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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5.06.28. 주일오전 - 여호와로 맹세하였으니(여호수아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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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본문 : 여호수아 10장 1-15절




    우리가 살아가는 이 나라 안에는 많은 교파들과 또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교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교파들과 교회들 중에서 똑같은 곳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교단들과 교회들에 속한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바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속해 있는 교회가 ‘좋은 교회’이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곧 자신이 아름다운 교회, 그리고 교회다운 교회의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는 뜻일텐데요. 그렇기 때문에 굉장히 중요해 지는 것이 그렇다면 과연 어떤 교회가 좋은 교회이고 교회다운 교회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게 분명해 져야 그 바램이 의미있는 바램이 될테니까요. 그런데, 이 문제를 생각하기 전에 우선 우리가 확실히 해 놓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이기 때문에 좋은 교회, 교회다운 교회를 말할 때는 과연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시면서 교회가 어떤 공동체가 되는 것을 바라셨는지를 기준으로 해서 답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좋아한다고 그 교회가 반드시 좋은 교회는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는 절대로 좋은 교회를 찾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라야 좋은 교회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교회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좋은’ 교회가 될 때, 결국 그 교회에 속한 성도들도 하나님께서 교회에 두신 참 은혜와 영광을 맛볼 수 있습니다. 


    요즘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교회는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는 이야기를 참 많이 합니다. 그만큼 그들이 보기에도 교회가 교회답지 않은 모습이 많이 보이기 때문이겠지요. 저는 우리가 그들의 이야기에도 귀를 기울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저는 조금은 안타깝고 조금은 화가 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이야기 중에서 많은 부분이 교회가 도대체 본질적으로 무엇인지를 모르는 상태에서 그저 자기 상식에만 근거해서 그런 이야기를 쏟아낼 때가 더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더 안타까운 것은 성도들 중에서도 이런 분들이 참 많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몰라도 성도들은 그러면 안됩니다. 무슨 이야기를 할 때, 자기 생각을 성경에 비추어 생각한 후에 자기 생각은 그저 참고사항 쯤으로 덧붙여야 하고, 자기 생각이 아무리 강해도 성경이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그저 느슨한 희망사항쯤으로만 물러 둘 줄 알아야 합니다. 


    스스로 이스라엘 백성에게로 찾아와 화친을 맺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종이 되었던 기브온은 결코 작은 성읍도 아니었고 약한 성읍도 아니었습니다. 그 지역에서는 굉장히 지명도가 높은 커다란 성읍이었고 도 강한 성읍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지역에 살던 사람들의 입장에서 볼 때, 이런 성읍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화친 조약을 맺었다는 것은 자기들 편에서는 그만큼 큰 힘이 갑자기 빠져 나간 것이고, 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그만큼의 큰 힘이 더해졌다는 뜻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은 당연히 그들에게는 커다란 위협이 될 수 밖에 없었는데요. 특히 가장 가까이에 있었던 예루살렘의 왕인 아도니세덱에게는 더욱 더 그렇게 느껴졌습니다. 아도니세덱은 위기감을 느끼고 주변의 동족들인 아모리 족속의 다섯 왕을 다 불러 모았습니다. 그리고는 세력을 회복할 겸, 또 배신에 대한 복수도 할겸 연합군을 만들어 기브온을 공격했습니다. 


    다급해진 기브온 사람들은 이스라엘에게 구원을 요청합니다. “당신의 종들 돕기를 더디게 하지 마시고 속히 우리에게 올라와 구하소서 산지에 거주하는 아모리 사람의 왕들이 다 모여 우리를 치나이다” 그런데, 이 요청을 받은 여호수아는 고민도 하지 않고 지체하지도 않습니다. 곧바로 모든 병사들과 전사들을 불러 모아 길갈에서 기브온으로 올라 갔습니다. 그렇지만 여호수아는 그래도 조금은 두려워 했던 것 같습니다. 한 두 성읍도 아니고 산지에 사는 가장 강한 다섯 개의 성읍을 상대로 싸워야 했으니까요.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아시고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그들을 네 손에 넘겨 주었으니 그들 중에서 한 사람도 너를 당할 자 없으리라.” 


    원래 하나님께서는 이미 오래 전에 아모리 족속을 이스라엘 손에 넘겨 주셨습니다. 그렇게 보면 이 약속은 필요 없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이 약속은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아주 각별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습니다. 본문을 보면 여호수아는 이번에도 하나님께 묻지 않고서 출전을 결정하고 즉시 결행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교만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기브온의 상황이 너무 급박했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이 기브온과 이스라엘의 관계로 보면 가장 옳은 선택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내린 결정이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다시 주신 약속은 하나님 편에서 그 결정에 대해서 주신 칭찬이었고 또한 지지를 선언해 주신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힘을 얻고 용기를 얻은 여호수아는 병사들과 함께 밤새 기브온을 향해 올라가서 갑자기 아모리 족속을 기습했습니다. 이 때부터 하나님께서는 본격적으로 이스라엘 편을 들어주시기 시작했습니다. 추격은 하루 종일 계속되었고, 그 중간에 벌어진 전투에서 아모리 연합군들은 거의 궤멸되다시피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 싸움에 직접 뛰어드셔서 하늘군대를 지휘하셔서 싸우셨기 때문인데요.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쫓겨가는 아모리 연합군 위로 얼마나 큰 지는 잘 모르지만, 한 대 얻어 맞으면 목숨을 잃어버릴 정도로 커다란 우박을 쏟아 부으셨습니다. 그래서, 이 전쟁은 독특하게도 이스라엘 군대와 싸우다가 전사한 사람들보다 우박에 맞아 죽은 사람이 훨씬 더 많은 그런 전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전쟁에는 이 전쟁을 더 특별하게 만든 또 하나의 사건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전쟁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 하늘에 떠 있는 해도 달도 움직이지 않고 멈춰서게 하셨던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그 과정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모리 사람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넘겨 주시던 날에 여호수아가 여호와께 아뢰어 이르되...” 시작한 전쟁을 완전히 끝내기 위해서 시간이 더 많이 필요했고, 그래서 여호수아는 하나님께 낮이 좀 더 지속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허락을 받은 후에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군사들 앞에 서서 하늘을 향해 명합니다.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서 그리할지어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태양이 머물고 달이 멈추기를 백성이 그 대적에게 원수를 갚기까지 하였느니라 야살의 책에 태양이 중천에 머물러서는 거의 종일토록 속히 내려가지 아니하였다고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여호와께서 사람의 목소리를 이같이 들으신 이같은 날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나니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셨음이니라” 하나님께서는 그 날, 여호수아에게 이스라엘 군대의 통제권 뿐만 아니라 하늘의 태양과 달에 대한 통제권까지도 넘겨 주셨던 것입니다. 


    여호수아서는 이 아얄론 전투를 이스라엘이 치른 모든 전쟁들 중에서도 아주 이례적인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야 말로 ‘전무후무’한 사건이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쟁을 치를 때면 하나님께서는 항상 이스라엘 편을 들어 주시고 대신 싸워주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이 날 만큼 그렇게 하신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의 요청을 받아 시간까지 멈추게 하시면서 까지 그 전쟁이 완승이 되도록 해 주셨던 경우는 이 전투가 유일무이 했습니다. 


    여러분도 이미 알아차리셨겠지만, 이 전쟁은 다른 전쟁들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다른 모든 전쟁들은, 정상적인 경우에는 항상 하나님의 명령이나 혹은 허가가 있고 나서 그 다음에 이스라엘이 움직이는데, 이 전쟁에서는 먼저 여호수아가 결정을 내리고 나서 백성들이 움직였고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약속을 주시고 지원을 하시는 그런 방식으로 전쟁이 치러졌습니다. 게다가 그 중에 여호수아는 시간이 천천히 흐르게 해 달라는 과감하고 어찌보면 허무맹랑한 요구를 했는데, 하나님께서는 진짜로 그렇게 해 주셨습니다. 하늘의 해와 달이 하루 종이 움직이지 않고 고정되어 있게 하셨습니다. 성경이 증언하고 있는대로 이것은 전무후무한 일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하시는 하나님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어떤 마음이 느껴지십니까? 하나님께서 굉장히 기뻐하신다는 것이 느껴지시지요? 하나님은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의 선택을 너무 너무 기뻐하셨습니다. 너무 좋으셔서 하늘에서 우박을 때려 부으시고, 또 해와 달을 머물러 있게 하실만큼, 그렇게 하늘까지 총동원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도와주실만큼 그만큼 기뻐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의 결정을 그렇게 기뻐하셨던 것일까요? 


    우리가 지난 주일에 살펴 본 것처럼 둘 사이의 동맹관계는 정상적인 화친조약을 통해 생겨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기브온 사람들의 거짓말에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속아 넘어가서 맺어진 화친조약 때문에 생겨난 관계가 둘 사이의 관계였습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그 언약을 소중하게 생각했고, 자기들이 욕을 먹고 책임을 질 일이 있어도 그 언약을 깨뜨리면 안된다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설득했습니다. 오늘 본문 또한 이 이야기의 연장선상에서 보아야 합니다. 여호수아가 지체없이 그런 결정을 내리고 망설임 없이 위험을 무릅쓰고 기브온으로 올라간 것또한 그 언약 때문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다른 나라와는 달리 아주 독특한 점 한 가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그저 한 지역에 모여 살던 사람들이 만든 나라가 아니라 하나의 언약으로 묶여 있는 언약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의 언약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언약을 물려받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많아지면서 형성된 공동체가 바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하나로 묶고 있는 것은 정치나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언약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언약이란 것이 아주 독특해서 언약을 맺기만 하면 그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든지 그들을 하나로 묶어 버리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니어도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또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면 이스라엘의 일부가 되는 그런 것이 바로 이 언약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또 한 가지, 성경이 말하는 언약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계약이라고 부르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일반적으로 계약은 그 계약을 맺을 때, 서로 서로의 책임의 한계를 분명히 합니다.  사실 그것 때문에 계약을 맺는 것이죠. 그래서, 계약관계 안에서는 그 계약의 한계를 넘는 일에 대해서는 더 이상 무엇을 해야 할 의무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언약은 그 당사자들을 무한책임을 지는 관계로 묶어 놓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언약이 가지는 독특한 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신실하신 하나님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정말 그런 분이십니다. 아무리 거듭 거듭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거역해도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완전히 철회하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거듭 거듭 용서하시고 기다리시고 또 돌아오면 받아주셨습니다. 우리가 보아도 참 바보같다고 느껴질 정도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렇게 해 주셨을까요? 물론 그것이 하나님의 성품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무한책임을 지는 언약을 맺었고 그 언약을 충실하게 지키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결정을 그렇게 기뻐하셨던 것은 그런 하나님을 닮은 모습을 그 날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 속에서 보셨기 때문입니다. 대개 부모들은 내 자녀가 이것만큼은 나를 닮았으면 하는 것을 가지고 있게 마련입니다. 하나님께도 그런 게 있습니다. 그게 바로 언약에 대한 신실함입니다. 


    성경은 교회를 새 이스라엘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서 못 이루신 것을 우리를 통해서 이루셨다는 뜻도 되지만, 오늘 교회 공동체 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올바른 존재양식이 나타나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오늘날의 교회도 그 날의 이스라엘처럼 스스로를 하나의 언약 안에 묶여 있는 언약 공동체로 알고 그 안에서 서로 서로를 충실하고 신실하게 사랑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게 이스라엘을 가장 이스라엘 답게 만들어 주었던 것처럼 교회가 가장 교회다울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는 근본이라는 뜻입니다. 


    성도들이 하나의 교회 안에 있다는 것은 그들 모두가 하나의 언약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나는 그런 언약 맺은 적 없다고 하실지 모르지만,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과 언약관계 안으로 들어간 것이고, 그 언약 덕분에 예수님과 연합된 우리는 모두가 다 하나의 언약으로 묶여 지게 되었습니다. 그 분과의 언약이 우리들 사이의 언약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맺은 언약과 우리 사이에 맺어진 언약. 이 둘은 원래부터 하나여서 나눌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느끼기 이전에 이미 사실이 된 일입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이 기브온을 자기 백성들 중의 일부로 느끼기 전에 이미 그들은 언약 안에서 이스라엘의 일부가 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교회됨의 원리를 가르쳐 주는데요. 그것은 우리는 서로를 향해서 무한책임을 지는 그런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가 한 몸이라는 말씀 한 구절만 보아도 대번에 분명해 집니다. 몸은 신체를 이루는 각각의 지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지체들은 서로가 서로를 위해서 일함으로써 서로의 하나됨 안에서 스스로를 세워 갑니다. 그런데, 그렇게 할 때, 한 지체는 자신이 다른 지체를 위해서 어느 정도의 수고를 해야 하는지 정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많이 일해도 ‘내가 이럴 필요가 있나’하는 회의에 빠지지도 않고, ‘내가 너무 손해보았다’고 화를 내지도 않습니다. 몸 안의 모든 지체는 서로가 서로를 위해서 무한책임을 집니다. 바로 그것을 통해서 몸을 몸으로 유지시키며 더 풍성하게 만들어 갑니다. 성경은 교회가 바로 이런 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들은 스스로를 세우고 풍성하게 하는 이 소중한 원리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사고방식이 성도들에게 그대로 스며들었기 때문인데요. 공동체여야만 하는 교회가 개인주의의 영향으로 교회의 공동체됨을 잃어버렸습니다. 개인주의는 서로 서로 피해만 주지 않으면 서로가 서로에게 아무런 상관하지 않고, 그저 주는 만큼 받으면서 ‘공존’하는 생활방식입니다. 참 편리한 삶의 방식이지요. 그래서 그런지 교회 안에도 이런 사고방식이 너무나 쉽게 들어와 버렸습니다. 성도들은 교회 안에서 ‘너는 너, 나는 나’, 이런 식으로 생활하게 되었고, 그래서 서로 서로 아주 깔끔한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었지만, 함께 있으나 혼자 있으나 별로 차이가 없는, 영적으로는 아주 궁핍한 상태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교회가 하나의 몸 일때만 누릴 수 있는 복과 은혜를 거의 놓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에도 기억상실증이라는 게 있는지, 처음에는 그런 일에 대해서 안타까워 하는 사람들과 교회들도 많았는데, 이제는 그런 세월이 오래되니 오히려 그런 상태를 정상이라고 받아들이고 있는 듯합니다. 그 공허함이, 그 무의미함이, 그 피상성이 원래 교회의 모습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교회가 앓고 있는 이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치료약은 우리가 교회는 서로가 서로에게 무한책임을 지는 언약 공동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이것을 회복하기 위해 헌신하는 일이라고 믿습니다. 저는 오늘 교회의 모습을 볼 때, 참 마음이 아픕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질문 하나를 드려 보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성도는 교회에 교회를 섬기러 오는 사람들입니까, 아니면 교회로부터 무엇을 얻으려고 오는 사람입니까? 교회를 섬기려고 교회에 오는 사람들이지요. 그게 정답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자신이 다닐 교회를 결정할 때,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교회를 찾는 것이 맞을까요, 아니면 내가 있으면 가장 도움이 될 그런 교회를 찾는 것이 맞을까요? 답은 뒤쪽입니다.내가 원하는 것을 줄 수 있는 교회가 아니라 내가 꼭 필요한 것을 줄 수 있는 그런 교회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를 찾고 정하는 바른 원리일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크리스챤들 중에는 그런 사람들이 정말 정말 드뭅니다. 자신이 다닐 교회를 찾을 때도 그렇지만 또 교회에 다니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중심에는 몸된 교회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있습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것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도 내가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만 하지 내가 몸된 교회를 위해서, 다른 성도들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할지 그것을 고민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내가 속해 있는 교회가 참 좋은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좋은 교회의 성도가 되고 싶기 때문일 텐데요. 저는 이런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이 정말 가능한 일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왜 교회 안에는 부족한 사람들이 있을까요? 왜 교회 안에는 눈치도 없고 염치도 없는 사람들이 있을까요? 받고 받으면서도 계속 받으려고만 하는 그런 사람들이 있을까요? 이런 사람들은 정말 얄밉고 전혀 사랑스럽지 않습니다. 보고 있는 것이 그리 즐겁지가 않습니다. 왜 하필 이런 사람이 우리 교회에 있는지 이해하기 힘들어 질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교회에 두신 이유는 분명합니다. 역설적이게도 그런 사람들이 있어야 성도가 성도 다워지고 교회가 교회다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어찌보면 염치 없는 기브온 사람들 덕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실함을 훈련하고 스스로를 신실한 언약의 사람들로 드러낼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 이치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어야 교회와 성도는 그런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기기 위해서 끙끙거리고 애쓰면서 오히려 언약에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로 다듬어져 가게 됩니다.


    교회 전체로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교회가 부족함이 없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이 다 갖추어져 있고 모든 것들이 다 수준급이면 좋겠습니다. 다른 교회는 크고 좋은데, 부족함이 없는데, 왜 내가 다니는 교회는 이 모양인지 모르겠습니다. 왜 이렇게 모든 것이 부족한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왜 내가 이렇게 많이 수고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런 조건들 자체가 선한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 또한 똑같이 사용하십니다. 그 부족함, 그 세련되지 못함, 그 거칠음들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기브온 사람들처럼 그렇게 사용하십니다. 그것이 우리의 신실함을 다듬어 가는 정과 끌이 되게 하시고, 그리고 우리의 신실함을 빛나게 하는 이유가 되게 하십니다. 


    만약 우리가 교회 안에서 조차 자기를 고집하고 자신이 얻고 누릴 것만 생각하고 있다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께서 교회에 두신 참된 교회의 영광과 풍성함을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브온의 잘잘못을 따지기 전에 먼저 언약에 책임을 지는 모습을 보였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것을 기뻐하셨고, 그래서 그렇게 이례적으로 하늘을 총동원해서 그들을 도와 주셨던 것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내가 좀 손해 보면 안되고, 내가 좀 덜 누리면 안되고, 내가 좀 많이 일하면 안됩니까? 귀찮은 일 내가 먼저 하면 안됩니까? 이런 일들이 결코 쉬워서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어렵지만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런 모습 속에 성도의 참된 영광이 깃들어 있으니까요. 만약 우리가 만약 교회 공동체 안에서 조차 우리의 이 못난 자아를 다루어 내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 어디서건 우리 자신을 아름답게 빚어갈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언약 공동체 안에서 나라는 좁은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어디서건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만 갖혀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풍성한 생명이 흘러가는 것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안 그래도 나는 한 번 그렇게 살아보자 해 보십시오. 내가 먼저 손해보고, 내가 먼저 불편하고, 내가 더 많이 일하자 해 보십시오. 다른 사람들 보지 마시고 나 먼저 그렇게 해 보십시오. 그러면 우리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은혜주시고 여러분을 도와주시며 함께 하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리고 하늘의 큰 영광으로 갚아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저는 분명히 그러실 거라 믿습니다. 성도 여러분, 좋은 교회는 그렇게 세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사람들도 복되게 신앙생활하는 좋은 교회는 함께 지체된 다른 성도들과 교회를 책임있게 대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세워져 가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만약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나의 자아가 더 단단해져만 간다면, 점점 더 내 생각만 더 많이 하게 된다면 그것은 신앙생활을 잘못하는 것입니다. 부탁드리고 권면합니다. 항상 교회 안에서 여러분의 자아를 다루어 가십시오. 질그릇 같은 자아를 깨뜨려 보배같은 그리스도의 생명이 흘러나가게 하십시오. 우리가 그렇게 이웃을 복되게 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때, 하나님께서는 큰 기쁨으로 함께 하실 것이고, 우리를 특별한 하늘의 복으로 복 주실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고 우리 교회가 우리 하나님의 신실하신 성품을 드러내는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빚어져 가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