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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5.04.05. 주일오전 - 네가 이것을 믿느냐(2015년 부활절)


20150405SM.mp3.zip





본문 : 요한복음 11장 17-27절



 

모든 사람이 정말로 극복하고 싶어하면서도 전혀 그렇게 할 수 없어서 가장 두려워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죽음입니다. 사람들은 정말로 많은 두려움에 시달리고 있지만 실제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두려움은 이 죽음으로부터 나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건강에 대한 염려, 실패에 대한 걱정, 그리고 먹고 사는 일에 대한 걱정, 경쟁에 뒤쳐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모두가 다 다른 것 같지만 길이 들어가 보면 이 모든 두려움은 모두가 다 죽음이 주는 두려움의 다른 얼굴들이고 그 얼굴들 속에서 얼핏 얼핏 보이는 크고 작은 죽음의 험상굳은 표정들은 항상 사람들을 위협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두려움으로 얼어붙게 됩니다. 그래서, 그런 두려움이 엄습해 올 때마다 사람들은 그 두려움을 해결해 보려고 건강에 투자하고 성공을 위해 기를 씁니다. 더 많은 재물을 쌓으려 애쓰기도 하고 능력과 스펙을 쌓으려고 애쓰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그렇게 우리에게 찾아온 것처럼 또 다시 언제든지 우리를 떠날 수 있는 불안한 것들일 뿐만 아니라 실제로 죽음의 문제는 절대로 그런 것들로는 해결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죽음의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는 우리 영혼은 결코 참된 안식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째 되는 날 베다니에 도착하셨습니다. 원래는 이틀 전에 충분히 거기 도착하실 수 있었지만, 계시던 곳에서 이틀을 더 머물러 계시다가 출발했기 때문에 결국 이틀이 더 지난 후, 그러니까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째 되는 날 베다니에 도착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그렇게 급한 소식을 듣고도 계시던 곳에서 이틀이나 더 머무르셨을까요? 여러분이 이상하게 여기실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나사로를 완전히 죽은 사람으로 만들고, 모든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변경할 수 없는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게 하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죽은 지 나흘이면 모든 사람에게 나사로는 완전히 죽은 사람입니다. 유대 땅의 기후에서는 죽은 지 나흘이면 이미 무덤 속에서 시신이 부패되어 그 악취가 새어나오기 시작한 이후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구를 막론하고 죽은 지 나흘쯤 지나면 사람들에게 그 사람은 완전히 죽은 사람으로 받아들여지게 됩니다. 주님은 그 시기를 맞추기 위해서 일부러 계시던 곳에서 이틀을 더 머무르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도착하셨을 때, 그곳은 아직도 초상집 분위기였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물론이고 예루살렘에 있는 친지들까지 나사로의 부고를 듣고 달려와서 위로하며 함께 슬퍼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도착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나와서 예수님을 맞이한 사람은 마르다였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마르다는 불평과 원망부터 늘어 놓습니다. 예수님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그리고 죽기 전에 오셨더라면 오빠가 죽지 않을 수 있었는데, 여기 계시지도 않고 또 빨리 오지도 않으셔서 오빠가 죽어 버렸다고 말입니다. 아마 분위기로 봐서 마르다는 눈물이 마르도록 통곡을 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너무나 담담하게 마르다에게 그저 오빠가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이라는 말씀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당장 내가 너희 오빠를 다시 살릴 것이라고 말씀하셨지만, 마르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그렇게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을 마지막 날에 있을 부활을 의미하는 말씀으로만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퉁명스럽게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네 오빠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시기 전 마르다는 “그러나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마르다는 분명히 ‘무엇이든’이라고 말했습니다. “무엇이든”이라는 말이 무슨 뜻이지요? 그것은 그 어떤 일도 예외됨이 없는 모든 일을 말합니다. 말만 들으면 완벽한 믿음의 고백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마르다가 생각하는 모든 일 속에는 죽은 오빠가 살아나는 일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마르다는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모두가 다 하나님을 전능하신 분으로 믿고 고백합니다. 하나님께 불가능한 일은 없다고 생각하지요. 그러나, 똑같은 말을 한다고 해서 그 말이 전부다 같은 의미로 사용하지는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정말로 글자 그대로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그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전능하심도 자신의 생각의 틀 속에 넣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그저 자신이 가능하다고 믿는 것의 범위 안으로 한정되게 됩니다.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구하면 모든 것을 주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죽은 오빠가 다시 살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이라고 하더라도 죽음의 문제는 어쩔 수 없다고, 사람이 정말로 어쩔 수 없는 일은 하나님에게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믿음이 온전한 믿음이 되려면 우리가 우리 믿음에 대해서 사용하는 말이 정말로 우리의 믿음을 표현하는 말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 믿음은 정말로 능력있는 믿음이 됩니다. 그러나, 믿음을 표현하는 말과 그 말로 표현되는 믿음의 진짜 모습이 거리가 멀면 멀수록 그 사람의 믿음은 그 사람에게 실제적인 능력이 되기는 어렵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 그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 별다른 능력이 되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죽음에 묶여 있는 마르다에게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설명해 주실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정말 놀랍고 영광스러운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냥 나도 부활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부활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내가 생명을 줄 것이라고 말씀하지시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항상 부활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항상 생명이십니다. 과거에도 부활이셨고 지금도 부활이시며 장래에도 부활이십니다. 과거에도 생명이었고 지금도 생명이시며 장래에도 부활이십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이 가장 확실하게 붙들어야 할 진리 중 하나입니다. 예수님이 부활이시라는 것, 그리고 예수님이 생명이시라는 것을 정말로 믿는다면, 그 성도는 이미 부활 안에 그리고 생명 안에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과 영생은 나중에 죽은 이후에만 경험할 수 있는 막연한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경험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예수 안에 있을 때에만 누릴 수 있는 은혜이며 능력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그렇기 때문에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 속에서 죽음은 분명히 육체의 죽음을 뜻합니다. 그래서 살겠다는 말씀은 그 죽은 사람이 다시 생명을 얻게 된다는 뜻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사람이 예수를 믿다가 죽는다면 그 사람은 다시 생명을 얻어 부활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것을 정말로 믿습니까? 내가 부활이신 예수님을 믿고 그 분 안에 거하기 때문에 나는 죽어도 다시 살게 될 것을 흔들림 없이 확신하고 있습니까? 영원하고 영광스러운 몸, 지금의 우리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아름답고 찬란한 몸으로 다시 살게 될 것을 믿습니까? 이 믿음은 예수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어야 할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믿음입니다. 우리들 중에는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그런 일이 정말로 가능하겠느냐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없으시겠지요? 혹시 그런 분들이 계신다면 우리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이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예수님이 부활이시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이 두 가지 사실을 확실히 믿는다면, 우리는 당연히 우리의 부활도 믿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죽지 아니하리니...” ‘죽어도 살 것이다’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부활이시기 때문에 주신 약속이라면,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생명이시기 때문에 주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정말 그렇습니까? 우리가 살아서 예수를 믿으면 죽지 않습니까? 아니지요? 예수를 믿어도 죽지요? 나이들어 죽기도 하고 병이나 사고 때문에 죽기도 하니까요. 그러니, 예수님의 두 번째 말씀은 단순히 그런 뜻이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우리가 진실로 예수를 믿으면, 그 때부터 우리는 예수님의 생명을 우리 안에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가 예수님의 생명 안에 거하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생명은 그냥 생명이 아닙니다. 다함이 없는 무한한 생명이고 또 끝이 없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부족함이 없는 완전한 생명이기도 하지요. 그래서 우리 안에 그 생명이 있고, 또 우리가 그 생명 안에 거하게 되면 죽음은 잠시잠깐 우리를 붙들 수는 있어도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우리를 삼킬 수는 없습니다. 커다란 물고기가 요나를 삼켰지만 그를 삼일만에 토해내었듯이, 죽음이라는 괴물이 아무리 강한 턱을 가지고 있고, 끝모를 심연같은 내장을 가지고 있더라도 죽음은 결국 그 입을 벌려 우리를 다시 토해낼 수 밖에 없습니다. 죽음은 이미 우리 안에 있고 우리를 품고 있는 생명이신 예수님을, 그리고 그런 예수님의 생명을 절대로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활이란 이 생명, 예수님의 생명이 있다면 반드시 일어나게 되어 있는 일입니다. 결코 죽음이 그 생명을 이길 수 없기 때문에, 죽음이 그 생명을 영원히 억누를 수 없기 때문에, 부활은 믿기 힘든 기적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는 반드시 일어나게 되어 있는 사건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생명이십니까? 그러면 예수님은 부활이실 수 밖에 없습니다. 또 우리 안에 예수님이 생명이 있습니까? 그러면 우리는 부활할 수 밖에 없습니다. 세상에 이것보다 명확한 이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로의 무덤으로 가셨습니다. 거기에는 마리아가 있었고 또 나사로의 친지들이 함께 있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슬퍼하고 있었고, 마리아는 절망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들이 우는 것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비통해 하시고 그 사람들을 불쌍하게 생각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죽음을 슬픔과 절망의 눈으로 바라 볼 때, 그리고 그것을 두려워 하면서 그 두려움에 휘둘리며 살아갈 때, 그것을 슬퍼하시며 그런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진짜로 비통해 하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것은 우리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여전히 그런 두려움 속에서, 그 두려움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모습을 볼 때입니다. 이미 그 안에 예수님의 생명을 가지고 있고, 또 부활의 확실한 약속을 받은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 똑같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을 볼 때, 우리 주님은 가장 비통해 하시고 가장 불쌍하게 생각하십니다.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부활절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일입니다. 왜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고 또 기뻐합니까? 그것은 물론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 우리의 구원과 영생이 든든하고 확고해 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은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부활은 단지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생명이 죽음을 이겼다는 확실한 증거, 죽음은 예수님의 생명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한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죽음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었다는 선언이고 선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믿는 자들의 것이 됩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예수님 안에서 죽음도 억누를 수 없는 생명을 지니게 되고, 그래서 죽음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받게 됩니다. 그렇게 가장 두려워 하면서도 전혀 해결할 방법이 없었던 문제를 완전히 뛰어 넘는 복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며 기뻐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미 죽음을 넘어선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죽음을 향해서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있느냐?’고 도전할 수 있는 사람들이 바로 저와 여러분입니다. 죽음은 더 이상 우리에게는 존재가 소멸되는 것이나 영원한 멸망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칠흙같이 어두운 암흑도 아니고 피할 수 없는 형벌도 아닙니다. 성도에게 죽음은  잠시 동안의 잠을 자는 것에 불과합니다. 무덤 앞에 선 예수님께서는 무덤 안에서 이미 부패해 가고 있는 나사로를 향해서 큰 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나사로야 나오라!” 마치 대낮에 해가 중천에 떴는데도 집안에서 세상 모르고 잠들어 있는 친구를 부르는 것처럼 그렇게 부르십니다. 예수님께 죽은 나사로는 죽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아있는 사람과 똑같이 부르십니다. 그저 일어나 나오라고 말입니다. 부활이신 예수님, 생명이신 예수님에게 죽음과 삶은 전혀 이질적인 다른 것이 아니라 똑같은 것의 다른 모습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부활이신 예수님,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는다면 우리들 또한 우리 자신의 죽음을 주님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물으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죽지 아니하니 네가 이것을 믿느냐?” 여러분은 예수님의 말씀에 무어라 대답하시겠습니까? 우리의 영원한 운명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인생의 모습까지 결정하는 이 결정적인 질문에 여러분은 어떤 대답을 드리겠습니까? 이 질문 앞에 다른 모든 대답들은 아무런 의미도 능력이 없습니다. 오로지 “내가 믿나이다”라는 대답만이 의미있고 능력있는 대답이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미 죽음을 넘어선 사람들입니다. 믿습니까? 그렇다면 죽음과 함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넘어선 것은 너무나 당연하겠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넘어선 죽음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미 말씀드린 대로 그것은 사람이 가장 두려워하는 가장 어둡고 절망적인 현실입니다. 그래서 죽음을 넘어서고 또 죽음의 두려움을 넘어선 성도들은 이미 이 세상을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삶을, 그 삶을 이루고 있는 모든 일들을, 앞으로 자신의 삶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여겨지는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이, 그리고 세상의 현실이 아무리 척박하고 두렵더라도 죽음과는 비교할 수 없으니까요. 


우리 주님은 지금 여기서 부활 ‘이시고’ 지금 여기서 생명 ‘이십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이 부활이고 생명이심을 믿는 우리들 또한 지금 여기서 부활을 살고 생명을 살 수 있습니다. 죽음도 억누를 수 없고 이길 수 없는 예수님의 생명으로 충만한 삶, 이 세상 그 어떤 두려움과 걱정도 함부로 위협하고 넘어뜨릴 수 없는 자유롭고 풍성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나 자신을 넘어서서 이웃과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놀라운 삶을 가능하게 것이 바로 바로 부활을 믿는 믿음만이 가지고 있는 진짜 능력이고 영광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것을 알려 주고 싶으셔서 나사로가 죽은 지 사흘이 지나서야 베다니로 가셨고 거기서 나사로를 불러 일으키셨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 주님 부활하신 것을 기념하고 즐거워 하는 이 날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죽지 아니하니 네가 이것을 믿느냐?”라고 물어오시는 우리 주님께 “아멘, 내가 믿습니다”라고 큰 소리로 대답해 드리시기 바랍니다. 오늘,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께서 부활을 믿는 우리의 믿음을 통해 죽음도 억누르고 이기지 못 하는 참 생명이 충만해 지는 은혜와 능력이 다시 회복되게 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내가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이미 죽음을 이기고 넘어섰음을 확실히 믿게 하소서.
  2. 부활을 믿는 믿음의 참된 능력이 내 속에 충만하게 하소서. 내가 믿는 주님이 부활이고 생명이심을 믿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