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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오후

2015.03.29. 전교인 기도회 - 여호와께서 도우시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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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이사야 50장 4-9절




오늘은 종려주일인 동시에 3월달 전교인 기도회의 날이기도 합니다. 올해는 부활절이 다른 해보다 몇 주 앞에 있어서 두 날이 이렇게 겹쳤지만 이렇게 수난주간이 시작되는 오늘 이렇게 함께 우리 주님에 관한 말씀을 함께 묵상하며 기도로 수난주간을 시작하는 것 또한 의미가 깊은 일인 듯합니다. 우리 주님의 부활이 영광스러운 이유는 주님의 부활 이전에 주님의 수난과 십자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수난과 십자가는 주님께서 우리들을 위해서 감당하신 것인 동시에 하나님께는 가장 온전한 순종과 헌신이 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우리의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 되셨고,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시기에 충분한 영광을 얻으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이미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당연히 모든 피조물의 찬양과 하나님과 같은 영광을 받으시기에 충분하신 분이셨지만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렇게 하나님께 순종하심으로써 우리는 예수님을 무한한 감사와 기쁨으로 찬양할 수 있게 되었고, 하나님도 더욱 더 기쁘게 예수님의 이름을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이 되도록 높여주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그렇게 영광스러울 수 있는 이유는 예수님의 죽음이 죄인들을 대신한 사랑의 죽음이었고,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순종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흔히 ‘종의 노래’라고 불리는 말씀의 일부분입니다. 종의 노래는 이사야의 노래 속에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가 담겨있는 그런 모양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종의 노래는 좋은 상황에서 부르는 노래가 아닙니다. 고통을 눈 앞에 두고서, 고난을 당하는 가운데 부른 노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종은 이런 고통과 고난 앞에서 그것을 수치나 굴욕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자신의 고통과 고난이 절대로 자신의 죄와 허물 때문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의 유익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당하는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고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종은 노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고난에는 분명히 징계나 형벌의 의미도 있습니다. 우리의 잘못이나 허물 때문에 고난과 고통을 당하면 그것은 징계나 형벌이지요. 이런 경우에 우리는 부끄러워 하고 겸손해져야 합니다. 그러나, 고난에는 그런 고난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전혀 이유를 알 수 없이 당하는, 우리를 연단하기 위해서 주시는 고난도 있고, 또 이사야서에 나오는 하나님의 종처럼 하나님 앞에서 바르고 온전한 길을 하려고 하기 때문에 당하는 고난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 우리는 절대로 기가 죽거나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한국 교회에는 병이 걸리거나 혹은 어려움이 생기면 무조건 그것을 부끄러워 하고 숨기려 하는 잘못된 사고방식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복에 대한 생각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복이라고 부르려면 무조건 좋은 것이어야 하고 나머지 모든 좋지 못한 것들은 다 벌이나 저주라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는 이게 정반대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당하는 고난은 오히려 영광입니다. 반대로 죄를 짓고 바르지 않은 길을 가면서 누리는 영광은 오히려 하나님의 징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종이 고난 중에도 노래를 부를 수 있었던 이유, 그리고 고통 중에서도 커다란 영적인 유익을 누릴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의 종은 자신이 당하는 고난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종처럼 믿음의 순례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병은 절대로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고난과 고통 자체가 수치가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자랑스러운 것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러한 고난과 고통들이 과연 어떤 유익이 되고 은혜를 주는지 그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은 본문을 통해 그런 것들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종은 자신의 고난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의로운 고난 중에서 하나님의 종이 얻은 첫번째 유익은 학자들의 혀를 얻은 것입니다. 여기 나오는 학자는 오늘의 학자와는 다릅니다. 오늘날 학자들은 자기가 연구하는 분야에 대한 지식이 많은 사람들을 말하지만, 옛날 학자들은 오히려 현자들에 가깝습니다. 그러니까 세상과 인생의 이치를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더 깊이있게 그리고 본절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이 학자들이었고 그래서 이 사람들은 다른 이들을 위한 훌륭한 상담자가 되어주곤 했습니다. 


하나님의 종은 고난 중에 학자들의 혀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 입술에 자신처럼 고통당하고 고난당하는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고 치료가 되며, 능력이 될 수 있는 말들이 담겨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종이 스스로 고통과 고난을 당해 보았기 때문에 생겨난 특별한 능력이었습니다. 


히브리서 4장 15절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우리가 고통과 고난 중에 예수님께로 나아가 우리의 어려움을 토로하며, 그 분으로부터 온전한 위로와 도움과 교훈을 기대할 수 있는 이유는 예수님이 우리의 연약함을 충분히 그리고 온전하게 공감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상황 속에서 우리들처럼 시험을 당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시면서도 죄를 짓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분께는 우리의 아픔과 연약함을 완전히 이해하는 지식이 있으신 동시에 우리 상황에 대한 해답도 있으시니 때에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해서 그 분께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당하는 성도가 얻게 되는 유익입니다. 그는 주님처럼 학자의 혀를 얻게 됩니다.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자신과 같은 어려움 속에 있는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지혜롭고 참된 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말은 듣는 이에게 답이 되고, 능력이 되며, 치료제가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종에게, 그리고 하나님의 종처럼 고난당하고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런 은사가 주어지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사야서 50장 4절 후반부로 가 보겠습니다.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참되게 고통 당하며 그 고난을 감수하려는 사람들이 얻는 유익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듣는 귀가 굉장히 예민해 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는 의롭게 고난당하는 사람들에게 특별한 은혜를 주십니다. 그 은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듣고 이해할 수 있는 예민한 귀를 주시고, 그 귀를 통해서 매순간순간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 주시는 은혜입니다. 


고난 중에 있는 사람이 누리는 유익은 그 사람이 자주 자주 하나님께 나아갈 수 밖에 없게 만드는 그 사람의 고난 자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고난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께 귀를 기울일 때, 고난으로 예민해진 영혼의 귀를 통해 가장 생생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씀이 성도들의 입에 담겨져 고통 당하고 고난 당하는 사람들에게 들려지게 될 때, 그 말들은 학자의 혀, 현자의 입에서 나오는 가장 지혜롭고 실제적이며 치유가 되는 그런 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종은 이렇게 매일 아침 하나님께서 새롭게 깨워주시는 귀로 생생하게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기 때문에 그 스스로도 굉장한 힘과 용기를 지닐 수 있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여셨으므로 내가 거역하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해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 그가 당한 고난과 고통은 작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정말 참기 힘든 고통과 모욕이 함께 주어지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거나 뒤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아침마다 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이미 그는 자신이 당하는 고난의 의미를 알고 있었고,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통과 고난 자체는 우리를 흔들 수 있고 약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으로 인해 생겨난 예민한 귀를 하나님께 기울이는 사람들은 오히려 그것 때문에 더욱 더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알게 되고, 그래서 더욱 더 든든한 확신 가운데 거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종은 계속해서 말합니다.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내 얼굴을 부싯돌같이 굳게 하였으므로 구치를 당하지 아니할 줄 아노라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가 누구냐 나와 함께 설지어다 나의 대적이 누구냐 내게 가까이 나아올지어다 보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 자 누구냐 보라 그들은 다 옷과 같이 헤어지며 좀이 그들을 먹으리라” 6절에서 7절로 넘어가면서 하나님의 종이 부르는 노래가 현재를 노래하는 것에서 미래를 노래하는 내용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종은 현재의 고난 중에서 하나님께서 그 고난을 통해서 직접 귀를 여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 주시는 깊은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거나 뒤로 물러서지 않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 고통과 고난에 대해서 부끄러워 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그의 경험은 이제 미래를 향한 그의 확신과 믿음으로, 그리고 담대함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종은 담대하게 선포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도우시므로! 하나님이 나를 도우시므로!” 하나님의 종은 과거에 하나님이 그러셨고 지금도 그렇게 하시듯이 앞으로도 하나님께서 자신이 고난 받을 때, 자신을 도와주실 것을 확신합니다. 그리고 그 도움덕분에 부끄러워 하지도 비굴해지지도 않을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과거에도 자신을 의롭다고 하시며 편 들어 주신 하나님이 나중에도 동일하게 자신을 의롭다고 해 주실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오히려 그렇게 자신에게 고통을 줄 자신의 대적들을 향해 담대하게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가 누구냐? 나의 대적이 누구냐? 내게 가까이 나아올지어다.”하고 외칩니다.


이것이 하나님 안에서 참되게 고난받는 성도들만이 누릴 수 있는 진짜 유익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또 다른 이들을 위해서 고통과 손해를 감수해 본 사람들은 그 때면 어김 없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도와주시고 또 편들어 주실 것을 확실히 압니다. 그리고, 그 도움이 있다면 그 어떤 것도 자신을 무너뜨릴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마지막에 이기는 것은 그렇게 하나님께서 편들어 주시는 자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사람들이 고통과 고난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그것이 주는 아픔과 손해 때문만이 아닙니다. 그 아픔과 손해 때문에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그리고 존재가 무너져 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영혼은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그 첫번째 단계인 고난과 고통을 두려워하며 피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싸움도 없지만 승리도, 영광도 없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구요. 그러나, 언제나 하나님께서 도우실 것을 알고, 하나님께서 편들어 주실 것을 확신하는 영혼은 고난과 고통을 다른 눈으로 볼 줄 알며, 다른 반응을 내놓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도우심과 편들어 주심으로 자신이 승리할 것을 알기 때문에, 그것 때문에 자신이 무너지지 않을 것을 확신하고 있기 때문에 믿음에서 나오는 신앙적인 반응을 내놓습니다. 고난 때문에 부끄러워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맞설 수 있게 되며 결국에는 그 믿음대로 승리하게 됩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은 아주 독특한 신앙입니다. 예수님의 승리와 영광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까지도 기념하는 것이 우리들의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기념하는 이유는 그것을 생각하면서 마음 아파하고 우리 스스로를 자책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 분의 고난과 죽음 덕분에 우리가 새 생명을 얻었을 뿐 아니라, 그 분의 고난과 죽음을 닮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든든한 위로와 확실한 승리의 약속이 주어져 있기 때문에 그것을 기억하며 다시 한 번 우리의 영혼을 든든히 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 분의 고난과 죽음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난과 고통이 없는 삶을 원하지만, 사실 그런 삶은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어떤 모양으로건, 어떤 이유로건 우리는 고통과 고난을 당하게 되지요. 이것이 바로 우리의 현실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삶의 현실이 이렇다면 피치 못하게, 혹은 나의 잘못으로 인해 고통과 고난을 받는 것보다는 하나님 때문에, 또한 다른 이들을 위해서 고통과 손해를 감수하는 것이 훨씬 더 고상하고 영광스럽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주님을 닮은 길을 걸어가는 성도들에게는 위에서 살펴본 것과 같은 복된 약속들이 주어져 있다면 그 길은 충분히 갈만한 가치가 있는 길이 아니겠습니까? 


참 고난은 우리의 혀를 능히 사람들을 위로하게 세울 수 있는 학자의 혀가 되게 합니다. 참 고난은 우리의 귀를 예민하게 연단시켜 하나님의 말씀을 생생하게 듣는 학자의 혀가 되게 합니다. 그래서 참 고난은 우리가 고난 때문에 하나님이 뜻을 거역하거나 뒤로 물러서지 않게 만들어 줍니다. 부끄러워 하거나 비굴해지지 않고 당당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리고 참 고난은 하나님의 실제적이고 능력있는 도우심을 생생하게 경험하게 해 주고, 하나님께서 나를 향해 의롭다 해 주시는 음성을 듣게 해 줍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참 고난은 우리 승리에 대한 믿음을 더욱 더 단단하게 만들어 줍니다. 


 이 모든 복과 은혜는 모두가 다 하나님과 다른 이들 때문에 크고 작은 손해와 고통을 감수하는 하나님의 종들의 몫입니다. 우리 주님의 고난을 기념하는 이 주간, 고통과 고난을 바라보는 우리 생각에 잘못된 것과 오해는 없었는지 돌아보시고, 거룩하고 참되게 고난받는 길, 그러나 참으로 영광스럽고 복된 길을 향해 한 걸음이라도 더 가까이 가겠다는 결단을 내려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의 비밀을 알게 하시는 귀한 은혜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영광과 은혜의 이유가 되는 크고 작은 손해와 고난을 마다하지 않게 하소서. 

2. 고난의 때에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은혜를 놓치지 않게 하소서. 주님의 말씀을 듣게 하시고 귀가 열리게 해 주시옵소서. 그 때 편들어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