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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5.06.18. 새벽예배 - 성경읽기와 묵상(사무엘상 1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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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일 : 2015년 6월 18일 목요일




오늘 본문인 14장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나옵니다. 한 사람은 사울이고 다른 한 사람은 그의 아들인 요나단인데요. 이 두 사람은 부자지간임에도 불구하고 똑같은 상황에서 너무도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14장 15절까지는 잘 알려져 있는 사울의 아들 요나단의 무용담입니다. 요나단은 홀홀단신 블레셋 진영으로 쳐들어 가서 그 진영을 뒤흔들어 놓았습니다. 그가 그렇게 어찌 보면 무모해 보이는 작전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단순히 하나님을 믿었을 뿐 아니라 전쟁의 승패는 사람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권력 때문에 점점 망가지고 있었지만 그 아들인 요나단은 점점 더 굳건하고 용감한 믿음의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왕인 사울이 아니라 요나단을 통해 일하시고 또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습니다. 요나단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용기를 내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해서 큰 일을 하셨습니다. 


반면에 사울은 그 반대의 길을 갑니다. 18절을 보면 사울이 아히야에게 하나님의 괴를 진영으로 옮겨오라고 명하는 것을 볼 수 있은데요. 이것은 이전에 엘리의 아들들이 죽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했던 일을 그대로 반복하는 모습입니다. 그 때처럼 사울도 여호와의 궤를 이용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물론 사울이 법궤만 있으면 전쟁에 이길 것이라고 생각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지만  언약궤를 전쟁에 이용하려고 했던 것만큼은 분명합니다. 신앙에 있어서 이용하려는 것과 의지하고 신뢰하는 것을 구분하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만약 똑같은 것을 하나님께 원해도 이렇게 생각한다면 그게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용하려는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내가 하는 행동 속에 하나님을 내 마음대로 하려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울처럼 법궤를 가져 오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기계적으로 가져다 쓸려고 하면 그건 하나님의 이용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만약 그저 하나님의 은혜와 선하심에만 의지하고 있다면, 오히려 자신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 편에 서려고 한다면 그것은 내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사울은 이제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으로서 하나님을 의지하려고 하기 보다는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들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울은 전쟁에서 이기겠다는 일념으로 무리수를 둡니다. 이미 많이 지쳐 있는 백성들에게 전쟁이 끝날 때까지 아무 것도 먹지 말라고 합니다. 먹는 날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선언하면서 말이지요. 그래서 전쟁 중에 이스라엘 병사들은 그야 말로 굶어죽기 일보직전까지 지쳐 있었지만 아무도 무언가를 먹으려 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듣지 못한 요나단은 전쟁 중에 수풀 속에서 발견한 꿀을 찍어 먹었습니다. 어던 사람이 요나단에게 사울의 말을 전해 주었지만 이미 늦어버린 후였습니다. 더 심각한 일은 그 다음에 일어났습니다. 그렇게 굶주린 채로 전쟁을 치르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리품으로 얻은 짐승들을 잡아서 익힐 새도 없이 그냥 피째로 뜯어 먹었습니다. 이것은 율법이 굉장히 강하게 금하고 있는 커다란 죄입니다. 결국 사울은 자신의 명령을 철회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병사들에게 음식을 익혀 먹을 것을 통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계속 죄가 이어질 수 밖에 없었으니까요. 


전쟁이 계속되면서 계속해서 블레셋 사람들을 추격해야 할 지를 하나님께 여쭤 보았지만 하나님께서는 대답해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이 일이 누구의 책임인지를 밝히기 위해서 모든 병사들을 소환했고, 결국 사울과 요나단만 뽑혔다가 나중에는 요나단이 뽑혔습니다. 요나단은 자신이 알고 그랬건 모르고 그랬건 꿀을 먹었고 그것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났으니 자기는 죽어 마땅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사울은 아들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렇지만, 백성들이 나서서 뜯어 말리는 바람에 요나단은 생명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전쟁도 그 자리에서 끝났습니다. 


하나님께서 대답을 하지 않으신 이유는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이제 더 이상 블레셋을 추격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해서 이고, 또 하나는 결국 이 일의 책임이 사울에게 있다는 것을 알려 주시기 위해서 였던 것 같습니다. 사울은 지도자로서 하나님 앞에서 말을 함부로 내 뱉았습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요나단은 처형을 당하게 될 지경이 되었고, 많은 병사들이 사울의 명령을 어기게 되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고 엄격하게 금하신 피를 먹는 죄를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자신이 그 모든 일의 책임을 짊어지려고 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그 모든 혼란의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중심으로 사는 지도자와 자기를 중심으로 사는 지도자의 차이입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사는 지도자는 항상 하나님 앞에 자신을 세웁니다. 정직하고 투명하게, 인정해야 할 잘못은 분명하게 인정하면서 때로 그것이 자신에게 큰 손해를 가져 오더라도 그 일을 그만두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자기를 중심으로 사는 지도자는 그야 말로 자기 중심입니다. 하나님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코 자신이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지도자도 그렇지만 일반적인 사람들은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그저 보이는 것만 보면 자기 중심적인 사람이 더 큰 역할을 하는 것 같고 또 잘 되는 것 같아 보이지만, 하나님께 중요한 사람은 이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님께는 당장은 어리석게 보이고 당장은 바보같아 보이지만 끝까지 자신을 하나님 앞에 세우는 사람이 중요하고 이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귀한 목적을 이루어 가십니다. 


우리는 때로는 지도자를 따르기도 하지만 또 어느 부분에서는 지도자의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그게 직장이건 가정이건 혹은 동료들 사이에서건 크고 작은 지도력을 행사하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항상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그 지도력을 사용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항상 하나님 앞에 자신을 세우고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내가 어떤 태도로 서 있기를 원하시는지를 헤아리고 거기 자신을 맞춰가야 합니다.  


상황은 언제나 우리에게 사울이 될 것인가 아니면 요나단이 될 것인가를 묻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만 합니다. 비록 이런 상황이 우리를 갈등하게 하고 고민하게 하지만 그래서 이런 상황들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사람들인가를 그대로 드러내게 해 줍니다. 약삭빠름은 하나님 앞에서 전혀 선한 것이 아닙니다. 지혜로운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선하고 귀하게 여기는 것은 바로 우직함이며 신실함입니다. 항상 지금 여기가 아니라 저 높고 영광스러운 그 곳을 생각하면서 쉽지 않지만 영광스럽고 빛나지 않지만 아름다운 삶을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