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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5.04.16. 새벽예배 - 성경읽기와 묵상(신명기 24-2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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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일 : 2015년 4월 16일 목요일




몇 해 전에 미국 하바드 대학교의 교수인 마이클 샌델이라는 사람이 쓴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우리나라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정의라는 주제가 그 당시 우리나라의 사회 정치적 상황과도 맞물려 있었기 때문이었는데요. 그 때 사람들은 그야 말로 이 땅의 정의는 땅에 떨어져 버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생각만큼 그 책이 우리에게 온전한 해답을 주지는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책은 역사 속에 등장한 정의의 개념과 정의가 추구되어야 할 여러가지 다양하고 복잡한 상황을 이야기해 주면서 결국 정의가 무엇인가 하는 것은 정해진 것이 아니라 선택의 문제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의라는 말을 글자 그대로 풀어보면 바르고 의로운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르고 옳은 것은 정당한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다수의 사람들이 납득할 수 있는 공정하고 공평한 것을 정의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정의와는 많이 다릅니다. 물론 성경이 이런 의미에서의 정의에 무관심하거나 그것을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그 어떤 책보다도 공평 과 정의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이런 것들이 없는 상태로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라고 보는 것이 성경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종류의 정의, 그러니까 그저 공평무사한 정도의 정의는 너무 당연하고 기초적인 것으로 봅니다. 그래서 그만큼 무겁고 중요하게 다루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정의의 전부라고 보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정의는 누군가가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를 그 사람에게 돌리는 것을 정의라고 말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그리고 사람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기초적인 것들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에게 그 사람의 기초적인 필요들을 공급해 주고 나누어 주는 것까지도 정의의 범위 안에 넣어놓고 있습니다. 그리고, 반대로 자기 것을 지킬 수 없는 상황에 있는 사람에게 그것을 지킬 수 있도록 해 주는 것도 정의와 공의의 범위 안에 넣어놓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과 심지어는 성도들까지도 성경에 나오는 율법이나 성경적인 가르침들을 보면서 현실성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저 일반적인 ‘정의’에서 본다면 그런 가르침들을 지키는 것이 오히려 정의를 깨뜨리는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나의 기준이나 사람들의 기준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사람들이 되려고 한다면, 절대로 우리는 세상이 우리에게 주는 공평과 정의에 대한 기준을 우리의 기준으로 삼으면 안됩니다. 그게 틀려서라기 보다는 많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새벽부터 정의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늘어놓는 것은 오늘 함께 읽은 신명기의 말씀들이 실은 거의 모두 공평과 정의에 대한 하나님의 가르침과 요구들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주제에 대한 말씀은 어제 읽었던 23장 15절 이하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 대략 나열하면서 훑어 보겠습니다. 종이 주인을 피해서 다른 성으로 도망쳐 오면 그를 원주인에게 돌려 보내면 안됩니다. 그러면 그 종은 분명히 커다란 고통과 불이익을 당할테니까요. 그리고 데리고 있으면서 압제해도 안됩니다. 그러면 이전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니까요. 배가 고파서 이웃의 포도원이나 밀밭에 들어가서 자신의 배를 채우는 것은 괜찮습니다. 이것이 허용되지 않으면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이 가지는 기본적인 존귀함을 지켜내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아내를 내보낼 때는 반드시 이혼증서를 써 주어서 그 여인이 이전 남편에게는 아무런 의무도 없으며 다른 남자와 재혼해도 된다는 것을 증명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여인의 기본적인 생존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새로 아내를 맞이한 사람은 1년간 징병대상에서 제외 됩니다. 이것은 그 남자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여인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결혼하고 가족을 이룬 지 1년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죽을 지도 모르는 전장으로 내보내는 것은 너무 가혹하니까요. 동족을 유인하여 종으로 팔아 넘기면 안됩니다. 가난한 자에게는 전당물을 잡으면 안됩니다. 특히 옷이나 맷돌 같은 것은 하루의 생활을 위한 생필품이니 더더욱 안됩니다. 혹시 저당을 잡았더라도 그런 것들은 반드시 하루가 지나기 전에 돌려 주어야 합니다. 품삯은 그 날 그 날 지불해야 합니다. 그 품삯을 주지 않으면 그 사람과 가족의 하루동안 굶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죽을 죄를 지으면 나머지 가족은 그것 때문에 불이익을 당해서는 안됩니다. 고아나 과부라고 해서 그런 사람들에게 불리하거나 혹은 유리한 판결을 내려서도 안됩니다. 그것은 사회의 기본적인 정의를 무너뜨리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의 옷은 아얘 저당을 잡아서는 안됩니다. 추수를 할 때, 밭의 곡식이나 과일들을 샅샅이 훑어가면 안됩니다. 절대로 두 번 살펴보아서는 안됩니다. 일부러 적당히 거두어서 가난한 사람들의 몫으로 남겨 주어야 합니다. 재판장은 공정하게 재판해야 하며, 태형을 줄 때는 절대로 40대를 넘기면 안됩니다. 너무 심한 체벌은 때리는 사람이 맞는 사람을 같은 인격체로 존중하려는 마음을 잃어버리게 만들기 때문이고, 맞는 사람으로 하여금 심한 모멸감을 느끼게 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곡식을 떨 때, 가축들의 입에 망을 씌워서도 안됩니다. 가축들을 굶겨가며 일시키는 것은 공의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동생이 형의 아내를 아내로 맞이해야 하는 이유도 같습니다. 그렇게 해야 한 집안의 재산이 다른 집안으로 넘어가지 않고, 하나님께서 각각의 지파와 집안에게 나눠주신 대로 남아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추와 되는 공정한 것 하나만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기준을 흐리게 만들어서 특정한 사람들만이 이익을 보도록 해서는 안됩니다. 25장 마지막에는 아말렉을 반드시 진멸해야 한다는 말씀도 나오는데, 이것 또한 가만히 살펴보면 그렇게 하기는 것이 공의를 지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전에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향해 여행할 때, 행로에 지쳐 뒤쳐진 약한 사람들을 치는 아주 비열한 행동을 했기 때문입니다. 


대략 살펴 보았는데요. 가만히 살펴 보시면 이 율법들 속에 가진 사람들이나 힘있는 사람들을 위한 것들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런 사람들은 이미 가진 것으로 충분하고 이미 있는 힘으로 충분히 자신을 지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가난하고 힘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그 정도 양보하고 나눠 주어도 전혀 살아가는데 지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공평이고 정의입니다. 물론 우리가 흔히 말하는 법적인 정의는 반드시 지켜져야 합니다. 법을 어기면서까지 약한 자들의 편을 들어주는 것은 온당치 않습니다. 그러나, 약한 사람들, 스스로를 챙길 충분한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최소한으로 생활을 하고,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존귀함을 지킬 수 있도록 조력자가 되어주고 공급자가 되어주는 것은 뭔가 특별한 일을 하며 자선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같은 사람으로서 당연한 것입니다. 마땅히 해야할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공의이며, 또한 그렇게 하면서 사는 것이 정의롭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운 분이십니다. 그 누구보다도 정의와 공평을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칼날같은 정의를 적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정의를 적용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감당해야 할 죄의 형벌을 자신의 아들에게 온전히 감당시키시고 그 대신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그 형벌을 감당해 낼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그 형벌을 감당하심으로써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성품을 지키시고 우리에게는 구원이라는 불가능한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바로 우리가 이런 은혜를 흉내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위해서 작은 짐들을 져 줌으로써 모두가 유익을 얻는 삶, 약한 자들을 세우는 삶을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정의와 공평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 안에 들어있는 엄청난 사랑을 맛보아 아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정의는 온전한 정의가 아니라 많이 부족한 정의입니다. 이제 하나님을 따라,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따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부족한 정의가 아니라 넉넉한 공의를 베풀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 이 세상을 조금이라도 풍요롭고 넉넉하게 하는, 이 세상에 하나님의 뜻이 펼쳐지게 하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