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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4.12.21. 주일오전 - 유다인이 자기를 미워하는 자에게(에스더 13)


20141221SM.mp3.zip





성경본문 : 에스더 9장 1-19절




많은 사람들이 자기 인생에 대한 이런 저런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을 이루기 위해서 열심히 달려가지만 실제로 원하고 계획하는 대로 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이 반전의 반전을 거듭한 결과 지금 있는 그 자리에 와 있는데, 자신이 그 자리에 있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고 이구동성으로 고백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사는 모습이 이와 다르지는 않습니다. 성도의 삶도 뒤집히고 또 뒤집힙니다. 이런가 하면 저렇게 되고 저럴 것이다라고 생각하면 이렇게 됩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믿지 않는 사람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 모든 것을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반전의 순간마다 하나님께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셨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이런 경험을 반복하다 보면, 성도들의 몸에 저절로 스며들게 되는 자신의 삶을 대하는 태도들이 있습니다. 하나는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것처럼 상황이 어려워 지고 힘들어 진다고 해서 쉽게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반대로 승승장구한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자만하거나 교만해 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정말 불행하고 정말 하나님의 실수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던 그 일이 세월이 흐르고 보니 내 인생에 정말 필요한 일이었고, 이건 정말 내가 했지만 너무 잘 한 선택이라고 생각했던 일들이 오히려 내 삶을 흔드는 이유가 되는 것을 경험할 때,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사는 자신의 인생에 대해 쉽게 절망하거나 좌절할 필요도 없고 반대로 또 자만할 수도 없다는 것을 저절로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마지막 세번째로 성도들은 지금 당장 눈 앞에 닥친 상황이나 혹은 삶 자체에 너무 심하게 얽매이거나 너무 무관심해 지고 또 쉽게 생각하지 않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자신의 인생을 볼 수 있게 되니까 ‘인생을 대하는 적당함’을 아는 깊은 지혜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는 하루 아침에 유다백성들을 둘러싼 바사의 모든 상황이 정반대로 뒤집혀 버린 것을 함께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멸망당하는 것을 그냥 보고만 계시지 않으셨습니다. 액션 영화의 주인공처럼 상황 속으로 뛰어 들어오셔서 폭탄이 터지기 직전에 그 폭탄을 해체하시고 그 폭탄을 악당들의 소굴로 던져 버리셨습니다. 에스더 9장부터는 그 다음에 그 이야기가 어떻게 되었는가를 보여주고 있는데요. 특히 9장 19절까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반대로 바뀐 조서의 내용을 실제로 실행에 옮기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선 우리가 오늘 본문의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한 가지 꼭 짚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하수에로 왕이 내린 두번째 조서의 내용이 정확하게 어떤 것이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에스더서 처음부터 듣게 되는 바사 왕들의 조서에 대한 원칙은 왕이 한 번 내린 조서는 절대로 취소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1장 19절을 보면 신하들이 아하수에로 왕에게 와스디 왕후를 폐위시켜야 한다고 말하면서 이렇게 이야기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왕이 만일 좋게 여기실진대 와스디가 다시는 왕 앞에 오지 못하게 하는 조서를 내리되 바사와 메대의 법률에 기록하여 변개함이 없게 하고…” 그런데, 우리는 똑같은 이야기를 8장 8절에 와서 또 한 번 듣게 됩니다. 아하수에로는 자기 명의로 된 조서를 내리라고 말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왕의 명의로 유다인에게 조서를 뜻대로 쓰고 왕의 반지로 인을 칠지어다 왕의 이름을 쓰고 왕의 반지로 인친 조서는 누구든지 철회할 수 없음이니라” 우리는 왕이 모르드개에게 작성하고 또 반포하도록 했던 두번째 조서가 하만을 통해 작성했던 첫번째 조서를 뒤집었다는 것을 이미 살펴 보았습니다. 그것은 틀림 없습니다. 그렇다면 모르드개의 조서는 하만의 조서를 완전히 무효로 만들어 버리는 역할을 했을까요? 저도 처음에는 긇게 생각했는데 에스더서를 자세히 살펴보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우선 8장 8절에 나오는 왕의 말은 굉장이 우스운 이야기가 됩니다. 자기 입으로 이전에 내렸던 조서를 파기하라고 말하면서 왕이 어인을 찍어 내린 조서는 왕이라도 취소할 수 없다고 말하는 꼴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황적으로 볼 때, 두번째 조서가 첫번째 조서를 폐기시킨 것이 아닌 것이 거의 확실합니다. 그러니까 당시에 두 개의 조서 모두가 다 유효한 상태였던 것입니다. 그 때 왕은 첫번째 조서를 취소한 것이 아니라 그저 두번째 조서를 덧붙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두번째 조서를 보아도 확실히 알 수 있는데요. 8장 11절은 조서의 내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조서에는 왕이 여러 고을에 있는 유다인에게 허락하여 그들이 함께 모여 스스로 생명을 보호하여 각 지방에서 세력을 가지고 그들을 치려 하는 자들과 그들의 처자를 죽이고 도륙하고 진멸하고 그 재산을 탈취하게 하되 아달월 곧 십이월 삼십일 하루 동안에 하게 하였고 … 유다인들에게 준비하였다가 그날에 대적에게 원수를 갚게 한지라” 이것을 보면 이 조서가 무차별적인 보복이나 살육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유다민족이 공격을 당했을 때, 자기를 보호하고 그 일에 대해서만 보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유다백성들에게 정당방위를 할 수 있는 권한을 주는 것이 이 조서의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만약 이 조서가 없었다면 유다인들은 앉아서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조서가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공격 당할 때 자기를 보호할 수 있었고, 또 마음대로 보복을 할 수 있는 권리를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조서의 내용 자체만 생각하면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이 조서의 일종의 방아쇠 역할을 했습니다. 조서의 내용이 이제 페르시아 제국 안에서 명망과 신임, 그리고 커다란 권력을 얻기 시작한 모르드개의 위치와 상승작용을 일으켜서 이전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등을 돌리고 있거나 아니면 그들이 어떻게 되든 관심이 없었던 사람들의 마음이 유다백성들에게로 향하게 했습니다. 지난 주일에 살펴본 대로 이미 유다백성들을 멸시하고 괴롭히던 많은 본토민들이 유다백성이 되었고 9장 3절을 보면 모든 지방관과 대신들, 그리고 총독들도 다 유다백성들을 돕게 되었습니다. 그 전에는 유다사람들은 외딴 섬에 홀로 고립되어 있는 상황이었고 하만은 나머지 모든 민족들을 자기 편에 두고 유다사람들을 말살하려던 그런 상황이었는데, 이제는 그 조서로 인해 상황이 완전히 뒤집히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그 조서가 처음부터 도륙당할 사람들이 완전히 정해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두번째 조서가 전달된 것이 삼월이었고, 그 조서의 시행은 첫번째 조서가 시행될 날과 같은 날인 12월 13일이었으니까 바사 제국 내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태도를 결정할 수 있는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그리니까 두번째 조서는 결과적으로 마지막까지 모든 기회를 스스로 내던지고 고집을 부리며 하나님의 백성들을 공격한 그 사람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조서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드디어 12월 13일, 그러니까 두 개의 조서가 동시에 시행되는 날이 되었습니다. 완전히 반전된 상황에서 유다백성들과 여전히 그들을 죽이려고 고집을 부리는 사람들의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조서가 유다백성들의 방어와 정당방위만을 허락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다사람들이 먼저 공격할 수는 없었고 싸움은 유다백성들이 자신들을 공격하는 사람을 처치하는 그런 모양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이 날 전쟁에서 바사 전체로 보면 7만 5천명, 그리고 수산성 자체만 보면 500명 남짓한 이스라엘의 대적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 하루가 다 끝날 무렵 수산성의 상황을 보고 받은 왕은 에스더를 불러 이렇게 묻습니다. “유다인이 수산성에서 이미 오백 명을 죽였는데, 다른 지방에서는 얼마나 많은 숫자가 목숨을 잃었겠느냐? 내 생각에는 충분한 것 같은데… 혹시 요구가 더 있느냐? 내가 그대로 따를 것이니라” 에스더는 대답합니다. “왕이 좋게 여기시면 내일도 오늘 조서대로 행하게 해 주소서. 그리고 오늘 싸움에서 죽은 하만의 열 아들의 시체를 나무에 매달아 주소서.” 말만 들어보면 에스더가 마치 피에 굶주린 늑대처럼 느껴지지만 에스더의 이 대답은 그 때의 상황을 정확하게 헤아린 데서 나온 가장 지혜로운 대답이었습니다. 하루 동안 서로 공격하고 방어하는 전쟁을 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대적들이 모두 죽지는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만약 그런 상태에서 전쟁이 끝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들은 또 다시 잠재적인 위협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6∙25 한국 전쟁 이후의 빨치산들처럼 숨어있다가 나중에 유다인들과 유다인의 편을 들었던 사람들을 공격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싸움을 벌이는 입장에서는 잔당들을 모두 처치할 수 밖에 없었고 그래서 시간을 하루 더 달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에스더는 왜 하만의 아들들의 시체를 나무에 매달아 달라고 했던 것일까요? 만약 우리가 지금 유다인들을 상대로 싸움을 벌이고 있고 눈 앞에 높이 달린 하만 아들들의 시체가 있다면 그것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할까요? 둘 중의 하나겠지요. 더 극렬하게 대항하거나 아니면 현실을 직시하고 투항하거나 말입니다. 에스더는 그렇게 마지막으로 돌이킬 기회를 주고 또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확실하게 골라내려고 했던 것입니다. 왕은 에스더의 청을 들어주었고, 그렇게 해서 끝까지 골라낸 사람들이 300명쯤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그 300명이 다 죽고 난 후에 그 싸움은 끝날 수가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두 번째 싸움은 수산성에서만 벌어졌습니다. 다른 지역에는 왕의 명령을 전달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을 보면 다른 지역과 수산성에서 싸움을 끝내고 유다백성들이 잔치를 벌인 날짜가 하루 차이가 납니다. 다른 지역에서는 13일 하루 동안만 싸움이 있었고 14일에는 쉬면서 잔치를 벌였지만 수산성에서는 이틀동안 싸우고 15일날 잔치를 벌였습니다. 이것이 2박 3일 동안 벌어진 싸움의 전말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구체적으로 유다백성들이 이 전쟁을 어떻게 치렀는지를 조금 살펴보겠습니다. 


8장 11절에 나와 있는 조서의 내용을 보면 유다백성들이 허락받은 것은 선제공격이 아니라 방어였지만, 그래도 이것은 엄연히 전쟁이 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전리품은 모두 승리한 유다백성들이 취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조서를 시행하고 있는 유다백성들에게서 이와는 정반대가 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먼저 유다백성들은 첫날 전투에서 하만의 열 아들을 모두 처치했습니다. 바사 최고의 권세가의 열 아들이니 그들의 재산 또한 어마 어마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유다백성들은 열 아들을 죽이기는 했지만 그들의 재산에는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다른 지역에서 전쟁을 치렀던 유다백성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6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왕의 각 지방에 있는 다른 유다인들이 모여 스스로 생명을 보호하여 대적들에게서 벗어나며 자기들을 미워하는 자 칠만 오천 명을 도륙하되 그들의 재산에는 손을 대지 아니하였더라” 이것은 정말 놀라운 기록입니다. 끝까지 자기를 죽이겠다고 달려드는 사람들을 상대로 전쟁을 치르면서 크든 작든 전리품을 하나도 챙기지 않았다니 그 전쟁에서 보인 유다백성들의 절제는 정말 대단합니다. 그렇다면 유다백성들이 이런 식으로 전쟁을 치를 수 있었던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은 그들이 비록 자신을 해치기 위해서 공격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고 있으면서도 그 전쟁의 목적을 살육이나 복수에다 두지 않고 스스로를 지키고 보호하는데 두었으며, 끝까지 그 목적을 지켜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성도로 사는 것은 어쩌면 유다 백성들이 자신들의 대적과 벌였던 전쟁을 많이 닮아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또한 언제나 우리를 이기고 또 이용하려는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본문이 보여주는 유다백성들의 모습은 오늘 우리에게도 많은 도움과 교훈이 됩니다. 우리들 또한 전쟁 중에 있습니다. 영적인 전쟁도 치열하지만 현실적인 전쟁도 굉장히 치열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싸움을 피하려고 한다고 해서 그것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습니다. 모두가 경쟁하고 싸움을 벌이는 이 세상에서 우리도 발을 붙이고 살아가야 하니까요. 나는 경쟁을 하지 않고 싸우지 않는다고 해도 이미 누군가와는 다툼을 벌이고 있는 것이 우리의 인생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싸움을 어떻게 싸워야 할까요? 우선 우리가 이 싸움에 대해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싸움이 다른 사람들을 공격하고 남을 이기기 위해서 싸우는 그런 싸움이 되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남을 이겨야만 내가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런 생각은 예수를 믿고 나서도 좀처럼 바뀌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도들 중에는 예수를 믿고 나서도 예전에 살던대로 남을 이기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서 살아가는 분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러면 과연 어떻게 될까요? 예수를 믿어도 여전히 자신의 삶이나 직장은 전쟁터로 남아있게 되고, 심지어는 새로 몸담게 된 교회마저도 여전히 누군가를 이기기 위해 싸우는 전쟁터가 됩니다. 그렇게 해서 자기 자신도 자신이 사는 세상도 상처입게 하고, 심지어는 교회에도 깊은 상처를 남기게 됩니다. 


제가 중학교에 다니던 때에 제 친구들 중에는 시험이 끝나고 성적표가 나오면 꼭 “너 이번 시험에 몇 등했냐?”고 묻는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물론 다른 아이들은 그 질문에 쉽게 대답해 주려고 하지 않았고, 자기 성적이 좋지 않을 때는 더더욱 그랬습니다. 그런데, 저는 누가 제 등수를 물어보면 언제나 있는 그대로 말해 주곤 했습니다. 4등을 하건 20등을 하건, 몇 등을 하건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친구들은 그런 저를 굉장히 신기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저는 그것을 신기하게 생각하는 그 친구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나중에 가서야 왜 같은 일을 놓고 저와 제 친구들이 그렇게 다른 모습을 보였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친구들은 항상 다른 사람들과 경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남보다 잘 하면 자랑스러워 했지만 남보다 못하면 창피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 또한 하나님께서 주신 신앙 너무나 좋은 인생의 선물이었다고 생각되는데, 저는 다른 사람과 경쟁한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제가 경쟁한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저 자신이었습니다. 열심히 했는데도 성적이 좋지 않으면 굉장히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별로 열심히 하지 않았는데 성적이 좋을 때는 참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기분이 그렇게 좋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에게는 제가 남들과 비교해서 몇 등을 했느냐 하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고 그 덕분에 공부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 본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절대로 공부를 잘 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잘 하든 못 하든 제가 한 만큼 받는 것이 성적이었고 그 이상의 의미는 없었기 때문에 성적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는 거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 중고등부 친구들, 여러분은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가 있나요? 없나요? 있지요? 목사님이 여러분이 해야 할 공부를 대신해 줄 수는 없어도 공부하면서 성적 때문에 스트레스를 훨씬 덜 받는 법을 알려 줄께요. 여러분의 등수나 점수가 아니라 내가 이번 시험에 정말 열심히 공부하고 있나, 정말 열심히 공부했나하는 것을 여러분의 기준으로 놓아 보세요. 그것만 생각해 보세요. 그렇게 여러분의 최선과 경쟁하면서 등수나 점수는 아얘 잊어버리려고 애써 보세요. 그러면 스트레스도 덜 받고 공부는 더 잘 되고 성적도 올라갈 겁니다. 공부 뿐만이 아닙니다. 다른 것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남들보다 잘 하려고 하지 말고 그저 내가 열심히 하려고 노력해 보세요. 그러면 열심히 하면서도 스트레스를 확 줄일 수 있습니다. 비교의식이나 열등감, 그리고 값싼 우월감에 빠지지 않을 수도 있구요. 그런데 그러려면 여러분은 무엇보다 먼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점수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어른이 되기 전, 아직 청소년일 때 꼭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앞으로 살면서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도는 결코 남하고 나를 비교하기 위해서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남보다 공부 잘 하기 위해서, 남보다 더 빨리 성공하기 위해서, 남보다 더 빨리 부자되기 위해서, 그렇게 남을 이기기 위해서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또 그렇게 자녀를 기르는 사람들도 아닙니다. 때로 우리 의사와 상관 없이 사람들이 우리를 줄 세우고 등수를 메기는 것은 우리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우리가 먼저 나서서 그 줄 안으로 뛰어들어 앞자리로 가려고 다툴 필요는 없습니다. 친구를 이기고, 이웃을 이기고, 또 동료를 이기는데 우리의 목적이나 삶의 가치를 둘 필요가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여기에 가치를 두고 이런 생각으로 살아가게 되면 우리는 항상 욕심을 부리게 되고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이기적이고 잔인한 사람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결국 이기기 위해서 해야 한다고 생각되는 모든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고 결국 그 생각을 따라 살아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한국 교회가 세상의 엄청난 질타를 받고 있다는 것은 여러분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서울대에서 철학을 가르치셨던 손봉호 교수님은 현재의 한국 교회가 아무나 걷어차는 동네 개처럼 되어버렸다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땅의 교회가 도대체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저는 교회와 성도들이 지금까지 자꾸 싸워서 이기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교회와 더불어 경쟁했습니다. 다른 교회는 어찌되든지 우리 교회만 잘 되면 된다고 생각하면서 그 생각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니 그 싸움에 이기기 위해서 하지 말아야 할 선택을 너무 많이 했고 세상을 교회로 끌어 들였습니다. 성도들은 자신의 삶 속에서 믿지 않는 사람들을 자기의 경쟁상대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과 싸워 이기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이기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지 말아야 할 선택도 하게 되었고, 그러는 중에 다른 사람들에게 너무 많은 상처를 주었습니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볼 때, 오늘 한국 교회는 어떤 면에서는 세상보다 더 세상처럼 변해 버렸고, 또 너무나 많은 적을 두게 되었습니다. 만약 유다백성들이 우리가 보았던 그런 방식으로 전쟁을 치르지 않고 먼저 공격해서 무지비하게 닥치는 대로 죽이고 또 보이는 대로 집어서 자기 주머니에 넣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과연 그 전쟁이 끝난 후 다른 민족들로 부터 사랑을 받고 존중 받을 수 있었을까요? 정반대일 것입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다른 민족들은 유다민족에게서 마음을 돌렸을 것이고 나중에 유대백성들의 적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그들은 제 2의 하만과 그 가족들이 되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도는 할 수 있다고 해서 다 하고 사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법을 지키고 양심을 지키려고 애써야 하는 것은 기본이구요, 그게 법과 양심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가질 수 있는 것 다 가지려 들고 할 수 있는 것 다 하려고 하면서 살아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하면 내가 섬겨야 할 세상에 상처를 주게 되고, 내가 사랑하고 섬겨야 할 사람들은 나의 적으로 만들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모양으로 사는 삶이라면 분명히 하나님 앞에서도 칭찬받고 인정받는 인생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유가 있다고 자기 마음대로 하면서 살아가려고 했던 고린도의 성도들에게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라고 했습니다. 성도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무엇이 모두에게 가장 유익한 것인지, 또 가장 크게 덕을 세우는 일인지를 헤아리고 그것을 선택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 안에서 자신의 행복과 유익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어떻게 이렇게 험하고 경쟁이 심한 세상에서 그렇게 살아갈 수 있겠느냐고, 너무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도 계실지 모릅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세속적인 시각으로만 본다면 이렇게 사는 것은 정말 비현실적이고 그래서 현실에 대한 답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성도 여러분, 성도가 보이는 것만 보면서 사는 사람들입니까? 그게 전부 다라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입니까? 그래서 자기 혼자서 자신의 힘으로만 살아가는 사람들입니까? 아닙니다, 여러분. 성도는 절대로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성도는 언제나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과 내 인생에서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분이시라는 것을 믿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경쟁이 심하고 거친 세상에서 성도답게 살면 분명히 우리 삶에는 구멍이 생길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구멍이 생길까 두려워서 많은 성도들은 무엇이 옳고 무엇이 더 덕스러운지를 알면서도 그렇게 살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그 구멍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 구멍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감당해 주십니다. 메꿔주시고 채워 주십니다. 똑같은 것이 아니라면 더 좋은 것으로 채워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가 그렇게 살면 우리 삶에 구멍이 생길 줄 아시면서도 그렇게 살라고 하셨기 때문에 그 구멍은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십니다. 그래서 성도 여러분, 우리 인생에는 구멍이 좀 있어도 괜찮구요, 또 일부러 구멍을 좀 내면서 어수룩하게 살아도 괜찮습니다. 그 구멍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들어오는 통로가 되고 우리 삶이 하나님의 것으로 채워지게 하는 이유가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삶에 거룩한 구멍들 몇 개쯤은 만들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메꿔주실 향기로운 삶의 구멍들 몇 개쯤은 항상 남겨 놓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 구멍이 우리 모두를 거룩하고 향기로운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줄 것이고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 가운데로 인도해 줄 것입니다. 


언제나, 우리 삶을 모두 아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넉넉한 마음으로 살아서 우리 삶을 채우시는 풍성함을 날마다 경험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