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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5.08.18. 새벽예배 - 성경읽기와 묵상(열왕기하 11-1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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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일 : 2015년 8월 18일 화요일




북쪽 이스라엘과 남쪽 유다는 둘로 쪼개진 후의 대부분의 시간 동안은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전면전은 아니었지만 전쟁을 벌이기도 하고 대립관계 속에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대로 사이가 좋아진 적도 있었습니다. 북쪽 이스라엘은 요람이 다스리고 남쪽 유다는 아하시야가 다스리던 시기에는 서로 병문안을 갈 정도로 관계가 회복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일 때문에 아하시야는 객지에서 목숨을 잃고 맙니다. 예후가 반란을 일으켜 요람을 살해할 때, 아람 왕 하사엘과의 전투에서 부상을 당한 요람을 병문안 갔다가 거기서 요람과 함께 예후에게 살해를 당하고 맙니다. 


이 일은 북쪽 이스라엘의 정치적이고 영적인 상황을 뒤바꿔 놓았습니다. 그 악명높던 이세벨이 목숨을 잃게 되었고, 아합의 아들들 모두가 살해 되었으며 바알을 섬기는 사람들 모두가 처형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때 아하시야가 죽었기 때문에 남쪽 유다도 덩달아서 정치적으로는 정말 혼란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그 환란의 중심에는 놀랍게도 아하시야의 어머니인 아달랴가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왕이었던 자기 아들 아하시야가 비명횡사한 소식이 아달랴에게 전해지자 아달랴는 곧바로 아하시야의 자손을 모두 죽였습니다. 정말 끔찍하지요. 아하시야의 자녀들이라면 아달랴의 손주들입니다. 그런데, 아달랴는 손주들을 모두 죽였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어찌 그럴까 싶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저도 뭐 대단한 것을 가져 본 적은 없지만, 그런 것들을 가지려고 하고 또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살펴보면서 사람들이 가지기를 그토록 소망하고 바라는 것들, 그리고 또 남이 가지고 있을 때 부러워하는 것들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거듭 거듭 깨닫게 됩니다. 그런 것들을 가지고 싶은 마음을 통제하지 못하면 결국은 자신이 그것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들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는 자기 자신이나 그 어떤 것이 아니라 바로 그런 것들을 소유하고 또 지키는 것을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 더 중요하고 가치있는 일로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 때부터 이 사람은 사람을 사랑하고 그런 것들을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들을 사랑하고, 그런 것들을 더 많이 가지고 또 끝까지 지키기 위해서 사람들을 사용합니다. 때로 사람이 그것을 소유하고 또 지켜내는 일에 방해가 되면, 그 사람을 헤치고 때로는 죽이는 일까지 서슴지 않습니다. 손주들을 사랑하는 할머니의 마음은 얼마나 자애롭고 사랑넘쳐야 합니까? 이 세상에 그야 말로 가장 조건 없는 사랑이 바로 할머니의 손주들에 대한 사랑이지만 돈, 권력, 그리고 명성같은 것들을 사랑하게 되면 그것은 손주들을 향한 사랑도 능가하게 됩니다. 가지고 싶고 또 지키고 싶은 돈, 권력, 명성 같은 것들이 더 많고 클수록 더 쉽사리 그렇게 되지요. 


아달랴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아달랴의  행동은 즉흥적인 행동이 아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주 예전부터 기회가 오면 왕이 되어 보겠다는 욕심을 품고 때를 기다려 왔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니 아들의 사망소식을 듣자 마자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지도 않고 그 아들의 자녀들, 자기 손주들을 모두 죽이는 만행을 저지르고 스스로 왕의 자리에 앉았겠지요. 마음에 품지 말아야 할 욕망, 가지지 말아야 할 욕심을 계속 품고 있는 일은 이렇게 위험합니다. 다스리지 않고 내려놓지 않은 욕심은 결국에는 집착이 되고, 집착이 되면 그것을 이루기 전에는 다른 어떤 것으로도 만족을 느낄 수도, 그리고 행복해 질 수도 없는 이상한 상태가 되어 버립니다. 크기와 정도만 다를 뿐, 그렇게 되면 아달랴의 일이 남의 일이라고만 할 수 없는 그런 일들이 벌어집니다. 사실 이 세상에 벌어지는 비극들은 한 사람이나 혹은 어떤 집단이 그런 집착에 빠진 나머지 붙들지 말아야 할 것을 붙들고 끝까지 그것을 이루려고 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달랴가 저지른 일같은 이런 일들을 성경이나 현실 속에서 볼 때, 그저 그것을 비난하고 혀를 차는 일에서 그치는 대신에 혹시 우리 속에도 그런 것들은 없는지 잘 살펴 보아야 합니다. 바로 그런 욕망과 집착들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게 하고 사람들을 불행에 빠뜨리는 그런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자기 자신도 망가 뜨리고 말입니다. 


이렇게 여왕의 자리에 앉은 아달랴로 인해서 남쪽 유다까지 완전히 망가져 버리게 될 그런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은 6년만에 다시 정상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 난리 통에  살아남은  요아스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아스는 7살 때 아달랴를 왕위에서 내쫓고 다시 이스라엘의 왕좌를 잇고 유다의 역사의 물줄기를 그래도 정상이라고 할 수 있는 방향으로 다시 되돌리게 되는데요. 그가 이런 역할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두 사람 덕분이었습니다. 아달랴가 왕위를 찬탈할 당시 제사장이었던 여호야다와 요아스의 누나였던 여호세바 덕분이었습니다. 누나는 난리통에 동생인 요아스를 빼돌려 성전에 숨겨 주었고, 여호야다는 그런 요아스를 육년 동안이나 숨겨 키워주면서 유다의 왕위를 요아스에게 되돌려주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아하시야의 죽음이라는 상황은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이 하나의 상황은 사람들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끌어 갔습니다. 아달랴는 손주들을 모두 죽이면서까지 자기 욕심을 채우려고 하였고, 여호세바와 여호야다는 자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다 성공한 듯이 보였던 아달랴의 악한 계획을 제자리로 되돌려 놓았습니다. 그런데, 세상의 모든 일이 이런 것 같습니다. 발생하는 상황은 하나이지만 그런 상황들은 언제나 사람들을 이렇게 또 저렇게 갈라놓지요. 그런 상황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를 드러내게 만들고 그런 상황 속에서 때로는 다른 사람이나 하나님 중심으로, 그리고 때로는 자기 중심으로 움직이게 만듭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역사는 자기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나 하나님 중심으로 움직인 사람들을 통해서 회복되고 다시 제 방향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물론 그 뒤에서 그 모든 것들을 섭리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말이지요. 


우리도 개인적인 삶의 자리를 제외하면 모두 다 하나의 동일한 상황과 현실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대한 민국의 정치, 사회, 문화적인 상황 그리고 한국교회와 광현교회라는 영적인 환경 등. 우리는 똑같은 상황과 현실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과 현실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우리 자신의 태도와 행동을 정하라고 요구합니다. 사실 그런 요구를 하는 것은 그런 상황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이시지요.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실까요?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이어가고 바로 세우는 역할을 하면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욕심이나 욕망을 따르지 않고 그 대신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더 소중히 여기면서 그런 아름다운 역할을 감당하며 살아가는 것을 바라십니다. 그래야,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도 영광이 되고 우리 자신에게도 영광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스스로를 하나님 편에 세워서 하나님 나라를 위한 긍정적인 역할을 감당하며 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