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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5.05.28. 새벽예배 - 성경읽기와 묵상(사사기 12-1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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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일 : 2015년 5월 28일 목요일





하나님을 향한 신실함과 진지한 믿음이 약해질 때, 일어나는 가장 안타까운 현상 중의 하나는 하나님의 뜻과 영적인 일들에 대한 분별력이 약해지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이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도 이 분별력이 약해지면 성도들은 하나님을 제대로 믿고 섬길 수가 없습니다. 원래 신앙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 그 뜻에 순종하는 것을 절대적으로 중요한 요소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시시콜콜하게 모든 일의 모든 것들에 대해서 다 이야기해 주실 것 같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과 생각, 그리고 성품을 적절하게 헤아릴 줄 아는 능력이 없거나 혹은 그 감각이 무뎌지면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의 일로 바라보지 못하게 될 뿐만이 아니라 나름대로는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고 또 신앙적이라고 내린 결단이 오히려 하나님께는 그 반대의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어제 본문이었던 11장 후반에는 참으로 어이 없는 사건이 하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입다의 하나 밖에 없는 딸이 제물로 바쳐진 사건이었습니다. 이 일로 인해서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는 일년에 한 차례 이 일이 일어났던 그 날에 이스라엘 여인들이 입다의 딸을 위해서 나흘씩 애곡하는 풍습이 생겨났는데요.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님을  향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딸과 자기 자신의 목숨까지도 아까지 않았던 입다와 그의 딸의 충성스러운 이야기 같지만 실제로는 정말 어이없이 짝이 없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성품을 전혀 몰랐기 때문에 일어났던 정말 쓸데 없는 비극이었던 것입니다. 


우선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사람을 제물로 해서 드려지는 제사를 받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가장 가증하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사로 세워진 사람이 그 사실 조차 모릅니다. 그래서 자신을 마중 나오는 첫번째 사람을 제물로 해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결국 그렇게 하고 말았습니다. 입다의 딸은 또 어떻습니까? 참 순수하기는 합니다. 그렇지만 딸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무지했습니다.  말만 들어보면 얼마나 가상하고 충직합니까? 자신이 죽고 사는 일인데 아버지가 하나님 앞에서 말한 것이니 꼭 지켜야 한다고 말했을 정도이니까요. 백성들은 또 어땠습니까? 그 일에 대해서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라고 분명히 이야기할 수 있었을 텐데 그렇게 하는 사람이 누구하나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입다는 자기 딸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렸고,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날을 함께 슬퍼해야만 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입다는 꼭 이 약속을 지켜야 했을까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제사를 받으셨을까요? 둘 다 아닙니다. 첫째, 이 약속을 어기는 것보다는 사람을 제물로 드리는 일이 하나님 앞에서는 훨씬 더 악하기 때문입니다. 서원을 지키느라고 더 큰 하나님의 뜻을 어긴다면 그것은 훨씬 더 큰 죄가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무슨 제물이건 제물만 드리면 기뻐받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사람을 제물로 드리는 제사는 이유를 막론하고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이 경우에는 약속도 잘못된 것이고 그 약속을 지키는 것은 더더욱 잘못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결국 이 두 가지 일 모두가 겹쳐서 일어나게 된 것은 바로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에 그만큼 무지했기 때문입니다. 


13장에는 삼손의 탄생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삼손은 아주 독특한 사사입니다. 아얘 잉태할 때부터 하나님께서 사사로 잉태되게 하셨던 그런 사람이었으니까요. 그렇지만 삼손의 아버지인 마노아라는 사람은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영적인 무감각함을  그대로 드러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선 16절을 보면 마노아는 자기 아내에게 아들의 잉태소식을 알려 준 여호와의 사자와 실컷 이야기를 나눈 후였지만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그저 지나가는 손님인 것처럼 생각했고 그래서 음식을 대접하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리고 이름도 물었지요. 그 덕분에 우리는 ‘기묘자’라는 우리 주님의 은혜로운 이름을 한 번 더 듣게 되지만 그는 그저 어떤 귀한 사람을 만나고 있다는 듯이 행동했던 것입니다. 나중에 하나님의 사자가 떠난 후에 자기 앞에 있던 것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자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하나님을 보았으니 죽은 목숨이라고 호들갑을 떱니다. 오히려 아내가 만약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죽이려고 하셨다면 자신들이 드린 제물을 받지 않았을 것이고 이런 모든 일들을 행하지 않으셨을 것이라고 말해서 겨우 진정됩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은 정말 총체적으로 영적인 혼란을 겪고 있었습니다. 사람의 목숨을 가지고 서원을 하지 않나, 또 그 서원대로 자기 딸을 하나님께 바치지 않나. 사사의 아버지라는 사람은 자기 눈 앞에 있는 것이 사람인지 하나님의 사자인지 끝까지 분별하지 못하고, 이스라엘을 구하려고 오신 분을 만난 후에 죽게 되었다고 호들갑을 떨고... 성도 여러분, 우리라고 이러지 말라는 법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무지하고 또 영적인 분별력이 흐려지면 우리 삶에도 이런 비슷한 일들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실제로 한국교회 안에서는 이런 일들이 지금도 부지기수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것으로 하나님을 위한답시고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열심을 내고 있고, 하나님께서 금하신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그런 줄도 분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의 뜻과 마음에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여 주어도 그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인지도 깨닫지 못합니다. 그저 자기 눈과 자기 생각만 고집하느라고 당연히 알아차려야 할 너무나 당연한 이치도 깨닫지 못한 채로,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두려움에 사로 잡혀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은혜인지 징계인지도 분별하지 못할 때도 드물지 않습니다. 


성도 여러분, 성도에게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영적인 분별력이 꼭 필요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과 그 신앙 안에서의 우리의 삶은 그야 말로 엉망진창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의 섬김은 오히려 하나님을 거역하는 일이 될 수 있고, 우리 삶은 혼란과 혼동, 그리고 두려움으로 채워지게 됩니다. 끝까지, 정말 주님 앞에 서는 그 날까지 더욱 더 하나님을 제대로 알아가시고 영적인 분별력을 갈고 닦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언제나 주님이 기뻐하시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성품에 맞는 섬김으로 하나님을 섬기시며, 명확하고 분명한 신앙인이 되어 삶도 신앙도 온전함에 이르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