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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5.01.30. 금요기도회 -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베푸니(사도행전 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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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도행전 16장 1-5절



이 세상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 지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사람이 아무리 그 어떤 노력을 하더라도 거기에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으신다면 겉으로 보기에는 어떻든지 간에 하나님의 뜻이 제대로 이루어지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실 이것 때문에 역설적으로 사람의 역할이 중요해지기도 하는데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실 때, 그런 하나님의 뜻을 지혜롭고 정직하게 잘 헤아리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가장 순적하게 이루어 가실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책임이 사람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 지는 것을 실패로 돌릴 수는 없어도 방해할 수는 있고, 당장은 그 자신과 주변에 쓴 열매들을 남겨놓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요즘 물론 하나님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일을 하는 사람의 역할이,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맡기신 목회를 통해서 뿐만이 아니라 성경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그것을 알려 주시고 또 보여주시기 때문입니다. 어찌보면 서로 반대가 되는 것처럼 보이는 깨달음은 목회자인 저에게 많은 유익과 도전이 됩니다. 교회를 세우고 아름답게 만드는 일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결정적이지만 저와 여러분의 역할 또한 결코 적다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 안에서 사람은 하나님의 조력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민감하고 그 뜻에 순종하면 하나님의 일은 더욱 더 아름답고 영광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어떤 이유로건 그 반대편에 선다면, 결국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 지겠지만,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데 장애를 주는 역할을 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과연 어떤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헤아려야 하고 그렇게 깨달은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선택을 맞추어 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바로 이 일에 헌신하고 결단해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는 열정과 열심 보다도 오히려 분별력과 결단이 더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절인 5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건해지고 수가 날마다 늘어가니라” 사도행전에 자주 등장하는 문장이지만 너무나 아름답고 영광스럽습니다. 이 아름다운 모습은 제가 우리 교회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소원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저는 무엇보다도 우리 성도들의 믿음이 더 굳건해져 가기를 소원합니다. 우리 교회 모든 성도들이 정말로 세상을 이기고, 자신을 이길 정도의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이 목회자로서의 저의 가장 크고 중요한 소원입니다. 때로는 이 소원 때문에 스스로 힘들어 지고 기운이 빠질 때가 있지만, 그래도 저는 이 소원을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소원이 여러분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을 꼭 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 소원은 그렇게 굳건한 믿음으로 사는 우리 성도들의 모습이 증거가 되어서 믿음이 연약한 자들이나 혹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우리 교회로 많이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그렇게 교회가 다른 모습이 아니라 이런 모습으로 성장해 갔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물론 이 소원은 제가 이룰 수 있는 소원은 아닙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믿음을 줄 수도 없고, 또 그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믿음의 증인이 되게 만들 수도 없으니까요. 그렇지만 우리들 중에 같은 소원을 가지고 같은 믿음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씩 늘어난다면 분명히 우리 교회는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 있었던 교회들처럼 믿음이 더 굳건해 지고 수가 날마다 늘어나는 그런 교회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도 우리 교회를 향해 그런 소원을 품고 계시는 것이 확실하니까요. 


그런데,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의 교회들이 얻은 이 아름다운 복은 아무런 이유 없이 그 교회들에게 주어진 복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이 커다란 은혜가 사도 바울과 실라, 그리고 오늘 본문에 처음 등장하는 디모데의 헌신의 결과로 주어졌다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 교회가 정말 아름다운 교회로 성장해 가기를 바라시지요? 더베와 루스드라 교회처럼 모든 성도들의 믿음이 더 아름답고 견고하게 세워져 가기를 원하시지요? 그렇다면 이 자리를 빌어서 여러분에게 부담 좀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이 바로 그 씨앗이 되어 주시고, 하나님께서 그런 일을 하시게 하는 긍정적인 원인제공자가 되어 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통해서 그 일을 하시도록 여러분을 바울과 디모데처럼 하나님께 내어드리십시오. 


바울과 디모데, 오늘 본문의 중심인물은 이 두 사람인데요. 바로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디모데를 자기 선교의 동역자로 선택하게 되고, 영적인 아버지와 아들로서 관계를 맺게 됩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의 사역을 통해서 5절에 나오는 놀라운 은혜가 그들이 거쳐간 교회들에게 부어지게 됩니다. 1절은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 도착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루스드라는 14장에서 바울이 돌에 맞아 죽을 뻔 했던 곳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놀랍게도 바울이 다시 그 곳으로 돌아갔다고 말합니다. 정말 충격적인 이야기입니다. 말하기야 쉽지만 돌에 맞아 죽을 뻔 한 것이 실제로는 얼마나 끔찍하고 공포스러운 일이었겠습니까? 그런데도 바울은 다시 그 도시로 갔습니다. 무엇 때문이죠? 1차 전도여행 때 그 곳에 세워졌던 교회를 돌아보고 다시 굳게 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아직 복음이 한 번도 전해지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이미 복음이 전해졌고 그래서 교회가 있으니 그냥 내버려 두어도 될 것입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그 위험을 무릅쓰고 다시 그 도시로 간 것입니다. 거기 있는 예수를 믿은 지 얼마되지 않은 어린 성도들을 돌보아야 하겠다는 그의 간절한 마음이 그를 그리로 이끈 것입니다. 


그렇게 루스드라에 온 바울은 거기서 디모데를 만났습니다. 디모데는 아마도 첫번째 선교여행의 열매였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렇게 처음 예수를 믿고 나서 그리 길지 않은 세월이 지났지만 그 동안 디모데는 영적으로 상당히 성숙되어 있었습니다.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이미 정평이 나 있을 정도로 말입니다. 바울은 거기서 그렇게 만난 디모데를 자신의 동역자요 영적인 아들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를 데리고 본격적으로 그 지역의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루스드라에서 디모데를 데리고 떠나기 전에 한 가지 우리가 그냥 보기에는 조금 이상한 행동을 합니다. 멀쩡한 디모데를 데려다가 할례를 준 것입니다. 이미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와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의 믿음과 삶 또한 그것을 증명해 보이기에 충분했고요. 그런데도 바울은 디모데를 데려다가 굳이 할례를 주었습니다. 그런 다음에 디모데와 함께 그 지역의 교회들을 돌아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디모데는 아버지는 헬라인이었고 어머니는 유대인이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 헬라인들이 보기에는 헬라인이고 유대인들이 보기에는 유대인입니다. 유대인들은 혈통을 정할 때, 부계가 아니라 모계를 기준으로 해서 평가하니까요. 아버지가 헬라인이었기 때문에 디모데의 아버지는 디모데에게 할례를 줄 이유가 없었습니다. 당시 헬라인에게 할례를 받는 것이 가장 치욕적인 일이었으니까요. 그런데, 그러다가 디모데가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바울을 따라 그 지역의 교회를 돌아다니면서 복음 사역을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어느 도시에 가든지 항상 유대인들이 모여있는 회당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가장 효율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거기 모여있는 유대인들로부터 유대인으로 정당하게 인정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디모데가 바울과 동행할 때, 디모데가 회당에 들어가면 그 유대인들이 디모데를 거부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는 디모데가 분명히 유대인이지만 할례를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당장 거부를 당하기 때문에도 문제가 될 수 있지만 나중에 단독으로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돌보게 될 때, 커다란 문제를 만들어 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디모데를 불러다가 할례를 받게 했던 것입니다. 


이런 경우 예수를 믿고 나서 할례를 받은 것이지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 할례는 단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걸림돌이 되지 않으려고 받은 것일 뿐이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자녀가 되는 자격을 얻는 일과는 전혀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무언가를 덧붙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단순한 것 같지만 참 생각해야 할 것이 많습니다. 똑같은 일이라고 하더라도 상황과 의미에 따라서 해도 괜찮거나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것이 더 유익한 경우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절대로 해서는 안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 안에서는 확실히 죄가 되는 일들이 아닌 경우에는 거의가 다 여기에 속한다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그래서 기계적으로 이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반드시 해야 하지만, 이것은 절대로 하면 안된다고만 말하는 것으로는 많이 부족합니다. 성도는 항상 같은 일이라고 하더라도 상황에 따라서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선택이 될지를 생각한 후에 잘 분별하여 행동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우리 삶은 아름다운 향기를 내는 덕스러운 삶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입장에서는 디모데에게 할례를 주는 것이 당연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보기에는 디모데가 유대인인 것이 너무도 분명하고, 또 유대인들 사이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려면 할례를 받는 것이 여러모로 유익하고 유리했으니까요. 그렇지만, 디모데의 입장에서 이 일을 생각해 보면 그게 그렇게 당연한 일일 수가 없습니다. 그 동안 디모데는 할례를 받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단순히 디모데의 아버지가 반대했기 때문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자기 아버지가 헬라인이니 자신은 헬라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고 그래서 어른이 되어서까지 할례를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 할례에 대해서 생각조차 해 본적이 없었을 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이미 말씀드린 대로 헬라인 남성에게 할례를 받는 것은 수치 중의 수치였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디모데에게 할례를 받는 일이 그렇게 쉽고 간단한 문제였을까요? 아닙니다. 가장 거부감 가는 일 중의 하나였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디모데는 할례를 받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유는 너무나 단순합니다. 그것이 복음을 위해 헌신하는데 훨씬 더 유익하고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바울의 설득을 받아들였고 할례를 받고서 바울과 함께 동행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돌에 맞아 죽을 뻔한 그 도시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거기 복음이 아직 전해지지 않아서 바울이 하루라도 빨리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안될 그런 상황이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미 복음이 전해졌지만 거기 성도들의 믿음이 아직 단단해져 있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그런 그들을 그냥 내버려 둘 수가 없었고 그래서 다시 그 위험한 도시로 뛰어 들어간 것입니다. 디모데는 비록 하나님을 믿게 되기는 했지만, 그 때까지 평생을 할례를 받는 일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도 없는 헬라인으로 살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복음을 믿고 나서 그 복음을 위해서 헌신하게 되었습니다. 교회를 위한 사람이 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할례를 받았습니다. 기꺼이 그렇게 했습니다. 디모데에게는 얼마든지 할 말이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내가 꼭 할례를 받아야 복음을 전할 수 있느냐? 내가 할례를 받으면 오히려 헬라인들에게는 오해를 받을 수 있지 않겠느냐? 이미 복음을 믿고 구원을 받았는데 왜 또 할례를 받아야 하느냐, 그건 오히려 복음의 완전함을 부인하는 것 아니냐… 할례를 거절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말은 많고도 많았을 것입니다. 거친 것에서 부터 아주 고상한 이유까지 말입니다. 그렇지만 디모데는 복음과 교회를 위해서 그 모든 것들을 내려 놓았습니다. 


왜 사람들이 초대교회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할까요? 그것은 아마도 초대교회 시대에 나타난 놀라운 부흥 때문일 것입니다. 또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들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부흥은, 그리고 그렇게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은 어디서 온 것일까요? 물론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충만하게 부어 주셨기에 그런 일들이 가능했던 것이었으니까요. 그렇다면 과연 그게 전부일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사도행전을 통해 살펴보고 있지만 그 시대의 교회를 그런 부흥으로 이끌고 또 그런 아름다운 교회로 세우기 위해서 제대로 헌신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초대교회의 부흥이 계속되고 교회들이 계속해서 굳건하게 세워져 갈 수 있었던 정말 중요한 조건이었다고 믿습니다. 


누누히 말씀드리지만 사람이 곧 교회이고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일하십니다. 아름다운 사람들이 아름다운 교회를 만들고 영광스러운 성도들이 영광스러운 교회를 세웁니다. 하나님 혼자서 만드시는 좋은 교회는 없습니다. 그냥 세워지는 영광스러운 교회는 없습니다. 초대교회는 교회를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바울과 같은 사람, 그리고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가장 큰 수치와 거부감을 기꺼이 감당해 낼 수 있는 디모데 같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그렇게 영광스럽고 든든하게 세워져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정말로 우리 광현 교회가 좋은 교회, 아름다운 교회, 그리고 영광스러운 주님의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저도 기도하며 애쓰겠습니다. 비록 지금은 턱없이 부족하지만 바울처럼 디모데처럼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래서 몸된 교회를 사랑하는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서 기도하며 은혜를 구하겠습니다. 여러분도 저와 같은 길을 가 주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들은 생각하지 마시고 그저 내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몸된 교회를 사랑하며, 그 유익을 구하는 그 영광스럽고 가치있는 일만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서 주님의 복음을 사랑하고 몸된 교회를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는 영광스러운 변화를 일으켜 주시고, 또 우리는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어서 우리 교회를 든든하고 영광스럽게 세워가는 은혜를 누리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