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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5.10.03. 새벽예배 - 성경읽기와 묵상(욥기 37-3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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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일 : 2015년 11월 3일 화요일




제가 가지고 있는 책들 중에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 사랑하기’라는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책 제목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사다 놓고서 아직까지 읽지 못했는데요. 문득 문득 책장에 꽂혀 있는 그 책을 볼 때마다, 그 제목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한 마디로 설명하는 최고의 정의라는 생각이 저절로 듭니다.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 사랑하기’ 신앙은 하나님께서도 직접 그렇게 말씀해 주셨듯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되어야 진짜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그 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설명해 주는 성경의 설명을 알고 또 믿는 수준에 머물러서는 진짜 신앙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고, 제가 확신하기는 그런 신앙은 하나님께서 과히 기뻐하시는 신앙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듯이 우리도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기를 바라시고 그렇게 되었을 때 참으로 기뻐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정직하게 말한다면 그렇게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하나님은 우리가 다 알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들은 다 알지 못해도 이해할 수 없어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가족들 또한 전부 다 알거나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사랑하고 있으니까요. 


우리는 하나님을 다 몰라도 다 이해할 수 없어서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선대하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실 때는 오히려 그 모르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이 그 은혜를 더 크게 느껴지게 하는 조건이 되지만 그 반대인 경우는 바로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기가 정말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이유 없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며, 복을 주실 때는 그게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정말 하나님께 눈물을 흘리며 사랑을 고백하게 되지요.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내가 왜 이런 어려움을 당해야 하는지, 왜 나에게 이런 어려움들이 계속되는지, 내가 왜 이렇게 힘든 자리에 있어야 하는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을 때, 그 때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은 물론이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일도 정말 만만치가 않습니다. 그렇지만 참 신앙은 그렇게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을 때도 믿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엘리후가 자신보다 훨씬 연장자인 욥과 욥의 친구들을 향해서 분명하게 이야기 해 준 것의 가장 중요한 요점은 원래 우리는 하나님을 다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하나님을 비난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우리들 사이의 차이가 얼마나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것인지를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하나님과 우리들 사이의 수준차 때문이라고 설명해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엘리후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다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이 불의하신 분이라는 뜻이 될 수는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런데, 엘리후의 이야기가 끝나자 마자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나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욥을 상대하기로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을 나무라셨습니다.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욥이 엘리후를 제외한 나머지 친구들 보다는 나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도 잘못을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에 대해서, 그리고 자기 인생에 대해서 무지한 말을 했다는 것이고, 또 그것 때문에 스스로의 생각을 어둡게 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막말의 세상이 되어버린 듯 합니다. 거친 말 뿐만이 아니라 너무나 무지하고 그릇된 말들을 아무런 생각없이 뱉아내고 그렇게 하는 것을 마치 자신의 권리인 양 생각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모르는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런 참되지 않은 말들이 그 사람의 생각을 어둡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 말이 무엇에 대한 말이든 똑같습니다. 사람에 대한 무지한 말은  사람에 대한 그의 생각을 어둡게 만듭니다. 하나님에 대한 무지한 말은 하나님에 대한 그의 생각을 더 어둡게 만듭니다. 그래서 그는 결국 사람도 모르고 하나님도 모르는 어둠 속에 사는 사람이 되어 버리고, 그 어둠 속에서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 앞에서 이런 저런 잘못을 저지르게 됩니다. 


욥은 하나님을 잘 몰랐습니다. 사실 하나님을 전부 이해하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니 그것 자체는 욥의 잘못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욥은 자신이 하나님을 다 이해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자기가 이해하는 대로의 하나님이 아닌 다른 하나님의 모습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그가 하나님에 대해서 한 말들은 하나님에 대한 무지에서 나오는 말일 수 밖에 없었으며,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그의 생각을 더욱 더 어둡게 만들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욥이 하나님을 모른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38장에서 욥에게 던지는 수 없는 질문들, 그 질문들은 하나님께서는 너무나 쉬운, 물으나 마나한 것같이 다 알려진 문제였지만 욥은 단 하나도 대답할 수 없는 그런 질문들이었습니다. 이렇게 간단한 질문에 단 하나도 대답하지 못하는 욥이라면 그가 사람의 인생과 이 세상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들을 제대로 이해하기란 불가능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욥만 그런 것이 아니지요. 모든 인간이, 우리들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에 대한 우리의 지식과 이해는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여전히 부분적일 뿐입니다. 그러니,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다 안다고 생각하거나, 그 지식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을 비난하는 자리까지 가면 안됩니다. 그런 일 자체도 좋지 않은 일이지만 결국 그런 우리들의 생각과 말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생각을 더 어둡게 만들어 우리가 더욱 더 하나님을 오해하고 불신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고통과 어려움 중에서 하나님을 향해서 좋은 감정을 유지하는 일은 참 쉽지 않습니다. 그 때는 정말 그렇게 하시는 하나님을 전혀 이해할 수가 없으니까요. 그렇지만, 성도 여러분. 그래도 무지한 말은 하지 맙시다. 내가 아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전부라고 생각하고 그 생각에 맞지 않는 하나님의 모습을 비난하지는 마십시다. 언젠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우리의 이런 의문들은 전부다 환한 빛 가운데 원래의 자기 모습을 분명하게 보여줄 것고 그러면 그 때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깊은 지헤로 인해 하나님을 더욱 더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인생과 하나님에 대한, 그리고 이 세상에 대한 확실하고 완전한 해답을 얻는 것. 그것은 그 때로 미뤄놓고 지금은 열심히 다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이실지라도 그 분을 사랑하는 성도가 되기 위해서 애쓰면서 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