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5.04.01. 새벽기도회 - 향유를 허비하는가(2015 고난주간)



20150401D.mp3.zip





본   문 : 마가복음 14장 1-11절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신 후, 유대교 지도자들의 예수님에 대한 분노와 질투는 더욱 더 커져만 갔습니다. 이제 그들의 관심은 어떻게 예수님을 죽일까 하는 것에만 고정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이틀만 지나면 자기들이 애굽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가장 크고 중요한 절기를 눈 앞에 두고 있으면서도 그저 예수님을 언제 어떤 방식으로 죽일까 하는 일만 의논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예수님께서는 베다니에 있는 나병환자 시몬의 집으로 가셨습니다. 물론 그 때는 나병환자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완전히 고쳐주신 지 이미 오래되었으니까요. 예수님께서 그렇게 중요한 시기에 시몬의 집을 찾아간 것은 그 곳이야 말로 예수님께서 가장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몬의 집에서 많은 사람들고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한 여인이 갑자기 그 집으로 들어와서는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품에 안고 있던 향유 병의 입구를 깨뜨려 그것을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그 행동은 당시로서는 상식을 깨뜨리는 파격적인 행동이었고 그래서 그것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을 당황스럽게 만들기에 충분했지만, 사람들은 그 여인의 행동이 가지고 있는 파격적인 성격 때문에 그 여인을 나무란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이유로 그 여인을 나무랐습니다. 


사람들은 그 향유가 얼마나 비싼 것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당시 기준으로 하면 일용직 노동자의 일년 품삯 이상의 값어치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값진 향유를 그것도 한 병 전부를 그저 예수님의 머리 한 번 적시는 일에 사용했으니 그들이 보기에는 그것이 낭비도 이만 저만한 낭비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향유를 이렇게 함부로 낭비했기 때문에 화가 났지만, 그 중에 더러는 조금 더 고상한 이유 때문에 화가 나서 여인을 비난했습니다. 그렇게 할 바에는 그 향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 주는 것이 훨씬 더 낫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그 이야기를 하면서 여인을 꾸짖었습니다. 사람들이 갑자기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물질적으로 돕는 일을 굉장히 가치있게 평가했고 게다가 유월절같은 명절이면 그렇게 하는 풍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사람들의 생각이 전혀 틀렸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일견 타당성이 있어 보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세상에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과는 다르지만 그것 만큼 그리고 그것보다 훨씬 더 가치있는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게다가 그렇게 여인을 비난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것으로 그렇게 할 계획과 마음이 있으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다면 그들에게는 그렇게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마치 여인이 무슨 큰 죄라도 지은 것처럼 여인을 나무라는 사람들을 향해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물론 여인은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붓지는 않았습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으로부터 커다란 은혜를 받았고, 그래서 예수님을 크게 사랑한 나머지 자신에게 있는 가장 값진 것을 그렇게 예수님께 드렸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예수님께 부어진 향유가 예수님께는 다른 사람들은 전혀 모르는 각별한 의미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 누구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고 그래서 준비해 주려고 생각조차 못했던 예수님의 장례식을 준비해 준 유일한 예식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행동에 이렇게 복을 주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정말 예수님의 말씀대로 되었지요? 적어도 일년에 한 차례 수간주간 동안에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교회 안에서는 이 여인의 이 아름다운 행동이 반복해서 말해지고 또 말해지고 있으며, 누구나 이 여인의 행동을 칭찬하게 되니까요. 


그런데, 이렇게 한 이름모를 여인의 향기롭고 속깊은 헌신이 이루어지는 동안 다른 곳에서는 예수님에 대한 가장 더럽고 쓰라린 배반이 행해지고 있었습니다. 열 두 제자들 중 한 명인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넘겨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함께 예수님을 넘겨줄 방법을 의논했던 것입니다. 그러지 않아도 방법을 찾고 있었던 대제사장의 무리들은 그저 기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다에게 그 댓가를 넉넉하게 지불해 주기로 약속했습니다. 성경은 그 이후의 유다의 모습을 이렇게 그리고 있습니다. “유다가 예수를 어떻게 넘겨 줄까 하고 그 기회를 찾더라” 


여인은 그저 예수님을 향한 사랑을 자기가 가지고 있는 가장 값진 것이었던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드리는 일로 표현했습니다. 그것은 그 여인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무한한 가치를 지닌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300데나리온을 그 머리를 한 번 향기롭고 빛나게 해 드리는 일에 사용해도 부족하게 여겨지는 그렇게 가치있는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인에게 있어서 그런 행동은 전혀 계산되지 않은 행동이었습니다. 아니, 계산할  필요도 없는, 계산을 넘어선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의 그런 마음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해 준 것이라고 하셨지만, 사실 그것은 예수님을 온 세상의 왕으로 세워준 일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십자가가 곧 죽음의 장소이자 보좌이기도 했고, 또 머리에 기름을 붓는 것은 왕이 되는 것을 의미했으니까요. 


그러나, 그 여인을 나무란 다른 사람들, 그리고 가룟 유다는 달랐습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이 별로 가치가 없는 분이셨습니다. 머리에 그 비싼 향유를 부어드릴만큼 존귀한 분이 아니었고, 또 팔어넘기는 댓가로 돈을 받아도 괜찮을 만큼 가치가 없는 분이셨습니다. 시몬의 집에 있었던 사람들이나 가룟 유다나 그런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가장 가치있는 분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보다 더 가치있는 것을 생각했고, 더 가치있는 것을 앞세웠습니다. 그래서 여인을 나무랐고 또 예수님을 팔아 넘길 수 있었습니다. 이들에게 예수님은 전혀 가치가 없지는 않지만 스스로 가치있다고 생각하는 다른 것들과 비교해서 그 가치를 계산할 수 있는 분에 불과했고, 그 계산에 따라 움직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에 나오는 여인과 다른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이 언제 참된 신앙이 되는지를 배우게 됩니다. 여인과 다른 사람들의 근본적인 차이는 예수님과 다른 것을 비교하는 계산을 했느냐 하지 않았느냐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상적이고 이론적으로 들리실지도 모르지만 우리의 참된 신앙이 시작되는 지점은 우리가 예수님을 생각할 때, 그 어떤 계산도 하지 않게 되는 그 지점이 아닌가 합니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의 가치를 계산하는 일 자체가 이미 예수님보다 다른 것들을 더 가치있게 생각할 수 있는 위험성을 지니고 있고, 그 위험성은 많은 경우 현실이 되니까요. 또한 참 신앙이 예수님을 생각할 때 전혀 계산이라는 것을 하지 않는 지점에서 시작되는 이유는 예수님은 우리의 이성이 그 가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무한히 가치로운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우리는 그렇게 가치로운 분이 그렇게 값진 당신의 생명을 이렇게 무가치한 죄인인 우리들을 위해서 내어주신 분이라는 것을 잘 알고, 그 은혜 안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인의 행동이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하는 향기로운 행동이 되었고, 예수님을 왕으로 기름부어드리는 영광스러운 행동이 되었던 것, 예수님께서 그 여인의 행동을 그렇게 값지게 받아주신 것은 향유병을 깨뜨려 그 값진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드리는 그 여인의 행동 안에는 그 어떤 계산도 포함되어 있지 않는, 예수님을 향한 순수한 사랑과 감사만 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무한히 값진 당신의 생명을 무가치한 죄인들을 위해서 내어주기 위해 십자가를 향해 가셨던 고난 주간에 나는 과연 그런 예수님께 얼마만큼의 가치를 두고 있는지 되돌아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정말 예수님을 이 세상 최고의 가치로, 계산이 필요 없고 감히 다른 것과 비교하며 계산하려고 들지도 않는 그런 참 신앙의 사람들이 되어져 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