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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5.05.27. 새벽예배 - 성경읽기와 묵상(사사기 10-1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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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일 : 2015년 5월 27일 수요일




아비멜렉의 통치가 그렇게 허무하게 끝난 후, 두 사람의 사사가 세워졌습니다. 돌라와 야일이었는데요. 삼갈의 경우와 같이 이 두 사람에 대한 기록 또한 굉장히 짧게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실 이 두 사람에 대한 기록은 그 내용면에서는 굉장히 대조적입니다. 돌라에 대해서는 그저 그가 어느 가문 출신이며 몇 년을 사사로 일했다는 기록 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야일은 다스린 기간은 거의 같지만 성경은 그의 자녀들에 대해서 ‘아들 삽 십 명이 있어 어린 나귀를 탔고 성읍 삽 십 명을 가졌다’고 말합니다. 그 당시 나귀는 귀족이나 왕들이 타는 짐승이었는데요. 요즘으로 말하면 그는 자기 아들들에게 최고급 벤츠 승용차를 한 대씩 주고 모두에게 작은 도시 하나씩을 쥐어 준 셈입니다. 사람들은 이 둘 중에서 누구에게 더 매력을 느끼나요? 돌라보다는 야일일 거라 생각됩니다. 돌라보다는 야일이 아무래도 더 성공적인 인생을 산 듯이 보이니까요. 그렇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어떨까요? 또 그 가족들을 제외한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는 어떨까요? 또 힘이나 재산이 아니라 가치 면에서 본다면 어떨까요? 둘 중의 누가 더 나은 삶을 살아간 것일까요? 그래도 야일이 돌라보다 더 훌륭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제가 어제 반기문 총장이 미국의 명문대학인 조지타운 대학교에 가서 연설한 동영상의 일부를 보았습니다. 그 분이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역사는 한 사람의 인생을 통장의 잔고로 평가하지 않는다. 역사는 그 사람의 가치를 그가 사는 이 세상에 어떤 선한 영향을 미치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나눠주었느냐는 것으로 그 사람의 가치를 평가한다”고 말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도 다 압니다.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지만 어떤 삶이 더 가치있고 훌륭한 삶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반기문 총장이 첫번째 문장을 이야기 했을 때 좌중은 환호하며 박수를 쳤습니다. 그래서 한 동안 연설이 중단되었습니다.  


역사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또 사람들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한 사람이 이루어낸 겉으로 보이는 업적이나 혹은 그가 쌓아놓은 부와 재산으로, 그가 자녀에게 얼마나 많은 것들을 남겨 주었느냐 하는 것들로 그 사람을 평가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얼마나 애썼느냐 그래서 얼마나 자기 자신과 가족들을 벗어난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한 섬김의 삶을 살았느냐 하는 것으로 우리를 평가하십니다. 


우리는 사사들이 어떻게 사사가 되었고, 어떻게 사사의 일을 감당했으며, 또 얼마나 오랫동안 그 일을 했는지, 그리고 사사로서 얼마나 많은 것을 누리며 살았는지와 상관없이 결국 다 지나가 버리는 인생이 되고 말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이 그토록 아끼고 사랑했기 때문에 엄청난 부와 권력을 물려주었던 그의 자녀들도 마찬가지이구요.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 할까요? 그것은 우리의 인생은 우리가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된 이후가 그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를 항상 붙들고 살지 않으면 성도는 성도로서 향기롭고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사람 앞에서나 하나님 앞에서나 영광도 없고 광채도 없는 그런 삶을 살게 되고, 결국 그것이 나의 영원한 삶의 모습이 될 것입니다. 


사사 두 명과 그 시대에 대한 짧은 이야기 후에는 입다의 이야기가 어어집니다.  입다의 이야기는 이스라엘이 입다를 사사로 세우게 되고 그 입다가 이제 이스라엘을 암몬 자손의 손에서 구원하는 이야기인데요. 우리가 이 이야기를 읽다가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리가 흔히 표현하는 대로 얼마나 배알이 없는 사람들인지를 보게 됩니다. 처음에 길르앗 사람들은 성 이름과 똑같은 이름의 길르앗의 첩의 아들인 입다를 첩이라고 해서 자기 성에서 내어쫓았고 그 때부터 입다는 자신과 처지가 비슷한 주변인들과 세를 형성했습니다. 마치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다닐 때, 그에게 처지가 좋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던 것처럼 말이지요. 아마도 입다는 그 당시로서는 입다가 아니고는 대안이 없을 정도로 무시하지 못할 정도의 세력을 형성했던 것 같고 그 지도력도 꽤 뛰어났던 것 같습니다. 전쟁이 나자 길르앗의 장로들은 모두 입다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는 자신들의 지도자가 되어서 자신들을 지도해 달라고 했습니다. 빌고 또 빌어서 겨우 입다의 허락을 얻어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참 일관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들이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나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하나도 다르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에게도 입다에게처럼 대했습니다. 자기들이 고통스럽거나 위기에 처하게 되면 그는 울며 불며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살려달라고, 살려달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 때 뿐입니다. 일단 그런 고통과 위기에서 건짐을 받으면 언제 그랬었냐는 듯이 금새 제 자리로 돌아가 바알을 섬기고 하나님을 멀리 합니다. 거꾸로 뒤집어 놓으면 길르앗 사람들이 입다를 대한 태도와 완전히 일치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게 사람이든 아니면 하나님이든 자기 필요에 따라서만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간사한 습관이 있었던 것입니다. 


 모든 사사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사사들은 권력을 갇게 되고 많은 재물을 보게 되자 사사 본연의 자리를 떠나 스스로 변질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위험에 처했을 때만 하나님을 찾았지 그 이후에는 다시 우상숭배로 돌아가곤 했습니다. 또 똑같은 태도로 사람을 대했습니다. 쓸모 없을 때는 쓰레기처럼 내버렸지만 도움이 필요할 때는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습니다. 사실 보여지는 모습은 달라도 근본적인 이유는 똑같습니다. 이들이 이런 모습을 보인 이유는 이들이 신실함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었고, 하나님 앞에서는 언약 백성이요, 서로를 향해서는 그 언약 안에서 하나로 묶여진 사람들, 그래서 서로를 하나님 대하듯이 대해야 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언약 백성입니다. 언약으로 하나님과 하나로 묶여 있고 또 서로가 하나로 묶여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나 서로를 향해서 이렇게 저렇게 함부로 자기 태도를 바꾸어서는 안됩니다. 상황이 바뀌었다고 해서 세상을 대하는 우리의 모습을 바꾸어서도 안됩니다. 또 한 가지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우리의 인생은 이 땅이 전부가 아닙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이 땅에서의 삶을 근거로 해서 결정되어질 우리의 영원한 삶입니다. 그래서 함부로 이렇게 저렇게 자기 유익에 따라서 자기 마음과 태도를 바꾸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 그리고 땅이 아니라 하늘을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입니다. 


신실하고 올곧은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서실 때까지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 앞에서, 그리고 돈과 권력 앞에서 흔들리지 않는 신실한 모습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항상 하나님을 섬기고 또 이웃을 섬기며 향기롭고 거룩한 삶을 사시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