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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5.08.28. 새벽예배 - 성경읽기와 묵상(열왕기상 12-1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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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일 : 2015년 8월 28일 금요일




우선 12장부터 간단하게 살펴 보겠습니다. 역대상 12장은 다윗이 사울을 피해다닐 때부터 이모 저모로 다윗을 도와 주었던 용사들과 나중에 다윗을 왕으로 세우기 위해 모여들었던 각 지파에 속한 병사들의 숫자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부분은 12장 23절부터 나오는 각 지파에서 차출된 병사들의 특징인데요. 성경은 각 지파 소속의 병사들의 특징을 하나 하나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떤 일에 능한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좋은 교회의 모습이 드러나 있습니다. 모두가 다 달라도 한 교회가 교회답게 세워지려면 각각의 은사와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모두 필요하고 이들 모두가 협력하여 자신이 맡은 역할을 잘 해내야 합니다. 그럴 때,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과 군대로 제대로 기능할 수 있습니다. 


또 이 모든 병사들은 헤브론에 모여서 다윗을 왕으로 삼았는데, 이 때 거기서는 사을 동안 파티를 벌였습니다. 12장 40절을 보면 이 때 이스라엘 중에는 커다란 기쁨이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 모습은 사울이 왕이 되어 다스릴 때는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만큼 왕이 누구냐가 중요한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교회와 성도의 삶 속에서는 하나님만이 왕이 되실 수 있고 또 하나님만이 왕이 되셔야 합니다. 그럴 때, 교회와 성도의 삶은 잔치를 하는 듯한 그런 모양이 될 수 있고, 그런 복이 지속될 수 있습니다. 본디 참된 기쁨이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니까요. 


다윗이 왕이 된 것을 기록한 다음, 역대상이 다윗에 대해서 처음 기록한 것은 그가 법궤를 다윗 성으로 옮겨오려고 시도했던 일이었습니다. 정확하게는 그렇게 했다가 실패한 일인데요. 다윗 뿐만 아니라 백성의 모든 지도자들과 백성들 또한 그 일을 너무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은 한 사람이 죽는 비극과 실패로 끝나고 맙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왕이 객지에 있는 것 같아 보이는 하나님의 법궤를 나라의 중심이 되는 도시로 가져 오는 일은 누가 보아도 나쁜 일이나 잘못된 일은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기뻐하지 않으셨고 결국 함부로 법궤에 손을 댄 웃사가 그 몸이 찢겨 죽는 일이 발생하게 되고, 그 일 때문에 온통 잔치집 분위기였던 법궤를 운반하는 행렬은 갑자기 초상집 분위기가 되고 다윗 또한 왕으로서의 권위에 손상을 입게 되었고 백성들 또한 크게 상심하게 되었습니다. 그 일은 지금 다윗이 하는 일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만천하에 드러내고 백성들의 충심에 물을 끼얹는 역할을 했으니까요. 결국 그 일로 법궤는 오벧에돔의 집으로 옮겨졌고 거기서 석 달을 머물게 되는데, 이 때는 하나님께서 오벧에돔의 집에 크게 복을 내려 주셨습니다.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와 말씀, 그리고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은혜를 상징하는 물건이기 때문에, 그 법궤는 항상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복과 능력, 그리고 은혜의 원천의 역할을 합니다. 그 법궤가 오벧에돔의 집에 있을 때처럼 말이지요. 그렇다면 왜 다윗과 백성들이 그 법궤를 옮기려고 할 때는 왜 하나님이 노하셨고 또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을까요? 우리가 13장에 나와있는 이야기를 가만히 살펴 보면 그 이유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먼저 다윗의 말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는 법궤를 옮기자고 말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궤를 우리에게로 옮겨오자 사울 때에는 우리가 궤 앞에서 묻지 아니하였느니라” 이 말 속에는 무슨 문제가 있을까요? 그것은 법궤를 옮겨오자고 백성들을 설득하는 다윗의 말 속에 ‘우리’라는 말이 너무나 많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 말의 중심, 그러니까 이 일의 중심은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라고 표현된 다윗과 백성들, 더 정확하게 좁혀서 말하면 다윗 자신이 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라는 말은 굉장히 강한 말입니다. 이 말이 어떤 사람들을 묶으면 그 사람들은 굉장한 결속력을 가지게 되지요. 다윗은 자신을 왕으로 세우고 싶어하는 백성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 속에 왕이 되었습니다. 그런 다윗에게, 그리고 그런 백성들에게 ‘우리’는 굉장한 힘이고 권력이었습니다. 다윗은 지금 자신이 중심이 되어 있는 ‘우리’를 설득해서 ‘우리’를 위한 일을 하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우리’라는 말을 여러번 사용해서 백성들을 설득하면서도 법궤를 옮겨오는 일을 위해서 단 한 번도 하나님께 허락을 받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법궤를 그저 자신이 마음대로 해도 되는 어떤 물건처럼 취급했습니다. 이런 다윗의 마음의 태도는 웃사가 죽고 나서 보인 다윗의 태도에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는데요. 11절과 12절을 보시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웃사의 몸을 찢으셨으므로 다윗이 노하여 그곳을 베레스 웃사라 부르니 그 이름이 오늘까지 이르니라 그 날에 다윗이 하나님을 두려워 하여 이르되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궤를 ‘내 곳’으로 오게 하리요 하고’  


다윗은 하나님의 행동에 대해서 화를 냈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정도라면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궤를 ‘내 곳’으로 오게 할 수 있겠느냐고 투덜거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궤를 옮기라고 하신 적도 없었고 또 그 궤를 다윗이 ‘내 곳’ 그러니까 다윗이 중심이 되어 있고 다윗이 주인이 되어 있는 그런 곳으로 가지고 가라고 하신 적은 더더욱 없으셨습니다. 그런데, 자기 마음대로 궤를 옮기다가, 그것도 함부로 궤를 손으로 만진 사람을 그렇게 벌 주셨다고 해서 하나님을 향해 화를 냈습니다. 정말 얼토당토 않은 일이지요. 그만큼 이 당시 다윗은 백성들의 인기를 한 몸에 독차지 하면서 왕이 된 다음에 교만해져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다윗의 교만에 대해서 브레이크를 거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개 하나님을 향한 충심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항상 이야기 합니다. 그것은 바로 그것이 하나님을 진실로 존중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입니다. 이 중에서도 그것이 진짜로 하나님의 뜻인지를 묻고 그 뜻대로 행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렇게 보면 바울은 사실 모든 면에 있어서 실패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중심도 하나님을 향해 있지 않고 자신을 향해 있습니다. 하나님을 존중하지 않았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는 커녕 그 뜻을 묻지도 않았습니다. 그 모든 것들이 그가 하나님을 향해서 화를 낸 그 모습 속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습니다. 


사람은 얼마나 어리석은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위로해 주시고 하나님께서 높여 주시면 그것에 대해서 겸손히 감사하기 보다는, 오히려 자신이 중심을 차지하려고 하고 자신이 하나님처럼 되려고 합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낮아지는 시험보다는 높아지는 시험에 더 많이 탈락하게 됩니다. 특히 우리는 신앙과 관련된 일들, 하나님과 관련된 일들을 할 때, 더 많이 조심해야 합니다. 그런 일을 하는 것 자체가 아니라 정말 그 중심이 하나님을 향해 있는지, 또 그 일 자체가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인지 그런 것들을 먼저 확인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일은 하나님을 위한 일인 동시에 우리들을 위한 일이 될 수 있습니다. 


무슨 결정을 하고 무슨 일을 하기 전에 정직하게 하나님의 뜻을 묻고 그 뜻에 순종하는 일을 먼저 챙기고 그 일을 하는 자신의 마음을 먼저 챙기셔서 그 일이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고 자신에게는 참 기쁨과 믿음의 표현이 되는 그런 일이 되게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