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5.06.24. 새벽예배 - 성경읽기와 묵상(사무엘상 20-21장)


20150624D (#1).mp3.zip





  설교일 : 2015년 6월 24일 수요일




   사울이 직접 라마 나욧까지 자신을 찾아오자 다윗은 더 이상 그 곳에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다윗이 믿을 데라고는 요나단 밖에 없었습니다. 이미 요나단의 우정이 어떤지를 알고 있었으니까요. 요나단을 만나 자신의 사정을 토로하는 다윗에게 요나단은 만약 사울이 정말로 다윗을 헤칠 의도가 있는 것이 확인되면 반드시 그 사실을 알려 주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맹세까지 하면서 다윗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이것은 서로의 목숨을 자신의 목숨처럼 여기고 보호해 주고 지켜 주겠다는 언약이었습니다. 


   저는 요나단을 보면서 이것이 참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개 사람들은 자기와 가까운 사람의 편을 들고, 또 자기 이익에 따라서 움직입니다. 그래서 사울처럼 이미 하나님께서 자신을 떠났고 하나님께서 자기 집안의 왕권을 다른 이에게 옮기셨다는 것을 알아도 오히려 어떻게든 그 일을 막아 보려고 발버둥치게 되지요. 그러나 요나단은 비록 사울의 아들이었지만 결코 그렇게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편을 들지 않고 오히려 다윗의 편을 들 때, 요나단의 마음이 그저 편안했을  리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끝내 다윗과 언약을 맺고, 다윗에게 축복하며 그 대적이 될 자를 저주합니다. 상식적으로 보면 참 이해하기 힘든 것이지만 그렇게 요나단은 사람의 편을 들거나 혹은 자기 이익에 따라 움직이지 않고 옳고 그름과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 그것에 따라 움직였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이 참 신앙의 사람입니다. 그리고 참 신앙의 사람은 이래야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고 또 하나님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항상 ‘자기’를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게 쉽지 않아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지 않는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그렇게 할 때라야 자신이 사는 세상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더 거룩하고 온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런 사람이 될 때, 우리는 우리 주변에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위한 보호자가 되어 주고 또 위로자가 되어 줄 수 있습니다. 만약에 요나단이 없었더라면 다윗은 얼마나 외롭고 얼마나 힘들고 혼란스러웠겠습니까? 그래도 요나단이 언약을 끝까지 지켜 주고 또 여러가지 그렇게 할 수 있는, 또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지만 그 마음을 바꾸지 않았기 때문에 그나마 다윗은 안전할 수 있었고 또 그런 요나단을 통해서 자기 마음을 지키고 위로와 힘을 얻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일은 그래서 참 중요합니다. 그게 별것 아닌 것 같고, 또 그저 개인적이기만 한 것 같아도 성도 한 사람이 자기 자리를 지키며 신실하게 살아갈 때, 또 그렇게 하나님의 뜻과 옳고 그름을 존중하면서 공정한 삶을 살아가려고 애쓸 때, 그것을 보는 주변의 많은 성도들은 힘을 얻고 소망을 얻고 위로를 얻게 됩니다. 


오늘 한국 교회와 성도들이 이 땅에 소망과 위로가 되지 못하는 이유나 교회 내부적으로도 그런 복을 누리지 못하는 것는 우리 중에 이런 사람들이 너무나 적기 때문입니다. 자기 이익과 반대되고 때로는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의 편을 들어주지 못할지라도 그게 하나님의 뜻이고 올바른 일이기 때문에 기꺼이 그것을 선택할 수 있는 성숙한 성도들이 너무나 적기 때문이지요. 성도들까지도 너무나 자기 중심, 자기 사람 중심으로 움직이니 세상과 교회가 그다지 다르지 않고 그래서 교회 바깥의 세상을 향해서나 스스로를 향해서 마땅히 줄 수 있는 유익들을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가족을 미워하지 않으면 나를 사랑할 수 없다고 말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평상시에는 그렇지 않지만, 가끔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 편에 서기 위해서 적어도 가족의 편을 들어주는 일까지 내려놓아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지 못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참으로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성도의 어려움이기도 하지만 또 성도의 영광이기도 합니다. 다들 자기에만 집중하여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생각하고 또 진리를 사랑하기위해 결단하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저와 여러분의 영광입니다. 


또 한 가지 성경은 요나단이 다윗을 향해서 가지고 있었던 마음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다윗에 대한 요나단의 사랑이 그를 다시 맹세하게 하였으니 이는 자기 생명을 사랑함같이 그를 사랑함이었더라” 아마도 성경이 말하는 사랑 중에서 가장 불가사의한 사랑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요나단이 다윗을 향해서 가지고 있었던 우정이 아닐까 합니다.  그만큼 깊고 풍성했고 또한 모든 것을 주고 또 주는 사랑이었으니까요. 가족도 아닌데, 남녀사이도 아닌데 이런 사랑과 우정이 가능할까를 생각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분명히 이 우정은 그저 자연스러운 감정만은 아니다.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요나단에게 그런 마음을 주셨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원래 참 성도들이란 항상 하나님 안에서 그렇게 사랑하게 되니까요. 교회 안에서는 항상 성도들이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사랑하려고 애를 쓰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경험하는 것이지만 참으로 사랑하는 일은 정말 정말 어렵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려다가 좌절하고 사랑하려다가 포기하고,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이제 교회 안에서는 사랑하기 위해서 헌신하는 사람들은 점점 더 드물어지고 있습니다. 내가 마음에 들면 사랑하고 그렇지 않으면 사랑하지 않고, 내 이익에 맞으면 선대하고 그렇지 않으면 거리를 두고... 교회 안에서 마치 21장에 나오는 사울이나 아니면 도엑이라는 사람의 방식으로 살며 행동하는 것이 오히려 상식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저는 실제로 어떤 목사님의 입을 통해서 그저 적당하게 사랑하라고 하는 설교도 들어 보았습니다. 괜히 사랑하려다가 상처를 받는다는 것이죠. 현실적으로는 맞는 이야기입니다만,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성도와 교회의 모습은 아닙니다. 성도는 끝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상처를 입어도 끝까지 사랑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고, 또 사랑하지 않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그래도 사랑하고 또 사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은 자기 힘으로만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은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서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려고 애써야 합니다. 사랑하겠다고 결단을 내리고 말이지요. 그러나, 분명히 그런 결단이 있어도 좌절할 것입니다. 사랑스럽지 않은 사람을 사랑하려다가, 내 속에는 사랑이 아니라 이기심이 가득차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래서 자신에게 사랑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테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항상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사랑에 게으르고 사랑에 인색한, 그리고 사랑에 궁핍한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나를 도와 주셔서 사랑하기 힘든 사람을 사랑하고, 또 사랑 없지만 사랑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또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면서 다시 결단하고 주님 주시는 능력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들 사이의 사랑도 요나단의 다윗을 향한 불가사의한 사랑을 닮아가고, 그렇게 교회 공동체도 서로가 서로를 향한 사랑 안에서 풍성하고 든든하게 세워져 갈 것입니다. 


   정말 우리 광현교회 안에 요나단이 다윗을 향해서 가졌던 그 불가사의한 사랑이 풍성해 지기를 소망합니다. 또 내가 먼저 요나단이 되는 복과 영광을 얻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닮은 요나단의 사랑이 풍성해져서 우리 교회가 정말 사랑 안에서 서로가 서로를 지켜주고 세워주며 위로하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