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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5.07.26. 주일오전 - 그들의 병거를 불사르라(여호수아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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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본문 : 여호수아 11장 6-15절




     사람들은 저마다 무언가 두려워하는 것들을 가지고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두려워하는 것들 중에는 정말 그게 무서워서 무서워하는 것도 있지만 너무 좋기 때문에, 그리고 너무 좋아하기 때문에 두려워 하는 것도 있습니다. 모두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남자는 나이가 들수록 점점 아내가 두려워진다고들 하는데요. 이것은 아내가 정말로 무서워서 무서워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아내가 너무 좋으니까, 너무 필요하니까, 정말 중요한 존재이고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으니까 무서워하는 것입니다. 물론 정말 아내가 무서워서 아내를 무서워하시는 놀랄 경(驚)자를 쓰시는 경처가들도 계시지만 말이죠. 사람이 좋아하는 것과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두려워 한다는 것. 이게 굉장히 아이러니한 일처럼 들리지만 사실 사람들이 정말 무서워하는 것들은 대개 이런 것들입니다. 돈도 무서워하고 힘도 무서워하고 사람도 무서워하고 또 세상도 무서워합니다. 사실 많이 좋아하는 것들은 그만큼 무서워하는 것들이기도 합니다. 물론 두려움이 향하는 방향은 반대입니다. 옆에 있어서 두려운 것이 아닙니다. 가지지 못할까 두려워 하고, 떠날까 두려워 합니다. 잃어버리게 될까봐 두려워 합니다. 이렇게 방향이 반대이기 때문에 내가 그것을 두려워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지, 사실 우리가 정말로 두려워하는 것들은 이런 것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런 두려움에 대해서 굉장히 중요하게 다룹니다. 사람은 항상 두려워하는 대상에 집착하게 되고, 거기 묶여서 살아가기 때문에, 사탄이 그것을 이용할 때, 그 계략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되면 자기도 모르게 사랑과 두려움을 혼동하면서 그것을 섬기는 존재로 전락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이라는 선물을 우리에게 주신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참 믿음만이 우리에게서 일런 두려움을 내어쫓는 능력이 되고 그래서 우리를 두려움에서 풀어주어서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영광스러운 삶을 살게 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메롬물가에 진을 치고 있는 어마 어마한 숫자의 기병들과 병거들. 그 앞에서 여호수아는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여호수아에게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들로 말미암아 두려워 말라 내이 이맘때에 내가 그들을 이스라엘 앞에 넘겨주어 몰살시키리니…” 하나님께서는 그 전쟁이 가지고 있는 객관적인 조건에 대해서는 한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 앞에서 이스라엘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숫자는 얼마나 되며 무기들은 또 어떠한지 그런 것들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싸울 것이고 내가 승리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그 전쟁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전쟁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주셨습니다.  그 모든 내용들이 ‘내가 그들을 이스라엘 앞에 넘겨주어 몰살시키리니…’라는 하나님의 한 마디 말로 다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뒤에 이런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너는 그들의 말 뒷발의 힘줄을 끊고 그들의 병거를 불사르라” 그냥 지나치면 그냥 지나칠수도 있는 말씀이지만, 사실 이것은 전쟁이라는 상황을 놓고 보면 말이 안되는 요구였습니다. 여러분, 지금 여호수아가 무엇 때문에 두려워 하고 있습니까? 수많은 기병들과 병거들 때문입니다. 그게 여호수아가 가진 두려움의 주된 이유였습니다. 그렇지만 만약 전쟁에서 이기게 되면 그 모든 말들과 병거들은 모두 이스라엘의 차지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고스란히 이스라엘의 막강한 전력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그 어떤 적들과 붙어도 대등한 위치에서, 아니 유리한 위치에서 전쟁을 치를 수 있을 것이고, 그러면 더 이상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딱 한 가지를 지시하시면서 이상하게도 후에 그런 역할을 하게 될 말 뒷발의 힘줄을 끊고 병거를 불살라버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그 말씀에 대해서 한 마디 말도 덧붙이질 않았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가나안 북쪽지역 연합군을 습격했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그 모든 병사들을 이스라엘 백성들 손에 넘겨주시자 그들 모두를 괴멸시키면서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모든 말들의 뒷발의 힘줄을 끊고 병거를 불살라 버렸습니다.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하나님께서도 참 이상하고 어리석은 요구를 하신 것이고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또한 똑같은 행동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전쟁 이야기를 읽어보면 오늘 우리가 집중하고 있는 ‘마병과 병거, 말과 병거’에 대한 이야기가 세 번 등장합니다. 북쪽 가나안 족속들의 연합군의 군사력을 설명할 때 한 번, 승리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한 번, 그리고 9절에서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명령대로 했다는 것을 이야기할 때 또 한 번, 이렇게 세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성경이 하나의 이야기 속에서 어떤 말을 반복하는 이유는 우리에게 그것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입니다. 또 그것이 그 말씀을 푸는 중요한 열쇠 노릇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 말씀 속에서 제일 중요한 말과 본문을 푸는 열쇠가 바로 ‘말과 병거’라는 두 단어가 되는 셈입니다. 


     그렇다면 왜 오늘 본문 말씀에서는 왜 말과 병거가 그렇게 중요한 역할을 하며, 하나님께서는 말의 뒷발 힘줄을 끊고 병거를 불사르라고 하셨을까요? 우리가 이것을 이해하려면 신명기 말씀으로 가 봐야 합니다. 신명기는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 백성들인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법인 율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일반 백성들 뿐만 아니라 아직 등장하려면 몇 백 년이나 남은 왕들에게 주는 주의사항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명기 17장에 나와 있는 왕에 대한 주의사항 중에서 오늘 본문과 관계가 있는 부분만 읽어드리겠습니다. 16절입니다. “그는 병마를 많이 두지 말 것이요 병마를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하지 말 것이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후에는 그 길로 다시 돌아가지 말 것이라 하셨음이며…” 하나님께서는 미래에 이스라엘의 왕이 될 사람에게 금하신 것은 세 가지였습니다. 그런데, 그 중의 하나가 바로 병마를 많이 두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의 뒷발 힘줄을 끊으라고 하신 것과 병거를 불사르라고 하신 것, 그리고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말씀에 그대로 순종한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우선 하나님께서 말을 모으는 일을 금하신 첫번째 이유는 신명기 말씀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옛날에 우리나라에서 말하면 제주도였습니다. 지금도 제주도에 가면 승마하는 곳이 많을 정도로 말과 제주도는 관계가 깊지요. 그런데, 고대의 근동지방에서는 말하면 애굽이었습니다. 애굽에 말이 많았을 뿐만 아니라 좋은 말은 모두 애굽에 있었습니다. 그러니 많은 말을 구하려면 애굽에 사람을 보내야만 하고 또한 애굽과 친하게 지내야 합니다. 실제로 열왕기상을 보면 솔로몬에 대한 이야기 속에 이 두 가지, 그러니까 솔로몬이 수많은 말과 마병을 두었다는 이야기와 그가 애굽의 공주와 정략결혼을 했다는 두 가지가 연결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정말 정말 싫어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이 병마를 많이 가지는 것도 싫어하셨지만, 그것을 얻기 위해서 이미 떠나온 애굽으로 되돌아가 애굽사람들과 교류하게 되는 것은 더욱 더 싫어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면 겨우 구원해 내서 하나님 백성으로 만들어 가고 있는 이스라엘이 또 다시 애굽적인 삶의 방식과 가치관을 배울 것이 뻔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또 다른 문제와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우리가 위에서 살펴 보았듯이 그 당시 병마와 병거는 군사력 그 자체였습니다. 지금이야 말이 뭐가 대단한가 싶지만 당시 기마병들은 그야 말로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들 앞의 보병들은 그야 말로 탱크 앞에 선 소총수들과 같은 존재였으니까요. 그런데, 이 말들이 병거와 결합되면 이것은 훨씬 더 무시무시한 무기가 됩니다. 이것은 마치 땅에 있는 폭격기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이 병거에는 대개 두 사람이 같이 타게 되는데, 한 사람은 앞에서 말을 몰면 나머지 한 사람은 자유롭게 주변에 있는 적들을 공격하게 됩니다. 게다가 병거는 방패와 바퀴에 달린 칼이나 창 같은 든든한 방어시스템까지 갖추고 있으니 그 주변의 적들은  질주하는 병거 앞에서 그저 추풍낙엽같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왕들은 저마다 더 많은 병마들을 확보하려고 했고, 병거들을 갖추려고 했습니다.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선택입니다. 그것보다 강한 무기가 없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이스라엘의 왕들에게 병마를 많이 모으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이 된 사람이 병마를 많이 모으려고 한다는 것은 곧 이제부터는 하나님께 의지하지 않고 군사력에 의지해서 나라를 강하게 만들고 승리를 이끌려고 생각했기 때문이고, 그래서 정말로 병마를 많이 모으게 되면 반드시 거기 의지해서 나라를 세워가려고 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말이지요. 


    하나님께서 북쪽 이스라엘 연합군을 여호수아의 손에 넘겨 주시면서 말의 뒷 발 힘줄을 끊고 병거를 불사르라고 하신 진짜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여호수아는 그 다음 전쟁부터는 그것을 믿고 거기 의지하느라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의지하지 않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말의 뒷발 힘줄을 끊고 모든 병거를 다 불살라 없애버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여호수아에게 굉장히 커다란 시험거리였을 것입니다. 그도 지금 거대한 민족을 이끌고 또 군대를 지휘하는 지도자인데, 그 말들과 병거들이 자신과 이스라엘에게 얼마나 유용하고 또 힘이 되어줄 지 몰랐을 리가 없었을 테니까요. 그러나, 여호수아는 망설이지 않고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시자 모든 말의 뒷발 힘줄을 끊었고 병거들은 모두 불살라 버렸습니다. 너무 너무 갖고 싶었지만, 다른 사람의 손에 있을 때는 너무나 부럽고 또 그것이 두렵기도 했지만 막상 그것이 자기 손에 넘어오자 그 모든 유혹을 이겨내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랐습니다. 


    그렇다면, 여호수아는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말씀 속에 담긴 의미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의 순종은 생각 없는 기계적인 순종이 아니었습니다. 여호수아의 순종은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잘 헤아린데서 나온 속깊은 결단이었습니다. 저는 우리들이 뻔히 아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못하는 주된 이유 중에 하나가 우리가 순종을 기계적으로 하는 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성도들이 왜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하고 무엇을 위해서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지 그것을 생각하고 깨닫기 전에 그저 기계적으로 순종하려고 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순종해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렇지만, 그저 그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그 반대편의 유혹을 이기기에 충분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뻔히 내가 원하는 것,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눈 앞에 있는데, 그런 이유만으로 유혹을 이기기란 쉽지 않으니까요. 여호수아가 말과 병거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는 분명히 신명기 말씀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하나님께서 진짜로 하고 싶어하시는 말씀을 들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애굽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말에 의지하고 병거에 의지해서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교만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을 무엇보다도 싫어하신다. 그래서 이 명령을 하신 것이다.’라고 이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한 가지, 그는 그 다음에 분명히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렇다, 저렇게 눈에 보이는 저 막강한 기마대를 소유하고 저 병거부대를 갖추는 것보다, 그래서 저런 것들을 믿고 저런 것들을 의지하는 것보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 훨씬 더 힘있고 강력한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이제 막 남쪽 가나안의 연합군들을 우박으로 때려 부수시는 하나님을 경험한 이후이고, 하늘의 해와 달까지 느리게 움직이게 해 주시면서 까지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안겨주신 하나님을 경험한 다음이었으니 여호수아는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을 것이고 그 생각대로 행동하기가 쉬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 아까웠겠지만, 그리고 어떻게 할까 갈등도 없지 않아 있었겠지만, 눈 딱감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던 것입니다. 


    제가 강아지를 키워보니 강아지들은 먹을 것을 입에 물고 있을 때는, 그 아구의 무는 힘이 정말 엄청나게 강해집니다. 그 힘이 얼마나 강한지 절대로 손으로 빼앗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어설프게 그렇게 하려고 하다가는 날카로운 이빨에 상처를 입게 됩니다. 그렇지만, 그런 경우에 그 입을 열게하는 아주 손쉬운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 코 앞에 그 강아지가 더 좋아하는 음식을 들고 살랑살랑 흔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입을 엽니다. 그러면 얼른 물고 있던 것을 치우면 됩니다. 


    이상하게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들 중에는 우리가 하나님께 쉽게 내어드릴 수 있는 것들이 거의 없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처럼 꼭 이것만큼은 안됩니다 하는 그런 것들을 달라고 하시고, 우리가 제일 좋아하는 일들을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가 자꾸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일에 실패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어느 순간 하나님의 뜻과 요구에 순종하는 일이 이상하게 쉬워졌다는 것을 깨닫고 자기 스스로도 깜짝 놀랄 때가 있습니다. “어라! 예전에 안 되던 것이 이제는 되네? 그것도 너무 쉽게 되네!”하고 말이지요. 그렇다면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요? 왜 갑자기 나는 그런 기특한 믿음의 사람이 되어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이전에는 내가 바라는 것, 내가 원하는 것, 그리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이 가장 좋은 줄 알았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내 욕구와 의지를 따라 내 판단대로 사는 것이 가장 기쁘고 행복하고 또 안전한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하다 보니 문득 깨닫게 됩니다. ‘아! 그게 아니구나.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이고. 자신이나 세상에 속한 것들이 아니라 하님을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가장 복되고 기쁘고 행복한 것이구나. 세상에 그것보다 안전한 것은 없구나!’하고 말입니다. 잘 안되던 것이 어느날 갑자기 쉽게 되는 놀라운 변화 뒤에는 반드시 이런 깨달음이 숨어있게 마련입니다. 


    저는 한 사람의 믿음이 성숙해진다는 것은 바로 이런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계속 하나님을 믿으면서 그 믿음 안에서 내가 답이 아니라 하나님이 답이라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되고 그래서 조금씩 조금씩 ‘나’가 아니라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명령들과 말씀 속에 담겨 있는 비밀스런 복과 은혜들을 찾아 누리게 되는 것! 이것이야 말로 신앙생활의 백미이며 최고의 영광과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북쪽 가나안 연합군을 이스라엘의 손에 넘겨 주시겠다고 하시면서 말의 뒷발의 힘줄을 끊으라고 말씀하셨고, 병거들을 모두 불사르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을 그냥 내버려 두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기 의지해서 자기 힘으로 살아가려고 하게 될 것이고, 또 그만큼 하나님을 떠나게 될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렇게 되는 것을 아주 아주 싫어하십니다. 저는 이것을 애굽의 방식을 따라 사는 삶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애굽은 굉장히 많은 신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열 가지 재앙에 동원된 모든 자연물들이 전부 다 애굽의 신들이었을 정도니 신들의 전시관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겉으로는 그래도 그들이 진짜로 섬기는 것은 딱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부유함이고 나머지 하나는 힘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힘을 뒤쫓고 부를 얻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을 굉장히 싫어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그렇게 싫어하시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정말로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힘과 부유함으로 대표되는 이 세상에 속한 것들은 절대로 우리를 정말로 복되게 만들어 줄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아십니다. 그런 것들은 우리를 자유하게 하고 풍성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묶어놓고 계속해서 거기에 얽매이게 한다는 것, 그리고 결국 우리의 사람다움과 온전함을 망쳐버린다는 것을 잘 아십니다. 그래서 그것을 그렇게 싫어하시고 금하시는 것입니다. 남자아이들은 대개 컴퓨터 게임을 많이 좋아합니다. 저희 집 아이들 역시 그런데요. 사실 부모로서 아이들이 그것을 그렇게 하고 싶어할 때면, 그냥 하루 종일이라도 하도록 내버려 두고 싶습니다. 그러나, 부모이기 때문에 그런 마음을 잘 다스려 내야 합니다. 그리고, 마음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아도 적당한 수준에서 끊어 주어야 합니다. 왜 그럴까요? 게임은 지나치면 중독이 되게 마련이고, 그러면 그것 때문에 아이의 정상적인 삶이 힘들어 지기 때문입니다. 꼭 게임 자체가 싫고 나빠서가 아니라 그 게임이 만들어 내는 심각한 부작용 때문에 부모들은 게임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발과 병거를 모두 없애 버리라고 하셨던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게 좋은 줄은 하나님도 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기 의지하고 거기 매달려서 하나님을 떠나고 다시 애굽의 삶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다시 자신을 세상의 종된 상태로 만드는 것을 싫어하셨던 것입니다. 


    또 한 가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말과 병거에 의지하는 나라가 되는 것을 그렇게 싫어하셨던 이유는 우리가 너무도 귀한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우연히 생겨난 별 것 아닌 존재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형상을 담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 속에는 아버지의 성품이 있습니다. 아버지의 고상함이 있구요. 아버지의 영광이 있습니다. 또 그 분의 귀함이 있습니다. 그런데요. 그런 우리가,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어 놓은 우리가 전혀 스스로를 만족시킬 수 없는 것들, 인생을 걸 가치가 없는 것들, 우리의 존재를 더 아름답고 풍성하게 하기는 커녕 심각하게 해를 입힐 수 있는 것들을 따라 다니느라고 그 귀한 인생을 낭비하고 산다면 우리 아버지는 과연 그 일을 기뻐하실까요? 우리가 그렇게 사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실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진리 속에는 우리 삶을 위한 아주 귀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형상으로 만드신 것은 우리가 우리의 원형이요 틀이신 하나님을 더 많이 생각하고 더 많이 바라보며 더 많이 사랑해서 더욱 더 하나님을 닮아가게 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더욱 더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존재가 되라고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그래야 이 세상이 하나님을 닮은 하나님의 자녀들로 꽉 차게 되고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보고 싶으셨으니까요. 그런데, 이렇게 귀한 우리들이 하나님 아니라 하나님보다 못한 것들, 정말 비교할 수도 없이 가치가 낮은 것들을 바라보며 거기 의지해서 살아가는 것을 볼 때, 하나님이 아니라 그런 것들을 닮아갈 때, 하나님은 마음이 상하시는 것을 넘어서서 자존심이 상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망가지는 것, 그리고 그 형상을 담고 있는 귀하디 귀한 자녀들이 망가지는 것을 보셔야만 하니까요.


    오늘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에게도 병마와 병거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가지기를 소망하는 것이고, 의지하며 살기를 원하는 것이며, 나의 힘과 자랑거리로 삼고 싶어하는 것들입니다. 온 세상이 그렇게 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도 은연 중에 따라가고 있는 그런 것들이고, 너무 좋기 때문에 두려워하는 그런 것들입니다. 그렇지만 성도 여러분, 그런 말과 병거들을 챙기고 거기 의지하며 사는 것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것이어도 우리들에게까지 그런 것은 아닙니다. 오늘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이 기본적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다시 주신 귀한 삶을 낭비하며 성도된 복을 놓치고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고 하나님의 형상을 담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과 병거가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 해야 하고 또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비로소 나를 묶고 있고 두렵게 만드는 것들로 부터 풀려나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순종하며 사는 자유롭고 복된 삶을 살 수 있고, 또 그 속에서 세상에 속한 추한 것들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형상을 닮아갈 수 있습니다. 


    성도는 하나님만 사랑하며 또 하나님만 두려워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을 자신의 목표와 복으로 알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정말로 제대로 잘 되기를 바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분을 닮아서 영광스러운 존재로 빚어져 가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말의 힘줄을 끊고 병거를 불사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나에게 있는 말과 병거가 무엇인지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사랑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두려워하게 만드는 것, 나를 집착하게 만들지만 결코 자유롭게 해 주지 않고 더 목마르게 하는 것. 그것이 무엇인지 한 번 돌아보시고, 이제 그것에 대한 사랑과 집착을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돈입니까? 학교입니까? 직장입니까? 자녀입니까? 아니면 건강이나 노후준비입니까? 이제 그 자리에는 하나님을 모셔놓으시고, 그 모든 것들은 전부 하나님의 손에 쥐어 드리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이렇게 말의 힘줄을 끊고 병거를 불사르는 마음으로 믿음의 길을 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전부가 되어 주실 것이며 우리는 또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형상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항상 우리를 만족케 하시는 하나님으로 만족하며 아침마다 자기 안에 맺혀져 가는 주님의 형상으로 기뻐하는 귀하고 복된 삶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