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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5.03.10. 새벽예배 - 성경읽기와 묵상(민수기 18-1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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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일 : 2015년 3월 10일 화요일




민수기 11장 부터 시작되어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19장까지의 모든 이야기는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특별한 직분과 권위를 맡기신 사람들에게 이런 저런 이유로, 이스라엘 백성들 중 누군가가 반역을 하고 또 불순종을 하는 안타까운 이야기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일반 백성들은 먹는 것과 전쟁이라는 가장 현실적이고 절실하게 와닿는 문제들로 하나님과 지도자들을 원망했습니다. 그리고 미리암과 아론은 모세가 가지고 있었던 권위를 탐내어 모세에게 반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16장과 17장에서는 레위인들 중에서 고라자손들을 중심으로 한 250명의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모세와 아론에게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렇게 보면 실제로 모세를 제외한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반역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담이 하나님이 아닌 자신을 왕으로 삼은 이후에 인간은 항상 반역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 마음 속에는 자기 보다 위에 있는 권위에 대한 거부감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게 하나님이든 사람이든 말이지요. 자기가 자기의 왕이 되어야 하는데 사람이나 하나님이 항상 그 일을 불가능하게 만드니 틈만 나면, 자기가 보기에 그럴 듯한 구실만 생기면 곧바로 그것을 정당화해서 그것을 뒤집으려고 듭니다. 우리 안에도 이와 같은 습성이 있습니다. 물론 그저 권위가 있다고 해서 아무리 잘못 간다고 해도 다 그 권위에 순복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혹시 우리의 반감이나 혹은 반항심이 올바른 리더십에 대해서도 똑같은 태도를 취하고 있지 않은지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라 자손들이 주도한 반란을 고라의 가족들을 멸하시고 또 그 일 때문에 악한 말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한 백성들을 전염병으로 벌 주시는 일을 통해서 완전히 잠재워 주셨습니다. 그리고 각 가문의 리더십의 상징인 지팡이를 모두 가지고 오게 하셔서 그 중에서 아론의 지팡이에만 이파리와 싹이 나게 하고 또 살구 열매가 맺히게 하신 일을 통해서 아론과 레위지파만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영적인 리더십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 주셨습니다. 이것은 다른 지파들에게는 영적인 위기로 여겨졌습니다. 이제는 절대로 자기들 마음대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이 확고하게 굳어진 것이니까요. 그렇지만 그들은 또한 그런 반역을 저질러 놓고서도 자신들이 하나님께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17장 마지막 두 절에서 자신들의 그러한 곤란함을 그대로 하소연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래서 그 해결책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항상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 사이에 아론의 자손들이 제사장이 되어 서 있게 하셨던 것입니다. 물론 나머지 레위족속들은 아론의 자손들을 보조하고 돕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셨구요. 18장과 19장을 보면 그래서 부정함을 처리하는 방법과 제사를 드리는 방법이 다시 한 번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론의 아들들의 중보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와 부정함이 처리되도록 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로 나아오는 길을 열어놓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제물 중의 일부분은 거룩한 제사장들 몫으로 돌아갈 것이고,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십일조는 레위인들을 부양하기 위해서 쓰여져야 한다고도 말씀하셨는데요. 이것은 그 어떤 이유로건 레위인들의 직무가 멈춰져서는 안되기 때문에, 그리고 특별히 레위족속들을 보호가시기 위해서 취하신 조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는 한, 레위인들은 계속 부양될 수 있었고 그러면 어떤 상황 속에서도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 사이를 연결하는 일은 계속될 수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우리는 19장에서 조금은 특별한 말씀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제사장이 제사를 드리면 그 제사장이 부정해 진다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참 이상하지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일은 이 세상에서 가장 깨끗하고 거룩한 일인 것 같은데, 그 제사를 드리는 일을 통해서 거룩한 제사장이 부정해질 뿐만 아니라 제물을 태운 후에 그 재를 처리하는 사람도 부정해 진다고 말씀하시고 계시니 말입니다. 


그러나, 실은 바로 그것이 제사장이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가 출애굽기를 함께 묵상할 때도 살펴 보았지만 부정함은 항상 죽음이나 죽음을 뜻하는 것과 접촉하는 일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제사, 특히 동물을 제물로 드리는 제사는 필연적으로 동물의 죽음을 전제로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죽음에 제사장은 직접 간여하게 됩니다. 살아있는 짐승을 죽이는 것도 제사장이고 또 그 제물을 만지는 것도 제사장입니다. 그러니 죽음과 접촉하게 되지요. 그래서 부정해 지는 것이구요. 그것은 나중에 제물을 태운 재를 치우는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람도 죽음의 흔적과 접촉하게 되고 그래서 부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부정해진 사람은 그 기간이 아무리 짧다고 해도 그 기간 동안에는 하나님께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제사장도 예외가 아닙니다. 


백성들도 그렇게 레위인들도 그렇고 심지어는 제사장들까지도 더럽혀지고 부정해 지는 것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다 죄인이면서 동시에 죄와 죽음이 있는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예외 없이 하나님의 용서해 주시고 다시 정결케 하시며 다시 받아주시는 은혜가 없다면 절대로 하나님 앞으로 다시 나아갈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사람들, 특히 교회 안에서 성도들 서로가 무언가 더 큰 힘과 권위를 소유하고 또 그것을 인정받기 위해서 서로 눈치를 보고 갈등하며 때로는 다투고 있는 것이 얼마나 우습고 어리석은 일인지 모릅니다. 그래 봤자 다들 죄인이고 항상 자신을 더럽히는 사람들인데 말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이셨지만 자신의 거룩함을 주장하며, 그것을 내세우며 더 높아져서 자신을 내세우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대신 우리를 위한 대제사장이 되셔서 스스로의 목숨을 제물로 내놓으셨고 또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그렇게 죽음에 접촉하여 더럽혀 지는 정도가 아니라 아얘 스스로 죽음이 되셨습니다. 우리 대신 형벌을 받으시고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를 전부 받아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깨끗함을 얻었고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이 은혜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성도가 여전히 높은 곳을 탐내고 힘을 좋아하며 남보다 나를 내세우려는 마음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살아간다면 과연 그 사람이 십자가의 은혜를 아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항상 내가 스스로를 부정하게 할 수 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과 예수님께서 영원한 대제사장 되셔서 내 죄의 형벌을 감당하셨기 때문에 오늘도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은혜로 내 속에 있는 탐욕과 교만을 다스려 가시기 바랍니다. 그럼으로써 부족하지만 계속해서 거룩한 순종의 길을 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