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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5.10.13. 새벽예배 - 성경읽기와 묵상(느헤미야 12-1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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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계속해서 느헤미야가 멸망 후의 이스라엘 총독으로 돌아온 후, 이스라엘 성벽을 세우는 이야기를 살펴보고 있는데요. 사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했을 뿐아니라 실질적인 의미에서 이스라엘 공동체와 신앙을 바닥부터 다시 세웠습니다. 이것을 흔히 ‘느헤미야의 개혁’이라고 부르는데요. 그런데, 우리가 오늘도 성경을 통해 읽었지만 느헤미야가 행한 개혁은 굉장히 철저했습니다. 우선 적극적인 의미로 보면, 느헤미야는 일을 함에 있어서 그저 겉모양만 갖춰 놓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일단  성전을 깨끗하게 하고 흩어졌던 레위인들을 다시 불러 모으는 등 형식적인 면에서도 제사와 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이 제 모양으로 되돌아오게 했지만 그 레위인들이 생활 걱정을 하지 않고서 성전을 돌보고 말씀을 가르치고 또 제사드리는 일에 전념할 수 있도록 제도적인 장치도 마련해 놓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신앙에 있어서 레위인들은 없으면 안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성전도 관리해야 하고 제사도 드려야 하고 또 하나님의 말씀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모든 면에 있어서 레위인들은 공식적으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세워진 유일한 중보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상황이 어려워 지면서 레위인들은 더 이상 자기 자기를 지킬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원래 레위인들은 각 지파들 사이에서 자기들 몫의 땅을 얻고, 그 땅에서 나오는 것으로 살아가게 되어 있었는데, 상황이 어려워지니 그 땅을 돌봐줄 사람들이 없어서 직접 농사를 지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을 자리를 이탈한 레위인들의 탓만 할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들도 사람이니 최소한의 생계가 보장되어야만 자리를 지키면서 자기들의 소명을 감당할 수 있으니까요. 물론 잘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달리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런 선택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이스라엘의 신앙을 다시 세우면서 이 일을 확실히 바로 잡았습니다. 공식적으로 다른 지파 사람들이 레위인들을 부양하도록 제도를 확충했던 것입니다. 좋은 것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그것을 유지되게 할 수 있는 환경을 갖추는 일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단기간적으로는 어떨지 몰라도 장기적으로 볼 때는 결국 그 일이 실패하게 되기가 쉽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은 진심이어도 언제 그 진심이 거짓이 될지 모릅니다. 지금 바르게 한다고 해서 그것이 계속해서 바르게 유지되리라는 보장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그 진심을 잃어버리지 않고 바른 것을 따를 수 있는 틀을 마련해 주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교회들이 처음에 가던 길을 벗어나서 탈선하거나 처음에는 겸손하고 진심으로 섬기던 성도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교회 공동체 안에서 물의를 일으키는 것은 제가 생각하기에는 다 그런 제도들과 환경을 갖추는 일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교회도 그저 믿음과 은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바른 원칙을 세우고, 그 원칙을 꼭 지켜내기 위해서 헌신해야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을 교회의 성벽과 성문처럼 여기면서 말입니다. 그래야 그 성벽과 성문 안에서 교회는 바른 길을 가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지켜낼 수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으면 결국 그것 때문에 교회가 어지럽혀지게 됩니다. 사람이란 어쩔 수 없이 죄성을 가지고 있고 그것은 언제든지 사람을 변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개인적으로도 이런 것을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나도 인간입니다. 그것은 내 속에도 죄성이 있다는 뜻이고, 이것은 우리 안에 있는 선한 모습과 행동은 저절로 유지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묶는 원칙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나는 이것은 지켜야 한다, 이 선은 넘어가면 안된다,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는 이것이다 라는 식으로 말이지요. 교회도 그렇지만 성도 개인도 이런 원칙과 가치를 세우지 않고 살고 또 신앙생활을 하니까 그렇게 유혹에 대해서 취약하고 그러면서도 자신이 가고 있는 길이 어떤 길인지조차 깨닫지 못할 때가 많은 것입니다. 


두번째로, 느헤미야의 개혁은 굉장히, 지나치다 싶을만큼 철저했습니다.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있는 죄를 처리하는데 있어서는 전혀 ‘은혜’라는 것이 보이지 않을만큼 단호했습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이미 이스라엘 안에 자리를 잡고 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죄들을 제대로 처리하고 다시 원점에서 시작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교회나 성도 개인의 삶 속에 죄가 들어오지 않게 막는 것도 굉장히 어렵지만, 그 죄를 처리하고 끊어내는 일은 그것보다 몇 배나 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 그 죄의 달콤한 열매를 맛보고 있고, 때로는 그 죄가 개인이나 공동체와 분리될 수 없을 정도로 서로 뒤엉켜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많은 교회들이 무엇이 옳은지 알면서도 그 길로 가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 이유 때문입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 있는바르지 못한 것을 도려내면 그 교회의 조직 자체가 와해될 정도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죄를 도려내는 아픔을 피하면 결국 그 부분이 완전히 썩어 버립니다. 그리고 그 부위가 점점 더 커지게 됩니다. 결국 교회의 영광을 모두 갉아먹어 버립니다.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내버려둔 것들 때문에 성도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성도가 누려야 할 기쁨과 은혜, 그리고 믿음의 능력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우리가 느헤미야서를 읽으면서 느헤미야에게서 도전과 은혜를 받았다면 그것은 느헤미야가 간 길이 옳고 반듯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가 갔던 길이 나의 길이 되게 하고, 또 우리의 길이 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당장 느헤미야 시대의 회복을 위해서 빠른 속도로 움직일 수 없을지라도 반드시 지금 우리에게 있는 문제와 죄가 무엇이라는 것은 인식하고 있어야 하고, 그런 것들은 반드시 잘라내고 버려야 한다는 사실 만큼은 붙들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해야 합니다. 언젠가 내가, 우리 교회가, 그리고 이 땅의 교회가 느헤미야 시대의 이스라엘 처럼 새로워지고 바르게 세워지게 해 달라고, 그런 아픔을 능히 감당해 낼 수 있는 영적인 결단이 있게 해 달라고 계속 잊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내 선에서, 버리고 떠날 수 있는 바르지 못한 것들이 발견되면 스스로 결단을 내리고 하나 하나 그런 것들을 처리해야 합니다. 이런 결단과 애씀이 없다면 개인과 교회의 영광이라는 말들은 그야 말로 공염불에 불과해 질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교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회복은 항상 필요합니다. 그 어떤 한 순간도 우리는 완전할 수 없는 사람들이고 또 그런 사람들의 모임이니까요. 당장 그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교회와 성도들이 거룩하고 온전하게 회복되는 비전을 포기하지 마십시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을지라도 기도하면서 기다리고 또 준비하십시다. 내가 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면서 말이지요. 그러면 느헤미야 한 사람이 이스라엘 공동체와 신앙을 바로 세웠듯이 우리 삶의 여기 저기가 다시 세워지고 회복되어지며, 내가 속한 교회 또한 더 순결하고 영광스러워지는 것을 보는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회복이라는 거룩한 꿈을 꾸며 한 걸음, 한 걸음 올바름을 향해 가는 크고 작은 느헤미야로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