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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4.12.26. 금요기도회 - 항상 기도하고 낙심치 말아야 할 것(2014 마지막 금요)






본문 : 누가복음 18장 1-8절




우리는 또 1년을 기도하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한 번 한 번의 금요기도회가 쌓여서 또 다시 한 해의 마지막 금요기도회로 모였습니다. 한 번 한 번 지나갈 때는 그 한 번이 대수롭게 보이지 않아도 그 한 번 한 번이 쌓이면 결국 무언가의 마지막이 오게 됩니다. 그것이 한 번이 가지는 위대함이 아닌가 합니다. 어떻게 한 해 동안 기도드렸던 일들이 많이 응답되셨습니까? 저는 이 한 해 동안 기도의 덕을 아주 톡톡히 보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제 마음에 얼마나 자주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기적이 일어나는지 모릅니다. 사실 우리 교회에 부임하고서 거의 2년 동안 제 마음과 생각이 그리 편치가 않았습니다. 특히 처음 교회를 책임지고 돌보다 보니 처음 1년 동안은 그야 말로 좌충우돌이었습니다. 마음에 불안과 좌절감이 아주 강했고, 그것 때문에 그 때 저질렀던 실수들은 지금 생각하면 하나님께도 그렇고 여러분에게도 그렇고 얼마나 부끄럽고 죄송스러운지 모릅니다. 올해는 큰 틀에서는 평안과 안정감을 찾았지만 그래도 순간 순간 제 마음과 생각이 크게 흔들리고 혼란스러울 때가 많았습니다. 아슬아슬하게 넘어왔지요. 그런데, 올해 후반기에 들어오면서 어느 날 새벽기도 시간에 제 마음에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 날 정말 갑작스럽게 든든한 평안함이 제 마음을 가득 채우는 것을 경험했고, 그 이후로는 작은 흔들림이 있어도 이내 다시 평안함을 되찾곤 했습니다.  


왜 갑자기 그런 은혜가 주어졌을까 정말 신기해 하고 있었는데, 문득 그것이 바로 기도 덕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제가 지난 2년 동안 가장 많이, 그리고 가장 간절하게 드렸던 기도가 바로 믿음으로 살고 믿음으로 목회하게 해 달라는 것이었는데, 올해 후반기에 제가 그 은혜를 경험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에  대해서 큰 응답을 주셨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가만히 돌이켜 보면 저는 사실 제가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맡기고 그것 때문에 힘들어 하지는 않고 살고 있었는데 목회에 대해서 만큼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정직하게 말씀드리면 아주 가끔씩 문득 문득 과연 우리 교회가 교회답게 세워질 수 있을까하는 불안한 질문이 있었습니다. 사실 이 질문은 제가 물을 수 있는 질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교회인데 제가 그런 문을 하는 것은 주제넘은 월권이니까요. 그렇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종으로서 책임을 맡다 보니 가끔씩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제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고, 그래서 그런 걱정과 두려움이 찾아올 때마다 믿음으로 목회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또 기도했습니다. 기도를 드릴 때는 왜 이렇게 응답이 더디냐고, 왜 이렇게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시느냐고 묻기도 하고 불평도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기대하지 않았던 순간에 그 기도에 응답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경험한 이후부터는 제가 우리 교회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생각과 마음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물론 이 세상에 완전한 것은 없듯이 제 마음도 완전치는 않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도 저는 가끔씩은 그런 질문과 두려움을 품게 될 때가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제가 계속해서 믿음을 위해서 기도하고 또 기도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흔들림을 잦아들게 해 주실 것이고, 그 횟수도 줄어들게 해 주실 것입니다. 적어도 그 질문이 제 삶과 사역에 지장을 줄 정도가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우리 교회는 아직 가야할 길이 멉니다. 물론 특별히 우리 교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 땅의 많은 교회들이 교회다운 교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성도들의 교회,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로 회복되려면 다 그렇지만, 우리 교회도 가야 할 길이 아주 먼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의 지난 2년간을 한 번 가만히 되돌아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지난 2년간의 우리교회가 어땠다고 느껴지십니까? 저는 그 이전의 시간들이 어땠는지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지난 2년간의 시간에 대해서 제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지난 두 해 동안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지속된 시간이었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확신하는 이유는 두 가지가 있는데요. 한 가지는 그 2년 동안 교회가 걸어온 길이 너무나 순적하고 물 흐르듯이 부드러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억지로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을 이루기 위해서 또 억지를 부린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필요할 때마다 필요한 사람들도 붙여주시고 또 이런 저런 모임도 생겨나게 하셔서 교회가 차분한 가운데 조금씩 조금씩 세워져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성도들 사이의 갈등도 많이 줄어들었고, 또 간혹 갈등이 있어도 그 갈등들을 잘 풀어내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있어서도 제가 처음 만났을 때의 여러분과 지금 여러분의 모습은 정말 많이 달라져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들끼리만 있어서 잘 모르지만 사실 교회가 이렇게 흘러갈 수 있다는 것은 참 쉽지 않은 일입니다. 저마다 자기 의견이 강하고 욕심도 있고, 또 모난 구석이 있는 것이 사람들이고 교회 또한 그런 사람들이 모인 곳이니까요. 그래서 저는 지난 2년이 하나님의 변함 없는 은혜 가운데 지나간 시간들이라고 확신합니다. 


제가 지난 시간들이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 속에서 흘러갔다고 확신하는 두 번째 이유는 바로 성도 여러분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참 많이 변했습니다. 제가 드리는 말씀을 오해하지 말고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처음에 우리 성도들은  많은 분들이 사실 함께 소리내어 기도하는 일에도 익숙하지 못하고 또 예배드리며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는 일에도 굉장히 힘들어 하셨습니다. 더러는 아얘 무관심하시기도 하고 또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이유도 모르는 분들도 계셨습니다. 그런데, 2년이 흐른 지금은 여러분의 모습은 정말 많이 달라져 있습니다. 이제는 뜨겁게 기도하시는 분들도 많아졌고, 그 기도도 많이 깊어지고 길어졌습니다. 예배의 기쁨을 누리는 분들도 늘어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이 왜 중요한지를 깨달아 가고 계시는 분들도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특히 주일 오후 교리공부 시간에 보면 딱딱하고 쉽지 않은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적으면서 이해하려고 애쓰시고 또 깨달음이 있을 때, 기뻐하시는 여러분의 모습을 보면 처음 그 공부를 시작했을 때와는 정말 다른 분들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저는 이런 변화들이 단순히 거기 익숙해졌기 때문에 일어난 변화들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그 동안 하나님께서 변함없이 은혜를 부어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믿습니다. 


물론 우리는 이제 시작입니다. 저도 그렇고 여러분도 그렇고 이제 한 걸음을 내딛었을 뿐입니다. 그렇지만 지난 2년 동안의 시간은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삶과 신앙에 어떤 놀라운 일들을 일으킬 수 있는지 맛보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교회가 왜 이렇게 은혜 가운데서 지난 2년간을 보낼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셨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그리고 이렇게 모여서 교회와 우리의 신앙을 위해서 드린 기도를 하나님께서 모른 척 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앞으로도 우리가 기도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한,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실 것이며, 우리 개인의 삶이나 우리 교회를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머물게 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말씀입니다. 불의한 재판관에게 끈질기게 탄원해서 억울함을 풀어낸 한 미망인의 비유이지요. 본문에 등장하는 재판관은 불의한 재판관이기 때문에 절대로 돈 없고 힘 없는 사람의 편을 들어주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재판관이 임자를 만났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 재판관이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힘이 없고 돈이 없으면 몇 번 찾아가 조르다가 포기했습니다. 그런데, 어 느 날 이 재판관 앞에 이미 혼자된 지 오래 되어서 그 어디도, 그 누구에게도 의지할 데가 없는 한 미망인이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려고 그를 찾아온 것입니다. 재판관은 그 미망인의 행색을 보고서 이미 마음을 굳혔습니다.  경험으로 볼 때, 누구나 한 두 번 찾아오다가 포기하고 돌아갔기 때문에 이 여인도 그렇게 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그저 한 두 번 들어주고 말자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다른 사람들과 급이 달랐습니다. 그 녀의 뼈대는 용가리 통뼈였고 그녀의 심줄은 고래 심줄로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 아무리 무시하고 또 무시해도 여인은 아침이 되면 어김 없이  재판관을 찾아와 하소연하고 또 하소연 합니다. 듣기 좋은 소리도 하루 이틀이지 재판관은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자다가도 그 여인의 목소리가 귀에서 맴돌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견디다 못해 드디어 결정합니다. ‘이러다 내가 죽겠다. 저 일을 해결해 주자’하고 말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 주신 후에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자, 얘들아. 만약 저 재판관이 불의한 사람이라도 그 미망인의 끊임 없는 탄원을 들어줄 수 밖에 없었다면, 하나님께서 어찌 밤낮으로 부르짖는 택하신 사람들의 원한을 풀어주시지 않으시겠는냐?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에 더디 응답해 주시겠느냐? 하나님은 그 원한을 빨리 풀어 주실 것이다.” 사실 이 비유는 제자들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헌신하며 살다가 보면 만날 수 밖에 없는 억울한 일들에 대해서 하나님께 탄원하면 하나님께서 분명히 그것도 될 수 있는대로 신속하게 그 탄원에 응답해 주실 것이라는 메세지를 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런 기도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드리는 기도, 은혜에 목말라 드리는 기도도 마찬가지라고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드리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기도에 대해서는 모두 다 마찬가지로 움직이시고 또 일하신다고 믿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듣고 계실까요?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 주실까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더디게가 아니라 신속하게 응답해 주실까요?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고 계시며, 그 기도에 응답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다면 그대로, 그리고 그렇지 않다면 다른 더 좋은 것으로 응답해 주십니다. 그것도 가장 빠르게 응답해 주십니다. 이것이 불의한 재판관이 아니라 선하신 아버지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는 우리들의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실제로 그렇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기도에는 항상 그 기도를 좌절시키는 장애물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라고 믿고서 기도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는데도 하나님으로부터 원하는 응답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래도 급한 쪽은 우리니까 기도를 계속합니다. 그런데, 그래도 들어주지 않으십니다. 그러면 슬슬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합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으시는 것이 맞나? 만약 듣고 계신다면 기도에 응답해 주시는 것은 맞나, 그리고 응답해 주신다면 속히 응답해 주시는 것이 맞나, 그렇다면 왜 이렇게 내 기도는 들어주지 않으시지?’ 아마 오랫동안 하나의 기도제목으로 기도해 보신 분들이라면 이런 생각과 기도에 대한 회의 한 번 쯤은 모두 경험해 보셨을 것입니다. 여기에 덧붙여서 사실 시간의 흐름은 그것 자체가 우리에게서 기도에 대한 기대와 열정을 빼앗아가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것, 특히 우리가 생각하기에 응답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그런 기도제목으로 기도하는 일에 있어서 그 기도를 그만두게 하는 가장 큰 적은 바로 ‘낙심’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도를 금방 들어주신다면 전혀 걱정이 없겠지만 우리의 경험 속에는 그렇지가 않으니까요. 우리의 경험은 하나님이 결코 기도를 신속하게 들어주시는 분이 아니라고 말해 주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낙심’이라는 놈이 기도드리는 우리를 공격하는 것이고, 그 공격에 우리가 쉽게 무너져 내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성경말씀과 우리 경험 사이에는 그런 차이가 존재할까요? 그리고 우리의 경험과 하나나님의 말씀 중에서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할까요? 우선 제가  이런 차이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실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은 ‘될 수 있는 대로 빨리’가 아니라 ‘가장 좋은 때가 언제인가’하는 것입니다. ‘될 수 있는대로 빨리’는 그 다음에 생각하십니다. 우리가 기도가 빨리 응답된다고 느낄 때는 이 두 가지가 일치할 때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고 느낄 때에는 두 가지가 일치하지 않을 때입니다. 그럴 때는 가장 좋은 때에 응답해 주셔야 가장 유익하기 때문에 가장 좋은 때가 오기까지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의 철이 좀 들었다면 이런 하나님의 마음도 헤아릴 줄 알아야 합니다. 내 생각만 하지 말고 하나님도 좀 생각해 드려야지요. 분명히 하나님도 그걸 원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간절한 기도에 신속히 응답해 주시지 못하고 우리에게, 그리고 이 세상에 가장 유익한 때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심정은 어떻겠습니까? 아마도 우리보다 더 답답하실 것이 분명합니다. 


주님은 하나님께서 속히 원한을 풀어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신 후에 이렇게 덧붙이셨습니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이 말씀은 우리가 낙심하지 않고 항상 기도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믿음이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렇다면 이 믿음은 무슨 믿음을 말할까요? 이미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듣고 계시며 그 기도에 가능한 한 가장 신속하게  응답해 주신다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항상 그렇게 일하신다는 것을 확신하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가 경험하는 것과 다릅니다. 그래서 이 믿음을 유지한다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진짜로 신뢰하는 믿음은 눈에 보이는 것이나 심지어는 반복되는 경험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현실이 뭐라고 말하든, 경험이 무슨 주장을 하든 하나님의 선하심과 완전하심을 의심치 않습니다. 그래서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항상 기도합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순간까지 응답해 주시지 않는 기도제목이 있을지라도 기도하고 또 기도합니다. 주님 다시 오시는 날, 그렇게 믿음을 지키며 기도하고 있는 성도를 발견하실 때, 주님은 얼마나 기뻐하고 또 기뻐하실까요? 


한 해 동안 주님은 우리가 기도드린 그 대로, 우리가 생각하는 그만큼은 아닐지 몰라도 가장 적절한 시기에 가장 유익하게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 주셨습니다. 2015년 새해에도 기도드리는 그 영광스러운 자리를 꼭 지키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불의한 재판관에게 끈질기게  탄원했던 그 미망인처럼 더욱 더 끈질긴 믿음의 기도자들이 되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새해에도 우리의 기도에 놀랍게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을 누리며 사는 복된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