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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5.09.20. 주일오전 - 큰 민족이 되었거늘(여호수아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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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여호수아 17장 14-18절


 



저는 예전에는 신앙이라는 것을 굉장히 수동적인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일이어서 결국 은혜를 주시고 안 주시고는 하나님이 결정하실 일이지 그 일에 있어서 사람이 할 수 있는 역할이 전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목사가 되어서 이렇게 성경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묵상하게 되면서, 그리고 제 삶 속에서 겪은 반복되는 경험을 통해서 그것이 저의 오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물론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실지 주지 않으실지를 결정하는 것은 완전히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그 일에 누가 끼어들어서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지요. 또한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지 않으면 안되게 하나님을 압박해서 하나님께서 어쩔 수 없이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그런 경우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언제나 풍성하고 자비하신 하나님의 마음 속에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틀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대해 보이는 태도 또한 무척 중요합니다. 실제로 성도들 각자가 누리는 은혜의 크기와 깊이는 상당 부분이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에 대한 우리들의 적극적인 태도와 반응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과 자녀들에게 은혜를 주시겠다는 약속은 항상 있습니다. 지난 주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그 약속 자체는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면 누구에게나 동일합니다. 그 누구도 차별하지 않습니다. 자꾸 나도 하나님의 자녀이고 저 사람도 하나님의 자녀인데 왜 나에게는 저 사람에게처럼 은혜를 주시지 않는가 하고 은근히 마음으로 하나님을 원망하는 분들이 계시는데, 그것은 오해입니다. 문제는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에게 있습니다. 적어도 모든 성도들에게 주신 약속이 보장하고 있는 은혜들은 모든 성도들이 차별없이 누릴 수 있고 사실 우리들에게는 그 약속들이 보장하는 은혜만으로도 차고 넘칩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부족한 은혜를 약속하신 적이 없고, 또 은혜를 주실 때 부족하게 주시는 경우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가나안 땅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분배되는 과정을 지켜보고 있는데요. 우리는  그 이야기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조금은 특별한 인물들을 만났습니다. 갈렙과 옷니엘의 아내 악사, 그리고 슬로보핫의 다섯 딸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다른 이스라엘 백성들과 달랐던 점은 이들은 적극적으로 자기 몫의 땅을 달라고 요구했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저 나눠주면 나눠주는 대로 또 주지 않으면 주지 않는대로 그저 수동적으로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갈렙은 예전에 모세를 통해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것을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것도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특유의 믿음을 통해 그 약속을 해석해서 그 누구도 선뜻 가지려고 하지 않을 헤브론 산지를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의 믿음의 눈으로 보기에는 거인족속들이 터줏대감으로 버티고 있는 그 헤브론 산지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땅이너무도 확실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헤브론 산지는 갈렙의 땅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갈렙의 조카 옷니엘은 헤브론 산지의 다른 성읍인 기럇세벨을 차지했고 그 덕분에 갈렙의 딸 악사와 결혼하게 됩니다. 그리고 거주지로 헤브론 남쪽의 황무지인 네겝을 얻게 되지만 악사가 갈렙에게 네겝의 아래쪽과 위쪽에 있는 샘을 달라고 적극적으로 요구해서 그 황무지를 그래도 쓸모 있는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으로 물려 받게 되었습니다. 이미 말씀드렸습니다만, 헤브론과 네겝은 그 땅의 토질로만 보아서는 별 볼일 없는 땅이지만, 사실 가나안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확보하지 않으면 안되는 가장 중요한 땅이었습니다. 그 두 곳이 정통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니라 에돔 족속 출신의 두 사람에 의해서 확보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슬로보핫의 다섯 딸들은 그 당시 상식과 법으로는 여인들이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받을 수 없었지만, 므낫세 지파에게 실제로 땅이 분배될 때, 적극적으로 아버지 이름으로 된 땅을 달라고 요청했고 그래서 하나님의 허락 하에 당당하게 땅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가나안 땅에 대해서 적극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었던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땅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저 땅이 탐이 나서 무조건 내 땅 내놓아라 이렇게 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고, 또 그 약속대로 자기가 속한 지파는 땅을 분배받아 놓은 상태였습니다. 이들의 요구는 그 약속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이들이 요구한 것은 단순한 땅이 아니었습니다. 그 땅을 통해서 자신들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약속의 주인공이 되고 싶었고 그래서 땅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성도들에게는 반드시 이런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겸손하고 또 겸손해야 하지만, 그리고 이 세상에 속한 것들에 대해서는 자기 욕심을 정말 잘 다스려야 하지만, 이미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들에 대해서는, 그 범위 안에서는 될 수 있는대로 제대로된 은혜, 더 크고 깊은 은혜를 누리기 위해서 욕심을 내야 하고, 또 하나님 나라의 당당한 백성이 되는 일에는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야 합니다. 구하고 달라고 요구하고, 나아가서 취하고자 하는 그런 열심과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여기 사는 동안에도 정말 믿는 것 답게 풍성하고 확실한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을 살 것이고, 나중에 주님 나라가 완전히 임할 때에는 그 나라에서도 더욱 더 영광스러운 자리에 앉게 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여러분을 권면합니다. 성도 여러분, 이왕 신앙생활 할 건데, 조금 더 애살있게, 욕심을 내가며, 진짜를 얻겠다는 그런 소원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신앙생활 하시기 바랍니다. 하늘의 것, 약속된 것을 구하고, 그 안에서 더 풍성한 것을 찾는 그런 신앙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처음의 유다지파를 필두로 이스라엘 각 지파들에 대한 땅분배가 계속되었는데요. 우리가 성경을 보면 각 지파의 이름과 그들에게 주어진 땅들의 지명이 주욱 나열되어 있어서 이 땅 분배가 모두 한 번에 이루어진 것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성경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가나안 땅이 그런 식으로 분배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때로는 정복 전에 땅에 대한 파악이 끝난 후에 땅이 분배 되기도 했고, 때로는 땅을 정복한 후에 분배된 곳도 있었는데요. 우리가 지금 살펴보고 있는 것은 여전히 정복해야 할 땅이 아주 많이 남아있는 상태에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여호수아가 열심히 믿음으로 싸워서 많은 곳을 점령했지만 여전히 그렇지 못한 곳이 많았기 때문에 여호수아는 자신이 살아있을 때 땅 분배를 끝내고자 했습니다. 


각 지파는 아시다시피 지파 수대로 미리 나눠 놓은 지역들 중의 하나를 제비뽑아 분배받았습니다. 그렇지만 제비뽑기는 복불복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미리 결정해 놓으신 것을 재확인하는 수단에 불과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아시지만 사람은 잘 모르니까요. 그렇게 자신이 선택한 것과 하나님이 주신 것이 일치할 때, 지파들은 그 땅이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주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고, 또 그 땅에 대한 불만도 덜 가지게 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제비뽑기로 받을 땅을 결정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파들 중에서 요셉자손들, 그러니까 에브라임 지파와 므낫세 지파는 불만이 생겼습니다. 자기들을 실제로 한 지파가 아니라 두 지파인데, 그래서 둘을 합치면 다른 지파보다 훨씬 더 큰 지파가 되는데 받은 땅은 아무래도 좁다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셉자손은 당당하게 여호수아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지금까지 내게 복을 주시므로 내가 큰 민족이 되었거늘 당신이 나의 기업을 위하여 한 제비, 한 분깃으로만 내게 주심은 어찌함이니이까?” 여러분은 이 말 속에서 어떤 것이 느껴지십니까? 이 짧은 한 마디 속에 ‘나’라는 단어가 네 번이나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복 주셨다는 자신의 특별한 위치를 나타내기 위해서 한 번, 그리고 ‘당신’ 그러니까 여호수아는 당신이 잘못했다고 따지기 위해서 한 번 등장시켰을 뿐입니다. ‘나’라는 주어를 많이 사용하는 ‘나’ 중심의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은 대개 자기 중심적이고 교만한 사람이기가 쉽습니다. 지금 요셉자손들은 굉장히 거만한 자세로 여호수아 앞에 서 있습니다. 이들의 말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거만함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요? 그것은 특권의식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요셉이 누구인 줄 잘 압니다. 요셉은 인간적인 면에서만 보면 지금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의 은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애굽에서 그 모든 야곱의 자손들을 돌보고 보호해 주어서 오늘날의 이스라엘이 있게 해 준 사람이 바로 요셉이었으니까요. 지금 요셉 자손은 그 공로를 은근히 내세우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호수아 앞에서 이런 거만한 태도를 보일 리가 없겠지요. 그들이 한 말인 즉, 우리가 누군데 당신이 우리를 이렇게 홀대할 수 있느냐, 어떻게 우리를 다른 지파사람들과 똑같이 대우할 수 있느냐 뭐 대충 이런 이야기가 됩니다. 


여호수아가 이렇게 불만을 늘어놓고 기득권을 내세우는 요셉 자손들의 요청을 들어주었을까요? 그럴 리가 없지요. 여호수아는 그 요청을 거절했습니다. 그렇지만 아주 기가 막히게 거절했습니다. 여호수아는 요셉 자손의 이야기를 받아서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큰 민족이 되므로 에브라임 산지가 네게 너무 좁을진대 브리스 족속과 르바임 족속의 땅 삼림에 올라가서 스스로 개척하라” 일단 여호수아는 그들의 이야기를 인정해 주었습니다. “네가 큰 민족이 되므로…” 지금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특별한 복을 주셨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래서 가장 큰 지파가 되었다고 하는데 그 말이 맞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내놓은 대답은 요셉 자손들이 전혀 예측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에브라임 산지가 너무 좁을진대 브리스 족속과 르바임 족속의 땅 삼림에 올라가서 스스로 개척하라” 기가 막힌 논리입니다. 하나님이 특별히 복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큰 지파가 되었지요.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들을 특별하게 생각하신다는 증거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더 특별하게 자신과 함께하신다는 증거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뭐가 있어야 합니까? 확신과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증거가 있으니 확신이 있을 수 밖에 없고 확신은 결국 용기로 이어지게 되어 있으니까요. 


요셉 자손들의 입장에서는 완전히 허를 찔렸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자신들의 진짜 속내를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그 산지는 우리에게 넉넉하지 못하고 골짜기 땅에 거주하는 모든 가나안 족속에게는 벧 스안과 그 마을들에 거주하는 자이든지 이스르엘 골짜기에 거주하는 자이든지 다 철병거가 있나이다” 그들은 두 가지 이유를 들어서 불가론을 펼쳤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두 이유들은 둘 다 이유가 될 수 없었습니다. 첫째 그 산지가 자신들에게 넉넉하지 못하다고 말합니다. 그 땅만 생각하면 좁은 게 맞습니다. 그렇지만 그 땅만 가지라는 것이 아닙니다. 기존에 나눠 받은 땅에다 지금 말하는 땅까지 다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 땅까지 합치면 모자랄 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래도 모자란다고 생각하면 어차피 개척해야 하니까 하는 김에 더 넒게 개척하면 됩니다. 여호수아가 그것을 허락하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단지 땅이 좁은 것이 흠이라면 두번째 이유는 이유로 내세울 수가 없습니다. 땅이 좁은 것과 그 땅에 병거를 가진 가나안 족속들이 사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니까요. 그러니까 첫번째 이유는 그저 가져다 붙인 것이고 두번째 이유가 불가론을 펼치는 진짜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셉 자손들은 땅을 원했습니다. 더 많은 땅을 원했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에게 찾아와서 땅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그들이 정말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금새 알아차렸습니다. 그들이 진짜로 원한 것은 요셉의 직계자손이라는 자기들의 위치에 맞는 특별대접이었고, 또 땅을 원하되 그 땅은 산지가 아니라 비옥한 땅이었습니다. 게다가 전혀 싸울 필요가 없는, 거저 주워 먹을 수 있는 그런 땅을 원했습니다. 


사람이 특권의식에 빠지면 요셉지파들처럼 자기중심적이 되고 나태해 집니다.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들도 교회생활을 하면서 혹은 사회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면서 이런 저런 이유로  나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낫다라는 생각에 빠지게 되는 순간 자기 중심적이 되고 또 나태해지기 시작합니다. 먼저 나서서 무언가를 하려고 하거나 의무를 행하려고 하기 보다는 자기 권리를 내세우고 자기 몫을 챙기는 데에만 예민해 집니다. 그런데, 이런 특권 의식은 일반적으로도 그렇지만 우리 성도들에게는 특히나 더 큰 해가 됩니다. 특권의식이 고개를 드는 순간 믿음도 잃어버리게 되고 그 믿음이 주는 진취적인 용기도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당사자는 그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은 그런 자신의 모습을 인식하지 못하게 됩니다. 오늘 요셉 자손들은 성도가 특권의식에 빠졌을 때, 그들이 어떤 모습이 되는지를 그대로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보기에 요셉 자손들의 이러한 모습이 그다지 보기 좋지 않고 딱해 보인다면 어떤 이유로든 우리 안에 이런 의식들이 들어오고 있지 않은지 항상 잘 살펴야 하고 또 그렇게 들어와 있는 특권의식들을 몰아내야 합니다. 그래야 나를 고상하고 아름답게 지킬 수 있고 교회 공동체를 지켜낼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요셉 자손들이 가져다 붙인 이유가 될 수 없는 이유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저 애초에 했던 대답만 아주 담담하게 반복했지요. “너는 큰 민족이요 큰 권능이 있은 즉 한 분깃만 가질 것이 아니라 그 산지도 네 것이 되리니 비록 삼림이라도 네가 개척하라 그 끝까지 네 것이 되리라 가나안 족속이 비록 철 병거를 가졌고 강할지라도 네가 능히 그를 쫓아 내리라” 이것이 오늘 본문의 결론이고 또 이 이야기의 결론이기도 한데요. 요셉 자손들이 이 이야기를 듣고 어떻게 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저 여호수아의 이 말이 오늘 본문의 결론이라는 것이 의미심장합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으로 부터 큰 복을 받았고, 그래서 큰 지파가 되었다면 그것을 자신이 특별대접을 받아야 하는 자기 높임의 이유가 아니라 솔선수범하여 믿음으로 본을 보여야 하는 이유가 되어야 한다고 반복해서 이야기하고 있고,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굉장히 중요한 신앙의 원리를 알려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이 바로 교회와 교회 바깥의 세상이 다른 점입니다. 교회 바깥에서는 특별한 복을 받아서 더 높아지고 더 많이 가진 사람들은 그만한 대접을 받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집니다. 그렇지만 교회 안에서는 정반대입니다. 그 이유는 성도가 받은 특별한 복은 그가 그만큼의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는 뜻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은혜라는 것은 내가 일을 하고 공을 세웠기 때문에 나에게 주어지는 댓가가 아닙니다. 거저 받는 선물입니다. 그래서 그 은혜가 그렇게 크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만큼 더 확실하게 그와 함께 하신다는 증거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지 다른 뜻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니 그런 증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당연히 더 큰 믿음으로 하나님께 더 많이 순종하고 더 온전한 믿음의 본이 되어야 합니다. 


한 번은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청탁을 넣어서 예수님께서 왕이 되시면 자기들을 제일 높은 자리에 앉혀 달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다른 제자들은 그 이야기를 듣고 분하게 여겼는데요. 그들이 이런 반응을 보였던 것은 그들 모두 야고보와 요한과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다 다른 제자들보다 높은 고관대작의 자리에 앉고 싶었지요. 그 때, 그런 제자들에게 우리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방인의 소위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 말씀은 이 세상과 하늘나라가 어디가 어떻게 얼마나 다른지를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힘있는 자는 자기 마음대로 합니다. 자기를 내세우고 다른 사람들을 자신의 이익과 편리를 위한 도구로 사용하지요. 높아지려면 높아져야만 하는 곳이 바로 이 세상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정반대입니다. 그 나라에서는 높아지려면 낮아져야 합니다. 그 나라에서 머리가 되려는 사람들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예수님이십니다. 왜 하나님 나라에서 예수님이 가장 높으시지요? 왜 예수님이 가장 높아지실 수 밖에 없으실까요? 그 이유는 예수님은 하나님이셨지만 자신의 그 귀한 생명을  죄 때문에 영원한 죽음에 이를 운명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 그 값으로 지불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셨지만 그렇게 죄인들을 생명을 주어 섬기셨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섬김보다 더 탁월한 낮아짐이 없기 때문에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에서는 가장 높여지실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더 많이 낮아져서 더 많이 섬길 수록 더 큰 영광을 얻는 그런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땅 위에 있는 하나님 나라인 이스라엘의 백성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그 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높은 사람일까요? 더 큰 은혜를 받고 더 큰 복을 받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더 높여졌기 때문에 더 큰 믿음으로 더 많이 섬기고, 더 온전한 믿음의 본이 되는 사람! 이런 사람이 가장 높은 사람이 됩니다. 그것은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는 특권이 없습니다. 그저 더 많이 은혜를 받고 복을 받은 사람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일수록 교회 안에서는 더 큰 의무를 지게 됩니다. 믿음의 본이 되어야 하고, 섬김의 본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는 이런 사람들이 높은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정말로 높다 하십니다. 


요셉의 자손들은 다른 어떤 지파보다도 큰 복을 받았습니다. 크고 특별한 은혜의 증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철병거가 있는 산지로, 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찬 삼림으로 들어가 그 곳을 믿음으로 점령할 의무가 있었고 부르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은혜 속에서 자신들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 대신 그 은혜를 자기들의 특권으로 착각했고, 그 특권으로 아무 수고도 하지 않고 비옥하고 넓은 땅만 차지하려고 했습니다. 


 저는 오늘 조국 교회 안에서 이 요셉 자손들을 닮은 모습을 참 많이 봅니다. 내가 믿음의 본을 보이고 솔선수범하려고 하기 보다는 그 어떤 조건을 내세워서라도 자기 권리를 찾고 대접을 받으려는 그런 모습들 말입니다. 자기가 남들보다 조금 더 높은 자리에 있다는 생각, 특별한 위치에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자기를 주장하고 내세우려는 그런 모습들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절대로 그러지 맙시다. 그건 교회가 아니고 성도가 아닙니다. 아직도 거듭나지 못한 세상에 속해 있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건 참으로 영광스러운 것이 무엇인지, 참으로 명예로운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오늘 이 땅의 교회가, 그리고 하나님 나라가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그 무엇보다도 그 나라의 백성이 되어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할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여기 이 곳’이 아니라 ‘그 곳’에서 더 크고 영광스러워지기 위해서 여기서는 기꺼이 낮아지며 섬김과 믿음의 본을 보이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자신이 받은 복을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소명으로 여길 줄 아는 사람들, 그래서 그 복으로 남들이 꺼리는 철병거가 있는 산지로 먼저 들어갈 수 있는 사람들, 오늘 조국교회는 그런 하나님의 사람들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따라해 보겠습니다. “교회 안에 특권은 없다.”, “교회 안에 특권은 없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교회 안에 특권은 없습니다. 교회 안에는 은혜와 그 은혜에 걸맞는 소명만이 있을 뿐입니다. 섬김과 모범이 되는 삶으로의 부르심 말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 세상이 아니라 예수님을 닮은 참 성도들이 되어서 더 많고 풍성한 은혜 속에서 더 많이 낮아지고 더 많이 본이 되어지는 우리 주님 닮은 삶을 사는 참 영광과 명예가 무엇인지 알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