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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4.12.05. 금요기도회 -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사도행전 87)






본문 : 사도행전 14장 19–23절




많은 사람들이 별로 힘든 일도 없고 고민할 일도 없이 사는 시대… 이런 시대를 일컬어 ‘평화의 시대’라고 부릅니다. 이런 시대는 분명히 굉장한 은혜로운 시대이지만 반대로 이런 시기만큼 영적으로 위험한 시기도 없습니다. 이런 시기에 사람들은 그 평화와 안락함에 길들여 져서 그렇지 않은 반대쪽에 대해서는 알고 싶어하지도 않고 듣고 싶어하지도 않는 쪽으로 변하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이런 시기를 사는 성도들도 이런 위험에 노출되어 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시기에는 성도들까지도 그런 편안함에 길들여져서 자신의 평안과 안락함을 깨뜨리는 것은 그 어떤 것도 관심을 가지려 하기를 꺼려하고 또 그런 것들을 싫어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전히 자기를 중심으로 살아 갈 수밖에 없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야 그럴 수 있다고 쳐도 성도가 이렇게 되는 것은 정말 큰 일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은 참된 신앙의 본질에 대해서 무관심해 지는 것이고 그래서 참 신앙에서 그만큼 멀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980년대 이후 우리 사회는 그야 말로 경제적인 부흥을 경험했습니다. 먹고 사는 것 자체가 가장 커다란 이슈였던 그 이전 시대에 비하면 그야 말로 평화와 풍요의 시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편안함과 풍요에 길들여 지기 시작했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현실에 대해서 낙관적이기만한 생각을 품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교회에도 이런 사고방식이 그대로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신앙을 경제적인 풍요나 개인의 성공과 직접 연결시켜서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그러면서도 하나님께서 주신 풍요와 편안함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복은 그냥 내 마음대로 나만을 위해서 누리면 된다는 생각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성도들과 교회들은 편안함과 부요함에 익숙해져 갔습니다. 그리고 강단에서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렇게 잘 되어갈 것이라는 메세지들이 주류를 이루었습니다. 그렇게 30년이 흘렀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세월 동안 많은 설교가 기독교라는 옷을 덧입은 처세술과 비슷하게 변해 버렸고, 많은 성도들은 설교를 들으면서 진리 보다는 위로와 격려, 그리고 자신을 편들어 주는 이야기들만을 듣고 싶어 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많은 성도들이 그렇지 않은 메세지는 불편해 하고 심지어는 불쾌해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을 당연한 권리쯤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는 여러분의 삶의 자리에서 또 일터에서 이런 저런 일들 때문에 지치고 힘든 마음을 가지고 위로와 격려를 받으려고 오신 분들도 있으실텐데요. 오늘 설교에서는 그런 메세지를 전혀 전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성경말씀 자체가 전혀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혹 여러분의 마음이 불편해 지거나 혹은 마음의 평안이 깨지더라도 경청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선 제가 여러분에게 몇가지만 묻겠습니다. 굉장히 중요한 질문이니 진지하게 대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약 우리가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대로 그런 식으로만 생각하고 그런 것만 원하면서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래도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이 될 수 있을까요? 그래도 우리의 믿음은 능력있는 믿음이 될 수 있을까요? 더 심각하게 말씀드려서 그래도 그런 믿음은 우리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하는 믿음이 될 수 있을까요? 


오늘 한국 기독교의 현실을 제대로 볼 줄 아는 목회자치고 자신이 목회자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은 성도들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성도들도 예전만큼 자신이 예수를 믿고 있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고 당당하게 이야기하기 힘들어 합니다. 모두가 다 될 수 있으면 그 사실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합니다. 예전과는 달리 예수 믿는다고 하면 대뜸 무시하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정직하게 말씀드려서 오늘날 이 땅의 교회들은 사회의 천덕꾸러기 쯤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지금의 한국 교회는 이런 취급을 당하게 되었을까요? 우리는 왜 이런 수모를 겪으면서 예수를 믿어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을까요? 그것은 지금까지 우리가 우리에게 불편한 기독교 신앙의 본질적인 부분을 애써 무시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러한 우리 신앙의 맨얼굴이 드러나니 사람들이 더 이상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귀히 여겨주지 않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보여주는 신앙의 모습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니까요. 이것은 우리에게 굉장히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앙 때문에 겪는 고난은 아닙니다. 이것은 한국교회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함께 자초한 인과응보에 가깝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뿌린 씨앗의 열매를 이제 거둬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을 믿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복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특별하게 생각하시고 특별한 은혜를 주시며 때로는 눈에 보이는 커다란 복들을 부어주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게 신앙의 전부가 아닙니다. 그것은 진짜 신앙과 그 신앙으로 사는 삶의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진짜 신앙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에 십자가가 꼭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정말로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고 하나님께도 영광이 되는 그런 신앙이 되려면 우리 신앙의 중심에는 십자가가 든든하게 서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고린도 전서를 공부할 때 십자가에 대해서 배웠던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십자가를 생각할 때, 꼭 기억해야 할 진리이기도 한데요. 그것은 바로 십자가가 하나님의 모든 지혜의 결정판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 하나님의 모든 지혜를 집중하셨습니다. 그러니, 그 머리 좋은 사탄도 전혀 십자가의 능력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오히려 십자가 때문에 완전히 망할 길을 자초했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단순히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지혜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실제의 삶을 위한 최고의 지혜입니다. 물론 십자가의 원리를 따라 사는 것은 결코 편안하게 살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사는 그런 ‘행복한’ 삶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 행복을 누리려면 절대로 십자가를 따라 살아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자신의 삶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유익한 삶이 되기를 정말로 원한다면, 그리고 진짜로 가치있고 의미있는 삶이 되기를 소망한다면, 그리고 하나님께도 칭찬받는 귀한 삶을 살기 원한다면 십자가의 지혜를 따라 살기 위해 애써야 합니다. 또 세상을 이기면서 능력있게 살기를 원해도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를 삶으로 사셨고 또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을 유익하게 하고,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영광스럽고 가치있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예수를 믿던 믿지 않던 예수님의 삶을 가지고 트집잡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고, 예수님을 가장 고귀하고 가치있는 삶을 사신 분으로 존경하는 것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가장 높고 존귀한 영광을 얻으신 것도 예수님께서 자신의 삶을 닮은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최고의 지혜를 따라서 살고 또 죽으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사람도 하나님도 가장 귀하게 여기는 그런 분이 되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의 삶이 고귀하고 가치있는 삶이었고, 또 십자가가 하나님의 최고의 지혜라는 것을 정말로 믿는다면 우리들 또한 예수님처럼 사는 것을 우리의 소망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자신들에게 제사를 드리려는 루스드라 사람들을 겨우 겨우 뜯어 말렸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정반대의 더 엄청난 일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미 지나온 안디옥과 이고니온의 유대인들이 루스드라까지 몰려 와서 루스드라 사람들을 선동해서는 바울과 바나바를 돌로 치게 한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이 던진 돌에 맞아 거의 죽음 일보직전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완전히 죽은 것으로 보이기도 했구요. 그래서 사람들은 바울이 죽은 것으로 생각하고는 루스드라 성 밖으로 끌어내서 그저 아무렇게나 팽개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그 자리에서 그저 툴툴 털고 일어났습니다. 지켜보던 제자들이 얼마나 놀랐을까요? 또 얼마나 기뻤을까요? 그런데, 바울은 그렇게 일어났을 뿐 아니라 다시 루스드라로 들어갔습니다. 돌 맞아 죽을 뻔한 곳으로 다시 들어간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다음날 더베로 갔습니다.  


그런데, 더베로 간 바울은 거기서도 복음을 전합니다. 정말 대단하지요. 복음을 전하다가 도망치고, 또 루스드라까지 쫓아온 유대인들에게 돌에 맞아 죽을 뻔 했으면서도 계속 복음을 전합니다. 그래서 더베에서는 루스드라에서보다 더 많은 예수님의 제자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다시 이전에 복음을 전했던 도시들로 돌아갑니다. 아무래도 자기 소식을 듣고서 그 믿음이 흔들렸을 수 있기 때문에 그 것을 챙기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들에게 전한 메세지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메세지가 바로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란을 겪어야 할 것”이라는 말씀, “많은 환란을 통하면 반드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는 메세지였습니다. 말 자체는 아주 심각한 말이지만 저는 이 말을 하는 사도 바울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도 환하게 빛나고 있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런 고통과 환란을 당하고서 여전히 그 원인이 되었던 복음을 고집스럽게 전하는 바울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그런 고난은 복음전도의 의지를 꺾어 놓아야 정상이었을텐데 바울은 전혀 개의치 않고 더욱 더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렇지만, 정작 당사자인 바울에게 그런 고난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고난들은 피하고 도망쳐야 할 불쾌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꼭 통과해야만 하는 일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바울에게는 하나님 나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었습니다. 그 나라에서 영광을 누리며 하나님과 영원히 사는 일보다 더 큰 소망은 없었습니다. 그러니 그 일을 보장해 주는 복음을 위한 고난은 피해야 할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이고 또 오히려 고맙게 여겨지기까지 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바울의 말을 주의 깊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란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많은 환란이 우리를 하나님 나라에 꼭 들어가게 해 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수많은 이유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 그 나라의 영원한 백성이 되는 것, 그것보다 더 중요하고 결정적인 것이 있을까요? 그런데 바울은 그 일을 우리가 믿기 때문에 이 땅에서 감당해야 할 환란과 직접 연결시켜 놓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만 그럴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도 자주 자주 그걸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와 같은 말씀들이 바로 그런 말씀들입니다. 이런 말씀들은 복음서에서도 별로 사랑받지 못하는 말씀들이지만 놀랍게도 이 말씀 속에 우리가 구원을 얻고 영생을 얻는 방법, 그리고 그 구원과 영생을 더욱 더 영광스러운 것이 되게 할 방법이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져야 할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삶의 중심에 두고 그 십자가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나아가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믿음 때문에 손해 볼 일이 있으면 손해도 보고, 오해 받을 일 있으면 까짓 거 오해도 좀 받고, 그것 때문에 남들보다 늦게 가야 하면 조금 늦게 돌아가기도 하 면서, 나만 챙기지 말고 다른 사람들도 챙겨주면서 그렇게 아름답고 향기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이 땅의 성도들이 그렇게 살지 못하기 때문에, 아니 그렇게 살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지금 주님이 욕을 먹습니다. 하나님이 부끄러움을 당하십니다. 우리는 진지하게 고민해 보아야 합니다. 과연 우리가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이런 모양으로 살고 있다면 과연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들을 기쁘게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게 해 주실까요? 그 나라의 그 무한한 영광을 우리들에게도 나눠 주실까요? 그러다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과연 마냥 기쁘고 즐겁기만 할까요?


저는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란을 겪어야 할 것”이라는 이 말씀만큼 오늘 이 시대의 성도들과 교회에 필요한 말씀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러다가 이 나라 성도들의 신앙이 하나님 나라와 상관없는 것이 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저는 언젠가도 말씀드렸듯이 적당히 목회나 잘 한다는 소리 들으려고 여러분의 목사가 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여러분을 조금이라도 더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서게 하고 또 그 덕분에 저도 주님의 칭찬을 받기 위해서 턱없이 부족하지만 그 소원 때문에 여러분의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조금 더 불편하게 예수 믿읍시다. 조금 손해 보면서 사십시다. 편하게 예수 믿으라는 영원히 망할 메세지에 귀를 기울이지 말고 더 영광스럽고 확실하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그런 신앙생활을 하십시다. 그래야 나중에 서로 영원히 얼굴 맞대고 살아야 할 서로를 보면서 얼굴 찡그리지 않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오늘 주님께서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란을 겪어야 할 것”이라는 이 생명처럼 귀한 말씀이 저와 여러분의 가슴판에 새겨지게 하셔서 우리가 가는 이 길이 더 빛나고 영광스럽고, 또 사람들 보기에도 가치있는 그런 길이 되게 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