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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4.12.19. 금요기도회 -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사도행전 89)






본문 : 사도행전 15장 1–11절




무슨 일이든 계획을 세워놓고 진행해 가는 일들은 이제 이 정도면 일이 다 이루어졌다고 보아야 하는 ‘결정적인 단계’라는 것이 있게 마련입니다. 거기까지 오는 동안에야 많은 어려움도 있을 수 있고 장애도 있고 또 그 계획이 실패할만한 위기가 있기도 하지만, 그 결정적인 단계에 이르면 더 이상은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어지게 됩니다. 이제는 더 이상 그 일의 성공을 방해할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계획에도 ‘결정적인 단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이미 그 결정적인 단계를 훌쩍 넘어 섰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계획은 그 계획이 세워지는 순간부터 그 누구도  절대로 좌절시킬 수가 없는 계획이었습니다. 그 계획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시고 하지 못하는 일이 없으신 하나님의 계획이었으니까요. 그렇지만 이 계획도 한 단계, 한 단계 마치 계단을 밟고 올라가듯이 이 세상의 역사 속에서는 그렇게 이루어져 갔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 계획이 결정적인 단계를 넘어 섰습니다.  그 순간이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였습니다. 그 때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통해 구원얻는 길이 활짝 열려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거시서 치러야 할 값을 다 치르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말 정말 결정적인 일은 그 다음에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예수를 믿고 구원얻은 사람들에게 성령님을 부어주셨던 것입니다. 


성령님이 오신 일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에서 가장 결정적인 단계가 되는 이유가 두 가지 있습니다. 첫번째는 성령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마음과 영혼을 새롭게 하셔서 속속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 바깥이 아니라 우리 마음과 영혼 속에서 이 일을 이미 시작하셨으니 그 누구도 막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두번째는 성경적으로 보면, 성령님이 오셨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역사가 이제 우리가 ‘종말’이라고 부르는 마지막 단계로 접어 들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정말로 이 세상의 종말이 있을까요? 주님의 재림이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증거로 우리가 그것을 확신할 수 있지요? 바로 성령님입니다. 오순절 마가의 집에 성령님께서 임하셨을 때, 그것은 이제 마지막 때가 되었다는 확실한 신호탄이 터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종말의 증거를 자꾸 다른 데서 찾으려고 하는데, 사실 그런 증거들은 모든 시대에 항상 있어왔던 것들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보면서 세상의 종말이 왔느니 오지 않았느니 하는 것을 판단하려고 드는 것은 참 어리석은 일입니다. 이 시대가 이미 시작된 마지막 때에 속해 있다는 것은 성령님의 임재가 증명합니다. 그것보다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정말 주님이 다시 오실까하는 의구심이 들 때마다 이미 성령님께서 충만하게 임하신 것을 생각해 본다면, 그 의심은 다시 확신으로 바뀔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으로 돌아와서 성도들과 기쁨을 함께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유대에서 어떤 사람들이 안디옥으로 왔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에게 구원을 얻으려면 예수를 믿어야 할 뿐만 아니라 할례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었을까요?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들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를 믿는데 그런 주장을 했던 것입니다.  얼핏 보면 예수를 믿고 할례도 받으면 더 좋지 않을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구원을 더 확실하게 만드는 것처럼 보이니까요. 그렇지만 구원 받는 일에 할례가 꼭 필요하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원이 불완전하다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완전하다면 굳이 거기에 할례를 더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그래서 바울과 바나바는 이 사람들과 격렬한 논쟁을 벌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논쟁은 결론이 나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안디옥 교회는 이 두 사람과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 중 몇 사람을 예루살렘으로 보내서 거기 있는 사도들에게 답을 구하기로 했습니다. 


예루살렘에 도착한 바울과 바나바는 예루살렘 교회로 부터 커다란 환영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회의에 참석해서 그간 두 사람이 복음을 전했을 때 이방 땅에서 일어났던 놀라운 일들에 대해서 자세하게 보고했습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보고였습니다.  그 곳은 이방 땅이었습니다. 거기 사람들은 율법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었고, 할례도 받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곳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다면 이방인들은 구원을 받기 위해서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는 가장 분명한 증거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두 사람의 증언이 미칠 영향을 간파한 반대파 중의 한 사람이 선수를 쳤습니다. 바로 성경이 ‘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있는 그 사람이었는데, 그 사람은 일어나서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을 다 이루셨는데도 예수를 믿는 사람들 중에서 이런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이 참 이상하게 생각되지만 사실 이것은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합니다. 사람이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념을 그렇게 쉽기 버리지 못하니까요. 그래서 불교에 있다가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들 중에는 여전히 예수님을 불교믿듯이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새벽마다 새벽예배에 꼭 참석합니다. 그런데, 교회에 올 때, 꼭 목욕을 하고서 나옵니다. 치성을 드리듯이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 주장 때문에 회의장 안에서는 팽팽한 논쟁이 오고 가게 되었고, 그래서 사도들과 장로들이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 따로 모여야만 했습니다. 그렇지만 거기서도 의견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습니다. 이 때, 가만히 듣고 있던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인 베드로가 일어섰습니다. 그리고는 천천히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들이여, 여러분도 아시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이 저의 입을 통해 복음을 듣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여러분 가운데서 저를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러셨던 것처럼 이방들에게도 성령님을 주셔서 증언하시고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셔서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여러분이 어떻게 해서 하나님을 시험하여 솔직히 우리 조상들이나 우리들 조차 지지 못하던 짐을 이방인들에게 지우려고 하십니까? 우리는 우리 뿐만 아니라 그들도 우리와 똑같이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베드로는 이미 가이사랴에서  이방인에 대한 모든 고정관념을 뒤바꿔 놓는 일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가이사랴에 있는 이방인 유대교인인 고넬료에게 보내셨는데, 거기서 그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고넬료 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과 친구들도 함께 성령충만함을 받는 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일로 인해서 구원을 얻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일에 율법이나 할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을 경험으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처음 베드로가 그 일을 예루살렘 교회에 보고할 때도 이번과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때도 처음에는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이방인에게도 구원이 임하고 그들도 성령충만함을 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그저 유대인인 베드로가 어떻게 이방에 집에 머물면서 그와 교제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만 따지고 들었습니다. 그만큼 율법과 혈통에만 얽매여 있었던 것입니다. 그 때 그들은 베드로가 전하는 모든 이야기와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도 성령님을 선물로 주셨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도 생명에 이르는 회개를 주셨다고 인정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도 예루살렘 교회에는 여전히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복음을 믿는 것만으로 부족하며, 반드시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키는 유대인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예루살렘 교회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하나도 변하지 않은 것이 참 이상합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이것이 실은 똑같은 경험을 가진 사람들만이 어떤 집단이나 공동체를 이루어 모여 있을 때,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 안에 속한 사람들은 언제나 그래왔기 때문에 그런 모습에 대해서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못합니다. 오히려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뀌지도 않고 바꾸려 들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밖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거나 혹은 밖에서 새로 들어온 사람들이 보면 이건 정말 이해하기가 힘듭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 있을 것 같습니다. 요즘 청소년들은 정말 입에 담을 수 없는 욕들을 얼마나 잘 하는지 모릅니다. 아얘 달고 사는 아이들도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 아이들에게는 욕을 하는 것은 너무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 아이들과 새롭게 친구가 된 한 아이가 계속해서 바른 말, 고운 말만 쓰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오히려 이 아이가 이상한 아이가 되고 별종이 됩니다. 그리고 놀림감이 됩니다. 실은 그 아이가 바른 것인데 말이죠. 그래서 우리는 항상 우리 자신의 눈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눈으로 나 자신과 우리들을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정말 좋은 교회, 바람직한 교회로 세워져 가기를 소망합니다. 여러분도 그러시죠? 그렇다면, 성도 여러분. 제가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주변의 다른 교회 성도들에게 한 번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그 분들의 교회에서 성도들이 어떻게 신앙생활하는지, 그리고 직분자들이 어떻게 교회를 섬기는지 이야기를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것을 여러분이 신앙생활하는 모습, 그리고 교회를 섬기는 모습과 한 번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더 잘하는 것도 있겠지요. 장점도 많구요. 제가 보기에도 분명히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잘못하고 있는데 너무 익숙해 져서 놓치고 있는 것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고 내가 잘 하고 있는 것은 잘 지켜나가고 더 열심히 하면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미처 보지 못하고 알지 못했던 빈 구석이 있다면 그것을 고쳐나가고 매꿔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 교회가 좋은 교회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들도 좋은 성도들, 좋은 직분자들이 되고 말이죠. 이야기가 약간 옆으로 흐른 감이 있지만 오늘 본문의 예루살렘 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는데, 너무 중요하다 싶어서 잠깐 말씀드렸습니다. 


우리가 본질을 붙들고 산다는 것. 이것은 말하기는 쉬워도 진짜로 그렇게 하기는 굉장히 어렵습니다. 우리는 저마다 우리가 익숙해져 있고 옳다고 여기는 그것을 당연하고 본질적인 것이라고 믿어 버리는 그런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복음을 믿었으면서도 율법과 할례가 구원의 필수조건이라고 주장하며, 이미 성령을 받은 사람들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고 억지를 부렸던 어떤 바리새인과 예루살렘 성도들의 모습은 이 사람들만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들의 그런 모습은 여전히 우리들 안에도 들어 있습니다. 


제 이야기를 말씀드려서 정말 죄송하지만, 절대로 제 자랑하려는 것이 아니니까 양해하시고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우리 교회에 와서 목회하면서 어떤 겉으로 보이는 행동에 대해서 “이것 안하면 성도가 아니다” 라고 “이것 안 하면 신앙이 없는 것이고, 이것 안하면 복 못 받는다”고 거의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저도 그런 말을 하면서 목회하면 목회하기가 훨씬 수월하다는 것 너무나 잘 압니다. 그렇지만 저는 지금까지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앞으로도 저는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애쓸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을 율법으로 바꿔버리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기 위해서 입니다. 성령으로 시작해서 육체로 마치지 않기 위해서 입니다. 물론 우리에게는 의무가 있습니다. 성도로서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는 것들도 있고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들도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당연히 말해지고 또 가르쳐 져야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지금 율법시대에 살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율법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우리를 움직이시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 시대의 특징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에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시대라는데 있습니다. 많은 수의 신앙적인 의무들이 여전히 의무로 남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그런 의무들을 마지 못해서, 성도의 자격을 갖추거나 복을 받기 위해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기쁘고 즐겁게 순종해야 합니다. 이미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서 그 일을 시작하셨고 또 이루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 남에게 짐을 지우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교회들을 살펴보면요. 그 안에 왜 그래야 하는지 정확한 근거도 없는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는 법칙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게다가 그런 것들 중에는 오히려 그것을 따르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게 되는 그런 것들도 굉장히 많습니다. 마치 이미 예수 믿고 성령을 받은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강요하는 듯한 그런 것들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교회 안으로 부르신 것은 서로에게 짐을 지우라고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서로가 서로의 짐을 져 주라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오늘 제가 여러분에게 간곡하게 부탁드립니다. 절대로 서로에게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요구하지 마십시오. 꼭 해야하겠거든 최대한 겸손하고 부드럽게 권하십시오. 그리고 그저 묵묵히 여러분 자신이 그 일을 하시고 또 그렇게 하십시오. 그것이 꼭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이라면 여러분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볼 때, 다른 성도들도 여러분을 따르게 될 것입니다. 교회는 주장하는 일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변화되어야 가장 조화롭고 아름답게 변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복음의 시대이고, 그래서 성령의 시대입니다. 이 결정적이고 복된 시대를 살아가는 특권을 가진 성도들로서 복음과 성령 안에서 마땅히 해야 할 바를 기쁘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행하시면서, 남에게 짐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대신 짐을 져주는 영광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