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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5.07.09. 새벽예배 - 성경읽기와 묵상(사무엘하 11-1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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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일 : 2015년 7월 9일 목요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사무엘하 11장과 12장은 우리가 성경에서 읽는 이야기들 중에서도 가장 더럽고 추하고 슬프고 안타까운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정말 우여곡절 끝에 왕이 된 다윗은 적어도 성경의 기록을 통해 보면 사무엘하 11장에 이를 때까지 사람 앞에서나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맡은 일을 아주 잘 수행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도 그를 사랑하게 되었고 하나님도 그에게 특별한 복을 주셨지요. 그런데, 그 모든 것이 사무엘하 11장에 와서 완전히 틀어지기 시작합니다. 물론 이 일은 다윗 개인의 죄였기 때문에 그 직접적인 징벌이 이스라엘에게 주어지지는 않았지만, 다윗 개인과 그의 집안은 이 때부터 무너져 내리기 시작합니다. 물론 다윗은 그래도 역시 다윗이라고 할만한 모습을 보이기는 합니다. 자기가 저지른 죄에 대한 나단 선지자의 지적을 받고 나서 진정으로 뉘우치는 모습을 보이니까요. 하나님도 그런 다윗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렇지만 그 죄가 만들어 낸 악한 열매들과 하나님께서 내리신 벌은 취소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다윗의 집안은 두고 두고 그 쓴 열매를 감당해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죄가 얼마나 무섭고 악한 것인가를 다시 한 번 보게 됩니다. 사실 다윗의 충격적인 범죄 이야기 속에는 죄에 대한 거의 모든 이야기가 들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본문을 통해 항상 우리를 유혹하는 죄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배우게 되고, 또 그 유혹을 피하고 이길 수 있는 방법 또한 배울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우리는 이 무시무시한 일들의 출발은 정말 별 것 아닌 일이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해가 돌아와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매…’ 우리는 이것이 정확하게 어떤 상황을 말하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그 때가 왕들이 전쟁에 나가야 하는 상황이었다는 것만큼은 확실합니다. 그렇지만 다윗은 어디에 있습니까? 왕궁에 있었습니다. 부하들만 전쟁터로 보내고 자신은 왕궁에 있었습니다. 상황이 그럴만 했을 수도 있지만, 이미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그 정도로 큰 세력을 가졌기 때문일 수도 있었지만 그는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습니다. 2절을 보면 더 가관입니다. ‘저녁 때에 다윗이 그의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옥상에서 거닐다가…’ 다윗은 낮잠을 잔 듯합니다. 그런데 그 잠이 저녁 때까지 이어졌습니다. 부하들은 전쟁터에서 생사를 건 싸움을 벌이고 있는데 말입니다. 그렇게 일어난 다윗은 왕궁 옥상으로 올라가서 어슬렁 거립니다. 이런 모습 속에 이미 죄의 유혹을 이길 수 없었던 이유가 다 드러나 있습니다. 다윗은 왕이 되고 나라가 강해져 가자 무척 나태해 졌습니다. 나가야 할 싸움에도 나가지 않을 정도로 나태해 졌습니다. 그리고 무척 무감각해졌습니다. 그동안 생사고락을 같이한 부하들이 전쟁터에 가서 생사를 걸고 싸우는데 저녁 늦게까지 낮잠이나 자다가 옥상에 올라가 어슬렁거릴 정도로 그렇게 무감각해 졌습니다. 그렇다면 이 나태함과 무각함은 어디서 온 것일까요? 바로 교만함입니다. 상황이 충분하다 싶을 때 사람은 교만함에 빠집니다. 그리고 교만함에 빠지면 사람은 나태해지고 해이해지며 정서적으로도 굉장히 무감각해 집니다. 그런데, 바로 이럴 때가 영적으로는 굉장히 위험할 때입니다. 


    저녁 늦게 옥상을 어슬렁 거리는 다윗의 눈에 아주 멀리서 목욕하고 있는 여인의 모습이 들어왔습니다. 저녁 어스름이고 거리고 멀었을텐데 그 여인이 아름다워 보이면 얼마나 아름다워 보였을까요? 그러나 그렇게 나태해 지고 무감각해져 버린 다윗에게 그런 여인의 모습은 떨쳐 버릴 수 없는 유혹이었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다윗이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왕이었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드는 여인이 있으면 취할 수 있는 힘이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이 힘이 있을 때, 그 힘은 거의 항상 범죄로 이어집니다. 힘이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지만 교만하면 그 힘 때문에 자신을 망치고 세상을 망가뜨리지요. 그래서 힘을 함부로 원해서도 안되고, 힘이 있을 때 굉장히 조심해야 합니다. 


    다윗은 그 여인이 자기 부하인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인 밧세바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지만 신하를 시켜 그 여인을 데리고  오게 하고 하루 밤을 함께 보냅니다. 그런데, 그 날 밧세바는 덜컥 임신을 하고 맙니다. 감쪽같이 숨길 수 있다고 생각되었던 일이 이런 식으로 들통이 나게 생겼던 것입니다. 물론 왕이니까 부하가 전쟁터에 나가서 싸우는 동안 그 부하의 아내와 놀아났고 그래서 아기까지 생겼다는 것을 밝히기란 정말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도 다윗은 거기서 멈춰야 했고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수습해야 했습니다.  처음에는 우리아를 불러들여서 그 아기를 우리아의 아이로 만들려고 했지만 우리아의 우직함 때문에 그 일조차 실패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여기서 다윗은 최악의 선택을 하게 됩니다. 요압과 짜고 전쟁터에서 우리아를 죽이기로 한 것입니다. 계획은 성공했고 그래서 우리아는 죽고 맙니다. 이것이 얼마나 악한 일입니까? 헷 사람이면 이방인이거든요. 그런데 이 이방인이 다윗과 이스라엘을 위해서 그렇게 충성을 다했습니다. 왕이 불러서 특별히 휴가를 주었는데도 집에 가지 않고 성문에서 함께 온 병사들과 잠을 잘 정도로 말입니다. 그런데, 전쟁에 나가야 했던 다윗이 전쟁에는 나가지 않고 저녁 늦게까지 낮잠이나 자다가 일어나 그의 아내를 범하고 그런 우리아까지 죽인 것입니다. 죄라는 것이 이렇습니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그리고 때로는 우연한 유혹으로 시작합니다. 그렇지만 일단 그 유혹이 죄가 되어지면 이 죄는 그렇게 범죄한 사람을 삼켜 버리려고 달려 듭니다. 죄는 항상 그 죄를 감추게 만들고 합리화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그것 자체가 또 하나의 죄가 되기도 하고 그 과정에서 더 큰 죄가 저질러 집니다. 정작 당사자는 애초에 지은 죄만 가리는데 정신이 팔려서 그런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지만 말입니다. 이런 과정이 몇 번 반복되면 결국 죄가 사람을 삼켜 버리고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태, 그러면서도 죄에 대해서는 지극히 둔감한 상태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자신의 부끄러움과 평판에는 지극히 신경을 쓰면서도 다른 사람들의 행복은 전혀 중요하게 여기지 않은 이상한 마음을 가지게 합니다. 


    아무리 작은 유혹도, 아무리 작은 죄도 우리가 무시해도 좋을만큼 작은 것은 없습니다. 그런 것들도 이겨내기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이고, 죄는 결코 그 죄 하나로 끝나는 법이 없으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항상 죄에 대해서 민감해야 하고 또 조심해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해서 가장 좋은 것은 다름이 아니라 겸손한 것입니다. 상황이 어떠하든지 그것 때문에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소홀히 하는 나태함에 빠지거나 초심을 잃어버리고 무책임해지지 않도록 항상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그러면 죄의 유혹도 알아차릴 수 있고, 또 그 유혹을 이겨낼 수도 있습니다. 


    항상 겸손하게 자신을 살피며 영적으로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잘 지킴으로써 교만이 만들어 내는 위험한 죄악들을 피하고 항상 제 자리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