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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5.10.05. 새벽예배 - 성경읽기와 묵상(욥기 41-4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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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일 : 2015년 11월 5일 목요일




오늘은 욥기의 마지막 두 장을 함께 읽었습니다. 이번에 욥기를 다시 한 번 읽으면서 이전과는 다르게 참 많은 깨달음과 은혜를 얻었습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들 중에서 가장 뛰어나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여전히 피조물이지요. 그것도 아주 작은 피조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이해하고 생각할 수는 있지만, 그건 정말 너무나 불완전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알고 확실하게 인정하는 것이 우리 신앙의 출발점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쏟아지는 질문 앞에서 욥은 드디어 자신이 한 일이 어떤 일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고통과 고난에 취해서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로 하나님을 비난하고 하나님을 트집잡던 욥은 마치 잠을 자다가 깬 사람처럼 갑자기 자신이 있어야 할 바른 자리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욥이 그 동안 했던 말들이 전부 그리고 완전히 틀린 말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지혜롭고 그래도 심사숙고해서 한 이야기들이었지요. 그렇지만, 욥은 알게 되었습니다. 그 모든 말들이 제대로 깨닫지도 못한 일들에 대해 내뱉은 자기 생각에 불과했고 실은 자신의 능력으로 다 이해할 수도 없는 일들에 대해서 말한 것이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러면서 욥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흔히들 이 구절을 이제 욥이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직접 만나게 되었는데 그것을 고백하고 있다고 해석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게 아닌 것 같습니다. 욥이 이런 고백을 한 것은 고난을 당할 때가 아니라, 그 고난의 끝에서 하나님의 질문을 받고나서 이기 때문입니다. 쏟아지는 하나님의 질문을 받고 나서 욥이 확실히 알게 된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은 얼마나 크신 분이신가 하는 것과 그에 비해 자신은 얼마나 형편없이 작은 존재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욥은 하나님을 무한히 크신 분이시고 자신은 없는 것처럼 작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 그 지식은 마치 남에게 전해 들은 것과도 같았습니다. 자기가 직접 절실하게 깨달은 것이 아니라 인정하고 있기는 하지만 어쩌면 그저 그럴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는 정도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이 진짜로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된 것입니다. 몸으로 말입니다. 욥은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이 당하는 고난조차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가장 잘 안다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다른 사람들보다는 그랬겠지요. 그렇지만 그래도 욥은 하나님을 진짜로 알고 있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자기 생각으로 하나님을 비난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분명히 고난은 이전보다 하나님을 더 가까이 그리고 체험적으로 알게 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렇지만 그 고난이 너무 심해지면 대부분은 오히려 그 고난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을 오해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고통에 가리워 하나님의 본 모습을 못 보게 되니까요. 그렇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영혼에 들려지게 되면 그 말씀은 우리에게 우리가 하나님을 직접 보는 것처럼 그렇게 볼 수 있게 해 줍니다. 그러면 인간은 그제서야 하나님이 정말로 얼마나 크신 분이신지, 그리고 자신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를 제대로 보고 알게 됩니다. 그 때, 은혜의 은혜됨을 진짜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그 어려움 자체에 집중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런 상황을 통해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그 때야 말로 우리 영혼이 하나님을 만나기에 가장 좋은 때이니까요. 


마지막 말을 마치신 하나님께서는 욥의 친구들을 나무라시면서 욥과 그들의 논쟁에서 욥의 손을 들어주셨습니다. 완전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욥이 친구들 보다는 하나님에 대해서 올바른 태도를 가지고 올바르게 이야기했다고 판정해 주셨습니다. 이상하지요. 욥은 하나님을 비난하기 직전까지 갔고, 욥의 친구들은 계속해서 그래도 하나님은 옳다, 그래도 너는 죄인이다라고 주장하면서 하나님의 편을 들어 드렸는데 말이지요.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친구들이 아니라 욥의 손을 들어 주셨을까요? 첫째, 친구들은 하나님께 대한 단편적인 지식을 마치 하나님에 대한 전부인 양 이야기했습니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편드는 것이 아니라 자기 지식 안에 하나님을 가두는 셈이 되었습니다. 둘째, 그들은 욥의 아픔을 헤아리지 않았습니다. 그저 자기 주장을 하느라고 욥의 상처에 또다시 상처를 내는 일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참 저지르기 쉬운 실수가 아닌가 합니다. 사람의 아픔이나 상처를 생각하지 않고 옳은 것만 주장하는 것 말이지요. 이렇게 하면 설사 그 말이 맞는 말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옳다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의 친구 세 사람이 번제물을 가지고 욥에게 가서 번제를 드리도록 하셨습니다. 그 때 욥이 친구들을 위해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기쁘게 받아주시고 용서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을 세 사람을 위한 중보자로 선택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도 죄인에게는 중보자가 꼭 필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보게 되는데요. 욥이 세 사람의 중보자가 된 이유는 그들보다 욥이 더 의로웠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더 거룩한 제사장들이 일반 백성들을 중보하도록 하셨던 율법처럼 하나님께서는 여기서도 똑같은 원칙을 적용하고 계시는 셈입니다. 


이 이야기가 욥의 결론부분을 장식하고 있다는 것은 굉장히 특별하면서도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불완전한 피조물이요 또 죄인으로 이 세상을 살아 갑니다. 그리고 이미 죄가 들어와 있는 이 세상, 그리고 우리가 다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께서 그 분의 지혜로 다스려 가시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다 보면 우리는 우리 자신도 죄를 짓게 될 뿐만 아니라, 눈에 보여지고 경험되어지는 불의하고 부당한 일들 앞에서 생각으로 그리고 말로 우리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가는 실수를 저지르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은혜가 있어야 우리가 하나님께 다시 나아갈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그 때 우리는 우리 힘으로 우리 마음대로 하나님의 용서를 얻어낼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중보자가 필요합니다. 우리보다 의로우신 분, 우리의 영원한 의가 되실 수 있는 분의 중보가 필요합니다. 그 분이 누구일까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분이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께 간구하실 때,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를 받고 다시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언제든지 우리를 시험에 빠지게 하고 죄짓게 할 수 있습니다. 죄가 그렇게 만들 수 있고, 또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 또한 우리를 그렇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너무나 자주 그런 시험에 넘어집니다.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과 불완전함을 항상 인식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다가 나도 모르게 넘저 말아야 할 선을 넘게 되면 그 때는 우리의 영원한 중보자 되시고 영원한 의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가 그 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그렇게 다시 하나님께로 나아가서 그 은혜 가운데 머무는 것 밖에 불완전한 죄인인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항상 겸손하게 그리고 예수님의 의로우심에 기대서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잃지 않는 성도들로 더욱 더 견고하게 세워져 가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