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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5.04.22. 새벽예배 - 성경읽기와 묵상(신명기 3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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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일 : 2015년 4월 22일 수요일




우리는 성경에서 이렇게 저렇게 하면 복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볼 때마다   복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면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을 주십니다. 그런데, 이것을 오해하면 안됩니다. 우선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우리에게 주시는 복은 그 순종에 대한 보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피조물,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의무이니까요. 우리 나라에서 나라 법을 지킨다고 해서 상을 주지는 않듯이 원래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한다고 해서 그게 우리의 공로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종하는 백성들에게 복을 주십니까? 그것은 우리 하나님이 선하고 자비로우신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단지 그 이유 때문입니다. 다른 이유는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복 받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은 엄밀하게 말하면 옳은 것이 아닙니다. 그게 고착되면 그것이 바로 기복주의가 됩니다. 샤머니즘이 되고 이방종교가 됩니다. 둘째, 조금 넓게 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우리가 복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만이 복된 삶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한 나라가 정상적이고 상식적인 나라일 때, 그 나라의 법은 그 나라 국민이 조화롭고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한 기초가 됩니다. 그래서 만약 국민들이 그 법을 무시하면 그들 자신이 행복하고 평안하게 살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똑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 세상과 우리 모두를 만드시고 살게하시는 분의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당연히 그 세상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가장 행복하고 조화롭고 복된 삶을 살아가려면 반드시 순종해야 할 하나 밖에 없는 존재와 삶의 방법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반대로 생각하면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거기 맞춰 살아가려고 애쓰지 않는 사람들은 절대로 진짜 복이 무엇인지 알 수 없고, 그런 복을 누리지 못합니다. 개인 뿐만이 아니라 세상 전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오히려 그런 방향으로 가는 개인과 사회는 그 방향으로 열심히 가려고 하면 할수록 더 스스로를 망가뜨리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굳이 적극적으로 벌을 주시고 징계를 내리지 않으셔도 온갖 어려움과 불안함, 그리고 불행의 이유가 가득한 사회로 변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이론이 아닙니다. 실제로 우리가 매일의 삶에서 경험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사회가 왜 이렇게 사람들이 살기 힘들어 하며 만족하지 못하며 마음이 불편한 곳이 되었습니까? 그 누구 할 것 없이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가치와 원칙을 지키지 않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인간의 생각과 심성 속에 심어놓으신 기초적인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살아가니  모두가 다 불행하고 불안한 그런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은 여호수아가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도자로 선택되는 이야기와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지도력을 물려주기 전에 마지막으로 해야할 일들에 대한 하나님의 당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참 마음 아픈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는 네 조상과 함께 누우려니와 이 백성은 그 땅으로 들어가 음란히 그 땅의 이방신들을 따르며 일어날 것이며 나를 버리고 내가 그들과 맺은 언약을 어길 것이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그 땅을 차지하게 되면 그 마음을 바꿔서 하나님이 아닌 이방신들을 섬기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리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 거기서 살게 해 주실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그렇게 가볍게 생각하고 무시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약속에 신실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읽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혹시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를 보시면서 그런 생각을 하고 계신 것은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우리의 미래에 하나님과의 언약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 것인지, 또 그 언약에 얼마나 신실할 것인지를 잘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께서 이미 보고 계시는 우리의 장래가 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말씀과 같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러시듯이 우리들 또한 계속해서 신실할 것이라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해서 이미 알고 계신 우리의 미래였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신실함이 완전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미래가 하나님께서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이스라엘의 미래처럼 되지 않도록 애쓰고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스라엘 백성들은, 물론 광야에서도 그랬지만, 약속의 땅에 들어간 다음에도 반역과 불순종의 삶을 살게 되었을까요? 우리는 그 이유를 20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인 후에 그들이 먹어 배부르고 살찌면 돌이켜 다른 신을 섬기며 나를 멸시하여 내 언약을 어기리니...”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역과 불순종의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면 거기서 먹고 배부르고 살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의 선물로 주시는 엄청난 복들 때문입니다. 물론 이렇게 되는 것이 복 자체 때문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 복을 받은 이후, 그 복에 익숙해진 이후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에 생겨나게될 변화였습니다. 그 이전에 광야를 떠돌 때, 아직 전쟁을 앞두고 있을 때, 그리고 양식을 쌓아두고 있지 못할 때는 내일이 불안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자기 힘으로는 그 문제를 해결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그래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려고 애썼습니다. 그런데, 이제 가나안 땅에 들어가니 사정이 바뀝니다. 이제 더 이상 불안하게 살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는 양식을 쌓아놓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굳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아도 충분히 평안하고 넉넉하게 살 수 있습니다. 앞으로의 걱정도 크게 할 필요가 없구요. 그러니 마음이 변합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은혜를 향한 간절한 마음이 희미해 지고, 이제 하나님을 섬기는 어찌보면 까다로운 삶이 싫어집니다. 그 대신 죄를 지어도 문제 삼지 않고, 욕심을 부려도 상관하지 않는 이방신들이 더 좋아집니다. 그래서 결국 그 이방신들을 섬기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오히려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 때문에 하나님과 하나님 안에서만 계속 이어져 갈 수 있는 복된 삶의 길을 떠나게 됩니다. 


우리의 삶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런 삶의 모습을 닮아가지 않으려면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또 하나님께 순종하는 이유가 궁극적으로는 이방인들이 자기 신을 섬기는 이유와는 완전히 달라져야 합니다. 더 이상 ‘무엇 때문에’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로 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앙은 언젠가 탈선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가 사라지거나 해결되면 더 이상 하나님을 의지하고 순종해야 할 이유가 사라지게 되어 하나님 대신 자신을 배부르게 하고 등따숩게 해 주는 것들을 섬기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우리들은 필요에 따라 움직이는 것을 완전히 초월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신앙을 위한 좋은 자극제로 사용해야지 그것이 신앙의 이유가 되게 해서는 안됩니다. 다른 것이 아니라 그게 결국 기복주의고 그게 우상숭배가 되니까요.


오늘 아침에는 비록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주셨기 때문에 시작되었고, 또 우리가 무엇이 필요했기 때문에 이어져 온 점이 있었더라도 이제는 이것을 넘어 가겠다고, 이제는 그저 하나님이 좋아서, 하나님을 사랑해서, 하나님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그런 삶을 살겠다고 새롭게 헌신하시고 다짐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아침 우리 마음 속에 주님의 율법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더욱 더 사랑하게 해 주시는 마음의 은혜를 부어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