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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5.10.15. 새벽예배 - 성경읽기와 묵상(에스더 4-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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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후 와스디가 정말 별 것 아닌 이유로 우습게 폐위된 후, 수산 성에 살던 한 이름 없는 유대인 고아 처녀가 수많은 여인들과 함께 궁으로 들어가게 되고 드디어 대국 페르시아의 왕후가 됩니다.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 현실이 된 것이지요. 사실 와스디가 그런 식으로 폐위되지 않았다면 왕후는 그런 식으로 결정될래야 결정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왕후를 결정하는 일은 수많은 세도가들의 전쟁터가 되었을 것이고 거기서 승리한 세도가 집안의 자녀가 그 자리를 차지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전 왕후가 왕의 말을 거역하다가 폐위가 되었으니 모르긴 몰라도 이번에는 전혀 그러한 정치적인 조건들을 배제시킨 채로 왕후를 선택하려고 했고 그래서 에스더는 왕후의 자리에 앉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에 신데렐라도 이런 신데렐라가 없습니다. 


거기다가 모르드개는 두 내시의 계략으로부터 아하수에로 왕의 목숨을 걸져 주었습니다. 물론 그 중간 역할을 한 것은 에스더였지요. 그러면 어마 어마한 상과 벼슬이 모르드개에게 주어져야 하는데 전혀 그런 것이 없었습니다. 정말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일에 대한 어떤 대가도 그 누구에게 주어지지 않은 채로, 단지 궁중일기에 몇 줄만을 남기고 그 일은 잊혀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던 중에 페르시아에는 커다란 정치적인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 변화란 바로 아각 사람 함므다다의 아들인 하만이 왕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는 왕국의 이인자 자리에 앉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이 결국 정말 말도 안되는 이유 때문에 아직 페르시아에서 유대 땅으로 돌아가지 않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멸망의 위기 속으로 몰아넣게 됩니다. 모르드개가 왕궁의 문지기로서 드나드는 하만에게 절을 하지 않아서 그의 심기를 건드렸는데, 결국 모르드개가 유대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 하만이 모르드개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몰살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왕의 허락까지 받아놓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날짜만 기다리면 그만이었죠. 그런데, 이 때 모르드개가 나서서 에스더를 설득하여 이 일에 개입하게 만들고, 그러는 중에 왕이 왕궁일기를 읽다가 모르드개가 세운 공로에 대한 이야기를 발견하게 되고 이 두 가지 일이 맞물리면서 결국 하만은 자신이 모르드개를 달아 죽이려고 세원 장대에 달려 목숨을 잃게 됩니다. 


이 세상의 역사는 머리 좋고 힘 있는 사람들의 손에 의해서 움직여져 가는 것 같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그런 역사 속에서 때로는 그저 들러리로 그리고 때로는 피해자로 그렇게만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에스더서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보면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것은 중간 중간에 변수처럼 끼어드는 별 것 아닌 일들입니다. 그런 것들의 역사의 물길을 정반대로 바꿔가면서 그 역사가 결국에는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만듭니다. 그 이유는 역사의 주인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당장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모습을 보면서 같이 아파하고 걱정해야 할 때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도하게 절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또 무언가 그 역사를 내 맘대로 해 보려고 악하고 남에게 고통을 주는 일을 하려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든지 그런 역사 속에 작은 일 하나 던져 넣으시고 그것으로 인해서 역사의 흐름을 바로 잡으실 수 있으시니까요. 이것은 그저 역사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원리는 우리 인생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우리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 인생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움직여 가시는데 도움이 되는 도구가 되게 해야 하고, 또 나의 하나 하나의 선택이 내 삶 전체에서 플러스 역할을 하게 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 졌을 때, 그것이 나에게도 유익이 되고 또 영광이 될 수 있으니까요. 


오늘 저는 하만의 유대인들에 대한 계속이 공포되었을 때, 모르드개와 에스더 두 사람이 취했던 태도에 집중하게 됩니다. 비록 모르드개는 에스더의 사촌 오빠였지만 나이차이가 조금 많이 났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일찍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에스더를 마치 아버지처럼 키워주었지요. 그런데, 민족이 어려움에 처하자 그 일을 에스더에게 알리고 머뭇거리는 에스더를 향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목숨을 건지리라 생각하지 말라 이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음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아버지는 자기 딸만이라도 보호하려고 하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그렇지만 에스더의 아버지 같은 모르드개는 정반대로 합니다. 머뭇거리는 에스더를 오히려 적극적으로 그 일에 나서게 합니다. 그렇게 했을 때 처하게 될 위험이 어떤 것인지를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 러다가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했습니다. 모르드개의 설득을 들은 에스더 또한 완전히 그 뜻을 바꿉니다. 그의 굳은 결심은 에스더가 모르드개에게 했던 이야기의 마지막 말에 그대로 드러납니다. “죽으면 죽으리라” 


두 사람 모두 인간적으로도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그렇지만 이 두 사람이 이런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은 두 사람의 용감함으로부터 나온 결정이 아니었습니다. 두 사람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철저히 신뢰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두 사람 다 그 일이 에스더의 생명을 빼앗아 갈만한 위험한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에스더가 먼저 왕을 찾아가는 일도 그렇지만 나중에 직접 그 일을 밝힐 때, 왕이 그 이야기를 듣고 에스더 편을 들어주리라는 보장이 없었으니까요. 그렇지만 두 사람은 그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같은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의 운명은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특히 죽음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우리들도 이것을 믿습니다. 그렇지만 두 사람은 이 사실을 완전히 믿고 있었습니다. 만약 그렇게 옳은 일을 하다가 목숨을 잃게 된다면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두 사람의 생명을 거두어 가려는 뜻을 품고 계시기 때문이지, 아하수에로의 손에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에스더는 자신의 목숨을 하나님께 맡긴 채로 자신이 유대인인 왕후로서 자기 동족들을 위해서 마땅히 해야한다고 생각했던 그 일에 헌신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성도들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가야하는지 잘 알면서도 그 길을 잘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런 저런 핑계가 많이 있지만 결론은 그렇게 하다가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무언가를 잃게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 이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면 뻔히 알고 있는 바른 길을 가지 못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두려움을 극복하는 능력은 우리 자신에게서 나오지 않습니다. 그 능력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신뢰에서 나옵니다. 내 인생의 모든 것들, 심지어는 생명조차도 하나님께 온전히 달려 있다는 것을 믿는 믿음의 크기와 세기만큼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언가를 주시는 것은 단지 우리가 그것을 즐기고 누리라고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언젠가 주님의 뜻을 위해서 사용하라고 주시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들 때문에 하나님께 순종할 수 없어진다면 그것은 더 이상 우리에게 복스러운 일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이 나의 모든 것이 되시고 나의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는 진리를 기억하시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당당하고 용감한 신앙의 길을 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