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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5.09.13. 주일오전 - 샘물도 내게 주소서(여호수아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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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여호수아 15장 13-19절


 


지난 주일에 우리는 어떻게 해서 정통 이스라엘 자손도 아닌 갈렙이 가나안 땅의 최고 요충지인 헤브론 땅을 얻게 되었는지를 살펴 보았습니다. 지난 주일에 다 말씀드리지 못했지만 헤브론은 이스라엘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중요한 곳입니다. 우선 헤브론에 있는 막벨라 굴은 아브라함 가문의 가족묘지입니다. 이곳에 아브라함, 사라, 이삭, 리브가, 야곱이 모두 묻혔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이 분배될 때 이 곳은 도피성으로 지정되어 억울한 사람들을 살리고 보호하는 거룩한 땅이 되었고, 나중에 다윗이 왕위에 오른 곳도 바로 이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 곳을 다윗성이라고 불렀고, 우리가 잘 아는 시온성도 바로 이곳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온성은 일차적으로는 다윗이 왕이 되어서 7년 동안 다스린 곳이지만,  영원한 하늘나라와 왕이신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상징하는 그런 곳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보면 이 헤브론은 시대를 넘어서서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게 하는 믿음과 소망의 고향이 되는 곳이기도 합니다. 갈렙은 헤브론의 옛 역사는 알고 있었을지 모르지만 앞으로 헤브론이 그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지, 그리고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그런 엄청난 의미를 지니는 곳이 될지는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 곳은 그런 곳이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 곳이 갈렙의 믿음의 흔적이 남은 곳이기 때문일 것입니. 하나님의 약속을 당장 눈에 보이는 그 어떤 조건이나 위험보다도 더 확실하고 분명한 것으로 믿었던 갈렙의 믿음의 흔적이 그곳에 가장 진하게 남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곳을 모든 성도가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영원한 다스리심을 마음에 그릴 때, 마음 속에 떠올리는 그런 곳이 되게 하셨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바치려고 했던 그 곳이 나중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곳이 되게 하셨던 것처럼 말이지요. 


이것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들이 남기는 삶의 흔적들을 정말 귀하게 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을 보시고 당사자에 세상이 줄 수 없는 귀한 복과 은혜를 주시지만, 그 사람이 남긴 믿음의 흔적을 다른 사람들, 특히 믿음의 후손들의 신앙을 세우는 든든한 터전으로 사용하십니다.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면 훌륭한 믿음의 인물들에게는 거의 예외 없이 자신이 신앙의 멘토로 삼은 믿음의 선배들이 있었습니다. 그 선배들 덕분에, 그 선배들의 어깨 위에서 그들은 그렇게 훌륭한 영적인 인물들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그리 훌륭한 사람은 못되지만 그래도 저에게도 그런 분들이 여럿 있습니다. 물론 그 분들은 저를 모릅니다. 제가 그 분들을 만난 것은 그들의 믿음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그 분들의 책이나 전기, 그리고 설교를 통해서 였으니까요. 


저는 제가 목사로서 가는 길에 대해서 이 길이 맞다는 확신은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확신은 그리 견고한 것이 못됩니다. 어떤 때는 전혀 흔들리지 않는 바위같을 때도 있지만, 어떤 때는 정말 심하게 흔들리는 여린 풀잎 같이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제가 다시 믿음을 추스리고 더 견고한 자리에 설 수 있었던 것은 물론 하나님의 은혜였지만 그런 분들의 은공이 작다고 할 수 없습니다. 특히 요근래만 생각하면 저는 화종부 목사님께 가장 큰 덕을 입었습니다. 그 분은 강남 그것도 반포라는 강남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그런 곳에서 큰 교회의 3대 목회자로 목회하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제가 원래 그 동네에 살았기 때문에 잘 알고 있는데요. 거기 사람들 정말 만만치 않습니다. 우선 이미 손에 쥐고 있는 것이 정말 많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지키고 또 더 키우려는 욕망이 정말 굉장합니다. 그것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라고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가진 것도 많은 데다가 배운 것도 많아서 자기 자신이면 충분하다고 믿으며, 여전히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이 기준이 되어서 살아가는 분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 앞에서 성경을 있는 그대로 설교한다는 것은 정말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성경은 그런 것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해서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살라고 끊임 없이 이야기하니까요. 그런데, 그 목사님께서는 그 곳에서 거의 오차없이 그런 성경적인 설교를 하십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믿는 진짜 성도가 되라고, 땅이 아니라 하늘을 바라보며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살아가는 그런 성도가 되라고, 자신이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는 그런 성도가 되라고 끊임없이 강조하고 또 강조하십니다. 제가 보기에 그건 내가 이 말씀 전하다가 여기서 목회를 하지 못하게 되어도 좋다는 각오가 없으면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인 것 같습니다. 저는 그 분의 설교를 들으면서 제가 목사로서 가고 길이 결코 그릇되지 않았다는 것을 거듭 확인할 수 있었고, 또 이 길을 가기 위한 큰 용기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 분은 저와 상관 없이 저라는 사람이 있는 줄도 모르고 그저 하나님께서 그 분에게 주신 그 자리를 최선을 다해 정직하게 지키고 있지만 그 흔적들이 저와 같은 많은 사람들에게 커다란 힘과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신앙을 지키며 가꾸어 올 수 있었던 것은 누군가의 덕을 입었기 때문이었듯이, 우리들 또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의 신앙에 영향을 미쳐왔고 또 앞으로도 그런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우선 한 교회에서 나와 함께 신앙생활하는 내 믿음의 후배들이 나를 보면서 이런 저런 영향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가 남겨놓았고 또 앞으로 남겨놓게 될 우리의 믿음의 흔적은 우리 후배들이 그들의 신앙을 세워갈 중요한 터전 중의 하나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 자녀들이 내 신앙의 영향을 받을 것입니다. 


예수 믿는 부모들은 누구나 다 내 자녀가 좋은 신앙인으로 자라고 또 세워져 가기를 바랍니다. 그것 때문에 아이들에게 좋은 신앙적인 환경을 제공해 주기 위해서 교회를 옮기기도 하지요. 그렇지만 그러면서도 훨씬 덜 신경쓰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믿는 부모로서 자신이 신앙생활하는 모습이 어떤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신앙생활하는 모습이야 말로 내가 내 자녀를 위해서 제공해 줄 수 있는 할 가장 중요한 신앙의 터전인데도 말이지요. 우리가 우리 자녀들이 하나님 앞에서 영광스럽게 세워져 가기를 원한다면 우리 스스로도 하나님 앞에서 영광스러워져야 할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는 우리 삶이 이루어져 가는 장소와 시간 속에 우리 믿음의 흔적들을 남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자녀들을 위한 가장 중요한 신앙의 터전으로 자리 잡아 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도 여러분, 부모된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잘 믿어야 하지 않을까요?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며, 또 순종하며 사는 것이 이런 것이다, 이렇게 복되고 영광스러운 것이다 하고 우리 자녀들에게 보여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분명히 부족하고 흠도 많을 것입니다. 또 그런 노력이 실패할 때도 있겠지요. 그렇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서 우리가 머문 삶의 자리 자리가 우리 믿음의 아름다운 흔적이 되도록 애써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의 갈렙이 되어서 우리의 헤브론을 넓혀간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헤브론이 우리 후배와 자녀들이 낙심할 때마다 소망으로 바라보는 시온성이 되게 해 주실 것을 기대하고 믿으면서 말이지요. 저는 우리가 남긴 믿음의 흔적들을 하나님께서 분명히 그렇게 사용하실 거라고 믿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렇게 해서 헤브론 산지를 분배받은 갈렙이 이제 그 산지의 성들을 하나 하나 정복해 갈 때 있었던 또 하나의 일화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갈렙이 네가 밟는 곳은 어디든지 너에게 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헤브론 산지로 들어가자 하나님께서는 정말로 그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갈렙이 그 곳에 터줏대감으로 살고 있던 거인 아낙자손들을 그곳에서 몰아내게 해 주신 것입니다. 그 중 대표적인 곳이 바로 기럇 아르바라는 성이었는데, 아르바는 그 지역에 사는 모든 아낙자손들의 할아버지뻘이 되는 사람이었고, 그 성은 그 이름을 따서 이름 붙여진 그런 성이었습니다. 우선 갈렙은 그곳을 점령했고, 그 지역에서 패권을 쥐고 있는 거인 삼형제 세새, 아히만, 달매를 쫓아냈습니다. 그 다음에 목표로 삼은 곳은 바로 드빌, 그러니까 기럇세벨이라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갈렙은 이 성을 자신이 직접 공격해서 빼앗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이 성읍을 점령하는 사람에게는 자신의 딸 악사를 주겠다고 했습니다. 자기가 싸우기 귀찮아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갑자기 겁을 먹었기 때문도 아니었지요. 갈렙이 이런 상을 내걸고 그 성읍을 차지할 사람을 찾은 것은 헤브론 산지를 차지하는 일이 자신과 함께 하는 모든 사람들의 일이 되게 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자신과 함께 싸우는 다른 사람들 또한 믿음을 가지고 주도적으로 하나님의 약속에 참여하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냥 자기가 빼앗아도 되는데, 자기 딸까지 주겠다고 약속하면서까지 그 성읍을 차지할 사람을 찾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참 믿음이 있고 그 믿음의 능력을 아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모습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항상 자신이 누리고 있는 믿음의 능력과 복을 다른 사람들도 함께 누렸으면 하는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든 함께 그 복을 누리도록 도와주고 싶어합니다. 


그 때 그 일을 해낸 사람은 갈렙의 조카인 옷니엘입니다. 옷니엘은 기럇세벨로 올라가서 그 성을 빼앗았습니다. 갈렙도 자신의 약속을 지켰습니다. 자신의 딸 악사를 갈렙에게 주었습니다. 그런데, 갈렙은 기럇세벨을 그에게 주지는 않았습니다. 그 대신 딸과 함께 헤브론 산지 남쪽에 있는 네겝을 주어 그곳으로 보냈습니다. 네겝은 지명이지만, 뜻 자체가 ‘메마른 땅’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말은 주로 남쪽 지역의 황무지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기도 하는데요. 그렇다고 해서 네겝이 아주 쓸모 없는 땅은 아니었습니다. 땅은 거칠었지만 굉장히 중요한 곳이었습니다. 남쪽을 향하는 길, 그러니까 이집트 쪽으로 향하는 모든 길이 이 곳을 통과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그래서 갈렙은 그렇게 자신의 믿음을 증명해 보인 옷니엘에게 그 땅을 맡겼던 것 같습니다. 갈렙과 옷니엘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둘 다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약속을 향해 나아갔고, 그 믿음을 통해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직접 몸으로 경험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사사기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이 옷니엘은 나중에 이스라엘의 첫번째 사사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최고로 악한 메소포타미아의 왕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해 주시기 위해서 선택한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 때, 그렇게 남쪽 네겝으로 간 옷니엘은 그 곳에서 적어도 남쪽 지역에 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질적인 지도자가 되었던 것이지요. 이렇게 보면 어떻게 해서 정통 이스라엘 사람도 아닌 옷니엘이 이스라엘 초대 사사가 되어 곤경에 빠진 이스라엘을 건져낼 수 있었는지, 그리고 그후 40년 동안이나 이스라엘에 평안을 가져다 주는 통로가 될 수 있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네겝에 가서도 기럇세벨을 점령할 때 가졌던 믿음을 잘 지켜 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그렇게 중요한 역할을 맡기셨고, 그를 통해 무너져 가는 하나님 나라의 기둥을 다시 일으켜 세우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중요한 사람은 능력이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 가진 게 많은 사람도 아닙니다. 집안이 좋은 사람도 아닙니다. 하나님께 중요한 사람은 이렇게 끝까지 자기 믿음을 지켜내며 그 믿음을 증명해 내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이 땅에서도 옷니엘처럼 하나님 나라를 위한 영광스럽고 덕스러운 삶을 살아내겠지만, 분명히 나중에 주님 나라가 임할 때, 거기서도 가장 영광스러운 자리에 있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옷니엘은 그가 보인 믿음의 용기로 인해서 가장 중요한 남쪽 지역의 길목인 네겝을 지키는 사람이 되었고, 또 가장 어둡고 어려운 시기에 무려 40년 동안이나 이스라엘을 비추는 빛이 되어 주었습니다. 그만큼 훌륭한 믿음의 사람이지요. 그래서 오늘 본문은 갈렙 이야기와 같은 맥락에서 우리에게 옷니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야이기 속에서 그냥 넘어가면 안되는 사람이 한 사람 더 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아버지가 일방적으로 내건 한 약속 때문에, 또 옷니엘이 전쟁에서 이기는 바람에 어떨결에 옷니엘의 아내가 된 악사입니다. 


아무튼 악사는 그렇게 옷니엘과 결혼을 하고 이제 옷니엘과 함께 네겝지역으로 떠납니다. 그런데, 그러다가 문득 생각합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네겝은 굉장히 건조한 사막이 많은 지역이거든요. 그래서 그런 곳에서는 땅만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 땅이 쓸모있는 땅이 되려면 물이 꼭 있어야 했지요. 그래서 악사는 떠나려다가 말고 말에서 내립니다. 딸의 됨됨이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갈렙은 딸이 왜 말에서 내려오는지 그 이유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악사에게 말합니다. “필요한 게 뭐냐?”하고 말이지요. 악사는 주저 없이 말합니다. “아버지, 땅만 가지고는 안되겠어요. 샘도 주세요. 저 위쪽에 있는 샘과 저 아래쪽에 있는 샘도 함께 주세요.” 그래서 갈렙은 악사에게 그 두 샘을 함께 주었고, 그렇게 옷니엘과 악사는 자신들을 위한 약속의 땅 네겝을 향해 떠나게 됩니다. 


자, 여기까지가 오늘 본문의 이야기인데요. 여러분 잠깐 질문 하나 할까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주인공이 누구이지요?  용기를 내서 기럇 세벨을 차지했고, 결국 악사와 결혼한 사람이 옷니엘이니까 옷니엘이 주인공이지요? 그런데, 여러분이 한 번 찾아 보시겠습니다. 그렇다면 이 옷니엘에 대한 이야기는 어디에 몇 번 나오지요? 17절 딱 한 절에 나옵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 또한 거기 딱 한 번 나올 뿐입니다. 반면에 이름도 굉장히 자주 나오고 그 사람이 한 말까지 한 단어, 한 단어 모두 기록된 사람이 한 사람있습니다. 그 사람이 누굴까요? 악사입니다. 그렇게 보면 이 이야기는 누구를 중심으로 삼고 있습니까? 옷니엘이 아니라 악사입니다. 옷니엘이 기럇세벨을 점령한 이야기의 주인공이 악사라는 것은 조금 이상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그렇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호수아서의 나머지 부분을 주욱 읽다가 보면요. 이것과 굉장히 비슷한 이야기를 하나 더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처럼 그 이야기 속에서도 여인들이 땅을 요구합니다. 그 여인들이 누굴까요? 17장에 나오는 슬로보핫의 다섯 딸들입니다. 요즘에는 딸이 없는 것이 참 애석하고 불쌍한 일로 여겨지지만 그 옛날 유대 땅에서는 아들이 없는 집안이 가장 불쌍한 집안으로 여겨졌던 그런 시절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대부분의 옛날 사회가 그랬듯이 이스라엘 안에서도 유산, 그러니까 땅은 원칙적으로 아들을 통해서만 상속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17장에 나오는 이야기는 오래 전 모세가 아직 살아있을 당시에 요단 동쪽의 땅을 분배해 주었을 때 있었던 일의 후편입니다. 므낫세 족속에 속해 있던 슬로보핫은 광야에서 아들도 없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원칙대로라면 이 다섯 딸들은 요단 동쪽의 땅을 전혀 상속받을 수 없는 형편이었지요. 그런데 이 여인들은 그것을 그냥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딸들은 모세에게로 갔고, 모세에게 아버지 형제들 몫의 땅에서 아버지 몫의 땅을 떼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물어서 그 딸들의 말대로 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17장에 나오는 이야기는 이제 실제로 요단 동편의 땅을 므낫세 족속에게 나눠주어 거기서 살게 할 때, 그 때 있었던 일입니다. 슬로보핫의 딸들이 이제 모세의 약속대로 자신들에게도 땅을 나누어 달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당연히 여호수아는 모세가 그들에게 했던 약속을 그대로 지켰고 그렇게 해서 그들도 아버지 이름으로 된 땅을 소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악사와 슬로보핫의 딸들의 이야기는 겉모습이 서로 많이 닮아 있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을 정복하고 또 그 땅을 분배받는 이야기 속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이야기들입니다. 성경이 이 두 이야기들을 특별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지요. 남자가 아닌 여인들이었지만, 그들은 그저 주어지는 땅을 받기만 하지 않았습니다. 악사는 적극적으로 샘을 요구해서 네겝이라는 거친 황무지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만들었고, 슬로보핫의 딸들은 원래 자기들 몫의 땅이 없었지만 적극적으로 요구해서 자기 집안 몫의 약속의 땅을 얻어 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약속의 땅을 차지하는 이스라엘의 복을 나누어 받았고 뿐만 아니라 그 땅을 풍요로운 땅으로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산다는 말을 들으면 그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믿음이란 결국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니까요. 물론 믿음이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며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럴 때도 있지만 그렇게 하면 안될 때도 있습니다. 믿음은 구하고 찾는 것입니다. 이 여인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것을 말씀해 주시기 위해서 여호수아서에 등장시키신 중요한 등장인물들입니다. 여인들은 그 당시의 사회에서는 가장 수동적이고 아무런 위치가 없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들은 스스로를 하나님의 어엿한 언약백성으로 인식했습니다.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언약의 땅을 상속받을 자격이 있는 그런 사람으로 인식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을 받는 일에 있어서는 그 누구보다도 적극적이었고, 그 약속의 땅을 더 풍요로운 좋은 땅으로 만드는 일에 대해서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이 여인들은 그저 그 당시 다른 여인들처럼 그저 그렇게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냥 가만히 주는 것이 받고 또 주지 않으면 안 받고 그렇게 말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그 땅에서 쫓겨나는 것도 아니고 또 삶이 살아지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니까요. 악사는 그렇게 옷니엘과 결혼하고 그저 네겝으로 가서 그럭 저럭 살아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슬로보핫의 딸들은 아들이 없는 집안의 다른 여인들처럼 그저 좋은 남편 만나서 가정을 이루고 살아갈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것으로 만족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구했고 또 얻어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땅이 탐났거나 혹은 더 좋은 땅을 가지고 싶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 여인들은 스스로 자신의 집안 또한 어엿한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언약의 선물을 받아야 한다는 소망이 있었고, 또 하나님께서 그렇게 은혜로 주시는 선물이라면 그 선물을 더 좋은 것으로 받고 싶어하는 욕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땅을 통해서 더 온전한 언약백성의 자리에 서고 싶다는 그런 욕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에는 정말 많은 하나님의 복된 약속들이 있고 그 복들은 모두가 다 성도들에게 약속된 복입니다. 이 복을 받는 대상이 되는 데에는 아무런 차별이 없습니다. 애초부터 이 복은 누구에게는 주지만 누구에는 절대로 줄 수 없다는 식으로 정해진 것이 전혀 아니니까요. 그런데도 참 이상하지요? 성도들이 누리는 은혜와 복들이 다 다릅니다. 때로는 단순히 다르다고 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아이들말처럼 하늘만큼 땅만큼 차이가 납니다. 그렇다면 이런 차이는 무엇 때문에 생기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욕심의 크기’ 때문에 생기는 차이입니다. 정말 믿는 것 답게 믿어보고 싶다는 욕심, 그리고 이왕 누리게 되어 있는 은혜라면 될 수 있는대로 큰 은혜를 누리며 살고 싶다는 욕심, 땅에서도 한 번 하나님의 백성으로 영광스러운 삶을 살아보고 싶다는 그런 욕심의 크기 말입니다. 이 세상에 그것 자체로 선한 욕심이 없고, 부작용이 없는 욕심도 없지만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탐내고 더 큰 은혜를 욕심내는 욕심은 아무리 크고 깊어도 전혀 부작용이 없습니다. 그 욕심이 크면 클수록 그리고 그 욕심을 많이 챙기면 챙길수록 그만큼 나와 내 주변의 사람들이 누리는 복과 은혜는 커집니다. 


저는 우리 광현교회 식구들이 좀 더 애살있게 신앙생활을 하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 마음 속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놀라운 은혜들을 조금이라도 더 내 것으로 만들고 싶은 안달이 있고, 그 욕심이 채워지지 않을 때, 그것 때문에 속상해 하고 그것 때문에 억울해 하는 그런 거룩한 욕심들이 더 크고 깊어졌으면 좋겠습니다. 그저 물 없는 네겝 땅에서 살 수도 있지만, 내 몫의 복된 땅 없이 살아갈 수 있지만, 그걸로 만족이 안되서 하나님께 칭얼대고 더 큰 은혜, 더 깊은 영혼의 복을 달라고 울면서 보채는 그런 마음이 있었으면 합니다. 하나님을 향해 내 몫의 땅을 달라고 졸라대며, 땅 뿐만 아니라 저 샘도 달라고 요구하는 그런 욕심있는 성도들이 되었으면 정말 정말 좋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절대로 그저 주시는 은혜로만 만족하지 마시고 꼭 더 깊은 은혜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그저 쥐어주시는 복으로만 다 되었다 하지 마시고 더 풍성한 하늘의 복을 욕심내시며 사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준비해 놓으신 내 몫의 은혜, 세상이 줄 수 없는 진짜 은혜를 받습니다. 메마른 네겝 같은 내 삶의 자리에 윗 샘과 아랫 샘이 더해지는 복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의 영혼 속에 꼭 이 욕심이 회복되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그 욕심을 만족시켜 주시는 은혜를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에게 영적인 욕심, 신앙적인 애살을 주소서. 

나의 신앙생활이 추구하고 얻고자 하는 영적인 복이 분명한 그런 신앙생활이 되게 하셔서, 내 신앙이 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