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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5.07.17. 새벽예배 - 성경읽기와 묵상(사무엘하 20-2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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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일 : 2015년 7월 17일 금요일




    어제 본문이 다윗의 귀환을 놓고 벌인 유다지파와 다른 열 지파 사이의 갈등으로 끝이 났다면, 오늘 본문은 세바라는 사람의 반역 이야기로 이어지고 있는데요. 얼핏보면 전혀 다른 문제인 것 같지만 이 두 가지는 완전히 똑같은 이유로 벌어진 일입니다. 우리가 이스라엘이라고 하면 항상 하나가 되어서 서로 아끼고 사랑하며 서로를 위해서 헌신하며 살았을 것 같지만, 우리가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이스라엘은 단 한 번도 그렇게 산 적이 없었습니다. 이들 사이에는 항상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 갈등 중에서도 가장 큰 갈등은 항상 왕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다윗은 유다지파 출신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다지파는 무조건 다윗 편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지파는 유다지파가 중심에 서는 것을 끝내 못 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항상 갈등하고 결국 솔로몬이 죽고 난 후에는 두 나라로 쪼개지고 맙니다. 그리고, 그런 분단은 두 나라가 망할 때까지 계속됩니다. 


    특히 베냐민 지파는 유다지파와 다윗에 대해서 깊은 피해의식과 원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자기들 지파에 머물러 있어야 할 왕권을 유다지파와 다윗이 빼앗아 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바의 반란은 단순한 불량배의 반란이 아니라 바로 그런 상황에서 벌어진 복수였던 셈입니다. 다윗과 유다지파를 곱게 보지 않고 있었던 나머지 지파에 속한 일부사람들은 세바를 지지했습니다. 다윗은 이 일을 해결하려고 아마사라는 사람을 시켜 유다지파를 모두 불러모으려고 했지만 그 또한 실은 다윗의 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시간을 끌었습니다. 한시가 급한데 말이죠. 결국 아마사는 요압에게 목숨을 잃게 되지만 그러는 동안에 세바는 세력을 모아서 벧마아가에서 스스로 왕이 되었습니다. 그를 뒤쫓아간 요압과 군대는 세바가 들어가 있는 성을 통째로 헐어버리려고 했습니다. 그 때 그 성 위에서 한 여인이 등장하여 상황을 해결합니다. 유서깊은 하나님의 성읍을 이런 식으로 헐면 안된다고 요압을 설득한 후에, 다시 자기 성읍사람들을 설득해서 결국 세바의 목을 내어주고 이 모든 혼란을 종결시키게 됩니다. 


    다윗, 세바, 그리고 벧마아가 아벨 성의 여인과 그 성읍 사람들… 이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지키고 싶어하고 되찾고 싶어하는 것이 있었던 사람입니다. 다윗은 왕권을 지켜야 했습니다. 세바는 빼앗긴 왕권을 다시 찾고 싶어했구요. 성읍의 지혜로운 여인과 그 성읍사람들은 자기들의 성읍을 지키고 싶어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다 그것을 중심으로 움직였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결국 오늘 본문 말씀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그런 결론에 이르게 한 것입니다. 


    우리는 대개 이스라엘의 역사를 생각할 때, 뭔가 아주 특별한 방식으로 흘러갔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이스라엘의 역사라고 별다르지 않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다른 나라의 역사와 전혀 다른 것이 없습니다. 거기에는 복잡한 정치적인 관계가 있고, 이권이 있고 거기에 따라 니편 내편이 분명하고 원한이 있고 배반과 배신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서로 죽고 죽이는 살벌함이 있지요.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하나님이 역사에 개입하시고 그 역사를 하나님의 뜻대로 이끌어 가신다는 증거가 보여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래서인지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는 이스라엘 사람들도 그저 그렇게 눈에 보이는 대로, 자기 이익과 관계에 따라서만 움직이고 있고, 그런 모습들이 만들어 내는 그리 아름답지 못한 흔적들만이 그들이 살아간 이야기 안에 가득한 듯이 보입니다. 


    그렇지만 이 모든 일들이 끝난 후에, 성경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또 하나의 이야기는 분명히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직접 이끌어 가신 역사였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정확하게 언제인지 모르지만 다윗의 시대에 삼년 연거푸 심각한 흉년이 든 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기브온 사람들과 관련된 일 때문이었습니다. 성경이 분명히 말하고 있는 대로 기브온 사람들은 원래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닙니다. 원래는 아모리 사람들이었는데 여호수아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과 화친을 맺고 이스라엘을 섬기게 된 그런 사람들입니다. 이 관계는 꼭 지켜야 하는 언약으로 묶여 있는 관계이기 때문에 함부로 깨뜨릴 수 없는 그런 관계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그 관계를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기브온 족속들을 죽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일을 문제 삼으셨고, 그렇게 하는 것이 심각한 일이라는 것을 알려 주시기 위해서 삼년의 흉년을 주신 것이었습니다.  물론 우리는 사울이 언제 기브온 족속들을 죽였는지 그것은 알 수 없습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으니까요.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히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일 때문에 생겨난 기브온 족속들의 한을 풀어주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다윗이 기브온 족속들의 요구를 들어주고서야 그 흉년이 끝날 수 있었습니다. 


    성경에 갑자기 이 이야기가 등장하는 것은 분명히 다윗이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일그러진 과거의 흔적들을 지우고 나라를 바로 세운 이야기를 들려주려는 것이지만, 이 이야기는 동시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역사에 직접 개입하시고 그 안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시는 분이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흉년을 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그만큼 언약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언약백성인 이스라엘이 하나님처럼 언약에 신실한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자가 그 언약을 그야 말로 종이장처럼 가볍게 여기고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은 기브온 사람들을 함부로 죽였고 하나님께서는 사울의 뒤를 이어 왕이 된 다윗에게 그 문제를 분명하게 해결하라고 요구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인 이스라엘의 역사는 우리가 기대하는 것과는 달리 다른 나라의 역사와 외견상 거의 차이가 없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그 역사는 결코 거룩한 역사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복잡한 정치적인 관계와 이권, 힘의 논리, 그리고 사람들의 이기심과 공명심이 얽히고 섥혀 만들어 낸 그다지 멋지지 않은 역사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의 역사와도 비슷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도 그렇습니다. 이 세상이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거기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 같고 계신다고 해도 별로 그 역사에 개입하지 않으시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래서 진지한 사람들은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역사를 주관하신다면 왜 이 세상의 모습이 이러냐고 하나님께 항변하기도 합니다. 또 우리 자신의 삶을 보아도 비슷하지요.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우리 삶에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개입하시고 역사하시는 증거가 쉽게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성도들은 분명히 확신하고 있어야 하고 또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여겨지는 그 상황이나 순간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하나님의 자리에 계시면서 온 세상과 우리의 삶을 섭리하고 계시며, 결정적인 순간에는 이 세상의 역사와 우리 개인의 삶에 개입하셔서 하나님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인 우리에게는  그런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백성답게,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며 살아가기를 원하시고 또 그렇게 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성도들의 어려움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때로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고, 또 하나님이 다스리지 않으시는 것 같은 그런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의식하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그렇게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또 믿지 않는 사람들이 사는 것과 다른 방식으로 살기 때문에 세상과 구별되어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눈을 뜨고 세상을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 같은 세상을 여전히 하나님께서 다스리고 섭리하고 계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이 요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귀하고 책임있는 삶,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항상 믿음의 눈을 뜨고, 믿음을 따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서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세상 속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따라 살아가는 거룩하고 아름다운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