이라도 전혀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뭔가 불안합니다. 또 뿌듯함도 없구요. 굉장히 조급해 집니다. 또 사람이 알아주지 않는 것이 그렇게 속이 상할 수가 없습니다. 화도 잘 내게 됩니다. 


악인이 결국에는 악인으로 살게 되고 의인이 결국에 의인으로 살게 되는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한 사람은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살고, 다른 한 사람은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살기 때문입니다.  하만은 하만처럼 살 수 밖에 없었고 모르드개는 모르드개답게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만족을 줄 수 없는 곳에서 만족을 찾았고, 다른 한 사람은 만족을 줄 수 있는 곳에서 만족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영혼은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그 분 안에서 평안과 안식을 얻으며 살아가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자신이 하나님께 받아들여 졌다는 것을 확신할 때 비로소 만족할 수 있는 그런 존재로 지음받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도들은 이미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복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어떠함과 상관이 없이 은혜로 하나님의 용납하심을 받았고,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런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성도로서 성도다운 평안과 넉넉함이 있는 삶, 영광스럽고 견고한 삶을 사는 비결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나는 이미 하나님께 무조건 용납되었으며, 지금도 그 분의 강하신 팔에 단단히 붙들려 있다는 것을 진실로 믿고서 사는 것입니다. 그 사실은 절대로 변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온 우주의 왕이신 분, 마지막 재판장이 되시는 분, 우리의 영원한 아버지 그 분이 우리를 인정해 주셨고 또 받아들여 주셨다면, 그리고 그것이 변할 수 없는 사실이라면, 이것을 믿는 확신 가운데 사는 일보다 우리를 더 든든하고 부요하게 하는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런 하나님께서 나를 받아주시고 인정해 주셨는데, 사람이 조금 인정해 주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흔들려야 할 이유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 분이 그 굳센 팔로 나를 영원히 붙들어 주고 계시는데, 우리의 있고 없음에 우리의 평안을 매달아 놓고 살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절대로 사람을 바라보며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게 나 자신이든 다른 사람이든 거기서 만족을 찾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진짜 평안이 없습니다. 또 갖추어지지 않고 얻지 못한 것 하나에 집착하게 되기 쉽습니다. 자신이 그것 때문에 불행하고 불만족스럽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이미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영원히 받으시고 용납하셨다는 사실에 여러분의 생각과 마음을 묶어 놓고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부족한 나이지만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는 것을 믿고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흔들리지 않고, 그래야 진짜로 능력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래야 근심과 걱정을 이기고 세상을 이기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항상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 분에게서 참 만족을 찾고, 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소명을 따라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서 하나님께서 자녀들에게 주시는 확신 가운데 흔들림 없는 삶을 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이제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게 하소서.
  2.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 속에서 영혼의 평안과 만족을 누리게 하소서. 
  3. 하나님께서 나를 의인으로 부르셨으니 하나님 앞에서 의인으로 살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