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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5.10.09. 새벽예배 - 성경읽기와 묵상(느헤미야 7-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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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이 건축되고 성문이 다 세워진 후,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의 모든 백성들을 그 족보대로 다 등록하게 했습니다. 이것은 다시 지어진 예루살렘 성을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백성들을 체계적으로 조직화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예루살렘은 그 중심에 성전을 두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 살면서 함께 지키는 명실상부한 하나님의 도성으로서의 면모를 갖출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가장 중요한 일 한 가지가 남아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제 왕이신 하나님의 통치를 제대로 받는 일이었습니다. 사실 그 동안의 모든 고통과 수모는 다른 이유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왕이신 하나님을 거역했기 때문에 생겨난 것들이었으니까요.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이 아니시기 때문에 직접 왕궁의 보좌에 앉아서 매일 매일 백성들의 일을 돌보는 그런 식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돌보실 수가 없으십니다. 그대신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 분의 백성들을 다스리십니다. 


이 모든 것들을 이스라엘 백성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성전을 세우고 성벽을 다시 쌓아올려 예루살렘을 회복한 후에 곧바로 수문 앞 광장에 모여서 학사 에스라에게 모세의 율법책을 가져다고 가르쳐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들은 그 동안 잊혀졌던 율법을 다시 듣고 그 율법에 순종하는 실제적인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에스라는 중간 중간에 자기 말을 받아 백성들에게 전할 사람들을 세우고는 율법책을 읽고 그 뜻을 해석해서 백성들에게 들려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백성들은 율법을 하나 하나 깨달아감에 따라 여기 저기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습니다. 자기들에게 그렇게 함께 모여서 해석하여 들려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날이 다시 오게 된 것이 정말 감격적이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렇게 깨닫게 되는 말씀들을 들으면서 왜 예전에는 이렇게 아름답고 완전하며 복된 말씀을 그렇게도 싫어하고 또 불순종했는가 너무나 깊게 뉘우쳐 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날은 울면 안되는 날이었습니다. 그 날은 여호와의 성일이었기 때문에 기뻐해야 마땅한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를 비롯한 지도자들은 백성들이 감정에 북받쳐서 울지 않도록 그들을 만류했습니다. 그 날이 울면 안되는 날이어서 지도자들이 그들이 우는 것을 금하였지만 사실 백성들의 반응 자체는 너무나 아름답고 바람직한 반응이었습니다. 참으로 말씀을 깨달을 때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말씀 앞에서 울 수 있는 마음을 잃어버리면 안됩니다. 자신의 죄악과 잘못됨을 드러내 보여주는 말씀 앞에서도 더 이상 슬퍼하거나 자신을 한스러워 하는 마음이 없을 때, 사람은 영적인 중병에 걸린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런 슬픔은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가늠하는 시금석의 역할을 해 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지적하는 주님의 말씀, 또 무엇이 하나님 앞에서 바른 것인지 그 바른 길을 보여주는 말씀 앞에서 자신을 한스러워하고 때로는 눈물 흘릴 수 있는 그런 마음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적어도 그런 마음은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도록 여러분의 중심을 꼭 붙드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만류하는 지도자들에 지도에 따라 백성들은 울음을 그쳤습니다. 그리고는 지도자들의 말대로 가서 먹고 마시며 서로에게 좋은 것을 나누어 주며 크게 즐거워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다른 때 그들이 느꼈던 즐거움과는 종류와 격이 다른 즐거움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즐거움은 단지 그 날 벌어진 잔치나 나눔에서 생겨난 즐거움이 아니라 그 날 그들이 들은 말씀을 밝히 오는데서 오는 즐거움이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성도는요. 진짜 성도는요. 그 무엇보다도 말씀을 즐거워하고 사랑합니다. 그 말씀을 읽고 듣고 깨달을 때, 이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얻을 수 없는 깊고 풍성한 기쁨에 빠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꿀과 송이꿀보다도 더 달다고 고백합니다. 깨달아지는 말씀, 밝히 알게 된 말씀이 주는 즐거움처럼 그의 영혼을 만족시키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기쁨이 다는 아닙니다만, 성도에게는 아주 기본적으로 이 기쁨이 있어야 하고 성도는 이 기쁨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만이 참으로 거듭난 성도와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의 차이이기도 하니까요. 


저는 여러분도 익히 아시다시피 오늘날 한국교회를 보면서 참 많은 걱정을 하는 사람 중의 하나인데요. 그 이유 중의 가장 큰 이유가 바로 말씀을 대하는 한국교회의 태도 때문입니다. 물론 한국교회가 이렇게 된 데에는 목회자들의 책임이 절대적입니다. 스스로도 말씀을 제대로 깨닫는 그 깊은 기쁨과 만족을 모르고 그래서 그 말씀을 말씀답게 전하는 일에 헌신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설교는 했습니다. 설교를 하지 않고서야 목회를 할 수는 없으니까요. 물론 그런 설교들이 모두 전혀 가치가 없는 것들이었거나 혹은 그런 설교들을 통해서 성도들과 교회들이 얻은 유익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런 사실로 위로 받기에는 어느 순간부터 이 땅의 강단에서 흘러나온 설교들은 그야 말로 맹탕들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제 의미를 해석하여 알려주는 역할을 하지 못했고 그 깊은 의미로 성도들을 설득시키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마치 이 세상에서 효과적이고 행복하게 사는 방법을 담고 있는 인생론이나 처세술의 창고처럼 이용되었습니다. 그런 세월이 흐른 지가 이미 한 세대가 넘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과 목회자들이 이미 무엇이 설교인지를 모르는 정확하게 모르는 상태가 되었고 그래서 말씀 아닌 것이 말씀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성도들은 설교가 아닌 것, 설교라고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것들을 듣고는 기뻐하면서도 진짜 설교를 듣고는 그런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그런 상태가 되었습니다. 오해는 마시기 바랍니다. 제가 제 설교가 진짜 설교다운 설교라고 말씀드리는 것은 아니고, 제 설교 알아주지 않는다고 투정부리는 것도 아닙니다. 


오늘 한국교회에 꼭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참된 말씀의 회복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의 말씀이 강단에서 해석되고 선포되어야 하고, 성도들은 그 말씀을 기뻐하며 듣게 되는 것. 그렇게 참 말씀이 전해지고 들려지며 알아지고 깨달아지는 즐거움이 충만해 지는 것. 이것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한국교회와 우리 신앙의 회복은 그저 구호에 불과할 수 밖에 없습니다. 


말씀은 우리를 울게 하고 또 기뻐하게 할 때, 그 때가 가장 은혜로운 것입니다. 우리 광현교회에 그리고 조국교회에 하나님의 이런 말씀이 풍성하게 선포되어 말씀 때문에 울고 또 기뻐하는 은혜가 풍성해지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