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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5.10.18. 주일오전 - 이스라엘 자손을 기쁘게 한지라(여호수아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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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여호수아 22장 21-34절



지난 주일에 우리는 요단 동쪽 지파들이 자기들 땅으로 돌아가다 말고 요단 서쪽에 세워놓은 제단 때문에 이 세 지파와 나머지 지파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는 위기상황까지 갔던 내용을 살펴 보았습니다. 제단 하나 쌓아올린 일이 동족들 사이의 전쟁으로까지 이어질 뻔 했던 이유는 그 일이 요단 서쪽 지파들에게는 그만큼 심각하고 중대한 죄로 여겨졌고, 이스라엘 백성들 안에서 그 죄를 반드시 없애 버려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은 오늘 우리들과는 많은 차이가 있는 듯합니다. 오늘 이 시대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 중심이 되고 기준이 되어 있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에게 그리고 사람들에게 뭔가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을 굉장히 싫어합니다. 이런 경향은 교회 안과 성도들의 생각 속에까지 파고 들어와 있기 때문에, 성도들 중에도 죄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을 굉장히 불쾌하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죄에 대해서 듣는 다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이나 혹은 인간 전체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를 듣는 것이 되고, 또한 그런 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면 그 죄에서 떠나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기 때문이겠지요. 이런 시대의 흐름 때문인지 오늘날 교회 안에서는 좀처럼 죄에 대한 설교를 듣기가 힘듭니다. ‘죄’라는 말은 ‘문제’라는 말로 대체되어져 가고 있고, ‘회개’라는 말보다는 ‘치유’라는 말이 더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우리가 죄에 대해서 어떻게 느끼고 있던 간에 우리 신앙의 중심에는 바로 이 죄의 문제가 놓여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어야 하는 이유도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이고, 우리가 믿음으로 살면서 거룩해져 가야 하는 하는 것도 더 이상 죄가 우리 삶 속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야 하고 동시에 우리 삶 속에서 죄의 어두운 흔적들을 지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그리고 기독교 신앙이 죄의 문제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끊임 없이 그것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사람들을 죄인으로 정죄하고 그래서 불쾌함과 죄책감 속으로 몰아넣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죄를 멀리하게 만들지 않고서는 사람들을 고귀하고 아름답게 만들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대리석 덩어리의 거친 부분들을 모두 깎아내지 않고서는 훌륭한 조각품을 만들어 낼 수 없듯이, 우리 삶과 존재에 덕지 덕지 붙어 있는 죄를 처리하지 않으면 우리를 귀하고 아름답게 만들갈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죄에 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죄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그것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는 일을 불편하게 생각하고 불쾌하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런 생각 자체가 우리가 정말 우리답게 사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개인적으로도 그렇지만 공동체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계속해서 자기 속에 있는 죄된 모습들을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서 그 죄를 드러내야 하며 용서를 구해야 하며 그 죄와 싸워야 합니다. 그렇게 죄를 용서받아야 하고 또 죄로 부터 자신을 지켜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는 하나님께서 교회에 두신 영광과 복을 지켜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장애물 경기에서 승리하려면 앞에 놓여진 장애물을 불쾌한 눈으로 바라보아서는 안됩니다. 그 장애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장애물들을 뛰어 넘어야 합니다. 그래야 결승선을 통과하고 승리의 기쁨과 영광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성도와 교회는 항상 자기 앞에 죄라는 장애물이 놓여 있다는 것을 냉정하게 받아들이고 믿음으로 그 장애물들을 뛰어 넘어서 참 교회의 모습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그 뒤에 있는 영광을 맛볼 수 있습니다. 


요단 서쪽 지파들은 실로가 아닌 다른 곳에 제단을 쌓은 요단 동쪽 지파들과 전쟁을 하려고 모두 모여 들었습니다.  무척 화가 나고 흥분해 있었겠지요. 그렇지만 다행히 그들은 무조건 요단 동쪽 지파들을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비느하스를 책임자로 하는 조사단을 만들었고 그들을 요단 동편으로 파견했습니다. 결국 이렇게 한 덕분에 동족끼리 죽고 죽이는 비극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조사단 대표였던 비느하스는 요단 동편 지파들을 추궁합니다. 브올에서의 저질렀던 이스라엘의 죄와 아간의 죄를 예로 들면서 그 죄가 부족해서, 그런 죄악들이 얼마나 큰 비극으로 이어졌는지 몰라서 그런 일을 저질렀느냐고 따져 물었습니다. 그들은 그 제단이 하나님이 정하신 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마음대로 세운 것이고, 결국에는 우상숭배로 이어질 것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요단 동쪽 지파들은 자신들의 행동에 대해서 해명하기 시작합니다. 우선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께 다른 곳에서 제사를 드리거나 혹은 우상을 숭배하기 위해서 제단을 쌓은 것은 절대로 아니라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스스로에게 저주를 걸어가면서 까지 자신들의 결백을 주장했습니다. 사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들이 세운 제단의 위치 자체가 그들의 결백을 증명해 주고도 남습니다. 나중에 열매를 따 먹으려고 감 나무를 심는다면 그 나무를 우리 마당에 심겠습니까, 옆집 마당에 심겠습니까? 당연히 우리 집 마당이지요. 그러면 만약 그 제단이 하나님께 다른 곳에서 제사를 드리기 위한 것이거나 혹은 우상숭배를 위한 것이었다면 그 제단은 당연히 어디에 세워졌어야 할까요? 요단 서쪽이 아니라 요단 동쪽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제사를 드릴 때마다 자기들 땅도 아닌 요단 서쪽으로 건너와야 하고 또 요단 서쪽 지파들과 실랑이를 벌여야 할텐데는 바보가 아니라면 누가 그런 일을 하겠습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목적이 있어서 주의하고 이같이 하였노라” 무슨 말입니까? 애초부터 계획을 가지고 일이 이렇게 될 것을 기대하면서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미 그들은 자기들이 다른 제단을 세우면 분명히 나머지 지파들이 그런 식으로 자신들을 찾아올 줄 알고 있었고 그러면 꼭 이루어야 할 목적이 있어서 그 일을 했던 것입니다. 말을 계속 이어갑니다. “후일에 너희의 자손이 우리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희 르우벤 자손 갓 자손아 여와께서 우리와 너희 사이에 요단으로 경계를 삼으셨나니 너희는 여호와께 받을 분깃이 없을까 하여 너희의 자손이 우리 자손에게 여호와 경외하기를 그치게 할까하여 우리가 말하기를 우리가 이제 한 제단 쌓기를 준비하자 하였노니 이는 번제를 위함도 아니요 다른 제사를 위함도 아니라” 아직 이 제단의 용도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여기까지만 보아도 이 제단을 왜 세웠는지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지금 당장은 요단 서편 지파들이 요단 동편 지파들을 따돌리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요단을 경계로 서로 떨어져서 오랜 세월이 흘러 세대가 바뀌게 되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요단 동편 지파들은 사는 곳을 빌미로 나머지 세 지파가 함께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막아 버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요단 동편 지파들은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 하면서 그것을 막기 위한 방편으로 그 제단을 세웠던 것입니다. 그렇게 제단을 세워 놓으면 분명히 나머지 지파들이 자초지종을 알아보기 위해서 자기들에게 올 것이고, 그러면 그 때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어찌보면 요단 동편 지파들의 두려움은 그저 기우에 불과한 것처럼 들립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크게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땅은 남쪽으로는 이집트의 입구에서부터 요단 동편과 요단 서쪽, 그리고 블레셋 사람들의 땅까지를 포함하는 굉장히 넓은 지역입니다. 그렇지만 어디가 약속의 땅이냐라고, 어느 곳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이냐고 묻는다면 그 답은 요단 서편부터 블레셋 사람들의 땅 입구까지로 한정됩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요단 동편은 약속의 땅이 아닙니다. 그러니 세월이 흐르면 약속의 땅에서 살아가는 다수의 지파들이 약속의 땅이 아닌 곳에서 살아가는 소수의 지파들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그들을 배제시킬 수 있습니다. 충분히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제단을 세우는 상당히 충격적인 방법을 사용했던 것입니다. 


사실 이들이 단순히 가능성만을 보고 그런 일을 저지른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미 그런 분위기가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서 무르익고 있었습니다. 우선 이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는 본문 자체가 그것을 보여 줍니다. 원래 이스라엘이라고 하면 그것은 열 두 지파 모두를 일컫는 말입니다. 그런데 11절을 보면 요단 동편의 세 지파를 제외한 나머지 지파들을 ‘이스라엘 자손’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12절을 보면 그들이 제외되어 있는데도 실로에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모였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행간을 읽는다고 하는데요. 성경은 때로 이런 식으로 우리가 꼭 보아야 할 것을 숨겨 놓을 때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당시에 이미 싹트고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스로를 바라보는 시각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미 어느 정도는 요단 서쪽 지파들은 요단 동쪽 지파들과 자신들을 분리시켜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이 생겨난 것은 위에서 말씀드렸듯이 요단 동쪽 지파들이 살아가게 될 지역 때문이었습니다. 19절을 보면 비느하스가 이렇게 말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런데 너희의 소유지가 만일 깨끗하지 아니하거든 여호와의 성막이 있는 여호와의 소유지로 건너와서 우리 중에서 소유지를 나누어 가질 것이니라” 이야기 자체는 선의에서 나온 참 좋은 이야기이지만 가만 살펴 보면 이 말 속에는 비느하스조차 요단 동편의 땅에 대해서 잘못된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단 동편 땅은 가나안이 아닙니다. 약속의 땅도 아니구요. 그래서 그 곳은 더러운 곳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땅이 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 르우벤 자손, 갓 자손, 므낫세 반 지파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그런 땅에서 살아갈 것입니다. 게다가 그들은 이 쪽 땅이 아니라 그 쪽 땅을 달라고 한 사람들입니다. 약속의 땅이 아닌 땅, 더러운 땅, 하나님의 땅이 아닌 곳을 달라고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요단 서쪽 지파들은 그들을 자기들과 분리시켜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그런 생각들 중에서 맞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요단 동편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땅입니다. 거기라고 요단 서쪽보다 더 더럽지 않습니다. 거기라고 해서 하나님의 땅이 아닌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이미 살펴본 대로 요단 동편 지파들은 자기들만 편하자고 불순한 의도에서 그 땅을 달라고 선수쳤던 것이 아닙니다. 일부러 더러운 땅을 선택한 것도 아니구요. 그렇지만 그들은 본의 아니게 자신들이 점점 왕따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이제 실제로 요단을 건너가게 되자 그 일에 대해서 큰 두려움을 가지게 되었고 그래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요단 서쪽에 큰 제단을 쌓는 일을 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자신들의 입장과 진심을 알리기에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요단 동편의 지파들이 제단을 쌓은 것은 제사를 드리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저 하나의 ‘증거’가 되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진짜로 자신들이 우려하는 일이 일어나게 되면 자신들도 이스라엘의 일부이며 어엿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증거 말입니다. 그래서 이들이 요단 동쪽이 아니라 서쪽에 그 제단을 세웠던 것입니다. 나중에 후손들의 시대에 요단 동편 지파의 후손들이 딴 소리를 하면 그 제단을 가리키면서 저 제단이 바로 우리들도 너희들과 함께 하나님을 섬기는 어엿한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는 증거이고 그것은 이미 우리 조상들 사이에서 결론이 난 문제다. 그래서 저 제단은 우리 쪽이 아니라 너희 쪽에 세워진 것이다라고 말하기 위해 말이지요. 


잘못은 요단 서편의 지파들에게 있었습니다. 요단 동편 지파들을 말도 안되는 이유와 오해 때문에 마음으로 부터 내쫓은 것은 그들이었으니까요. 그러한 오해와 따돌림이 요단 동편 지파들이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의 자리에서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지게 했고, 결국 제단을 쌓게 했던 것입니다.  


요단 서편의 지파들은 그 당시 공동체 안의 죄와 하나님 앞에서 범하는 죄에 대해서 굉장히 예민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죄를 처리하기 위해서 요단 동편 지파들과 전쟁까지도 불사하려고 한 것이지요. 이것은 하나님을 기준으로 놓고 보면 굉장히 바람직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 속에 다른 지파들에 대한 분리의식과 차별이 있었고, 동시에 자신들에 대한 우월감이 있었다는 것이 선뜻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올바른 사람이 다른 사람을 그렇게 대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게 사람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바르다고 생각하고, 또 영적으로 바람직한 상태에 있다고 생각할 수록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되기가 더 쉽습니다. 


별로 은혜도 못 누리고, 자기가 생각하기에도 별로 거룩한 것 같지도 않고, 영적으로도 그저 그렇고 그런 상태에 있을 때는 옆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편안한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은혜를 받게 되고 스스로를 거룩하게 하기 위해서 죄를 조심하고 또 멀리하기 시작합니다. 너무 바람직한 일이지요. 그런데, 그러면서 옆에 있는 사람들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나는 은혜를 받았는데, 저 사람은 아닙니다. 나는 거룩하려고 애쓰는데, 저 사람에게서는 그런 노력이 보이질 않습니다. 이게 이렇게 차이점만 보이는데서 끝나면 좋은데, 인간은 꼭 그다음에는 비교와 가치판단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내가 저 사람보다 낫다, 그래서 저 사람은 마음에 안든다는 생각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당연히 따라오는 것은 분리의식입니다. 그 사람과 나 사이에 선을 긋게 되고, 이제 더 이상 그들은 나와 같은 종류의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과정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의도적으로 브레이크를 걸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동으로 그렇게 됩니다. 


한 사람의 인격과 생각은 그 사람 안에서 하나로 통합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가만히 살펴 보면 오히려 그런 사람들이 적습니다. 절대로 한 사람 안에 들어있을 수 없을 것 같은 여러 가지 모습이 한 사람 속에 들어있구요, 뿐만 아니라 그 당사자가 그렇다는 것자체를 느끼지 못할 때도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신앙도 그런 모습일 때가 많습니다. 한 쪽은 괜찮은데 다른 한 쪽은 많이 부족하지요. 하나님을 기준으로 해서 보면 상당히 은혜롭고 바람직한 상태에 있으면서도 오히려 그것 때문에 사람들에게는 더 냉정해 질 수 있고, 또 사람들을 용납하고 받아들일 여유가 더 없어질 수도 있습니다. 은혜와 거룩함이 빛이라면 이런 모습들은 그 빛이 만들어 내는 어두운 그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모습들은 성도 개인에게 죄가 되기도 하지만 그것이 교회 공동체를 갈라 놓고 쪼개 놓기 때문에 더욱 더 큰 문제가 됩니다. 꼭 무슨 일 때문에 서로 다투고 편을 나눠야 교회가 분열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어떤 사람을 괄호 밖에 내 놓을 때, 그 때 이미  교회는 보이지 않는 벽으로 나눠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는 저 사람과 다르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저 사람과 나를 따로 떼어 생각하려는 분리의식과 끊임 없이 싸워야 합니다. 그런 싸움이 있어야 내가 받은 은혜와 거룩하게 살려는 노력은 공동체를 깨뜨리는 것이 아니라 더 풍성하게 하고 지켜주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요단 동편 지파들의 해명을 들은 비느하스와 대표자들은 그들의 말을 굉장히 기뻐했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오늘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 줄을 아노니 이는 너희가 이 죄를 여호와께 범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너희가 이제 이스라엘 자손을 여호와의 손에서 건져내었느니라” 이 사건은 요단 서쪽 지파들에게 그들이 잊고 있었던 것을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자신들과 요단 동편 지파들을 나누지 않습니다. 모두를 그저 ‘우리’라고 부르면서 그 일이 오히려 그런 ‘우리’ 안에 하나님께서 계신다는 것을 확인하게 해 주었다고 고백합니다. 정말 값진 깨달음입니다. 요단 동편 지파들이 행한 일은 그들 모두가 전부 형제들이라는 것을 다시 확인하게 해 주었고, 그들도 자신들처럼 한 하나님을 소중히 여기는 똑같은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시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나가 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비느하스는 그 일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너희가 이제 이스라엘 자손을 여호와의 손에서 건져 내었느니라” 이 말은 분명히 ‘너희가 우상숭배를 하려고 한 것도 아니고, 따로 제사를 드리려고 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이제 우리가 저 제단 때문에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야 할 이유가 없어졌고 그러니 너희들이 우리 모두를 하나님의 손에서 건져 낸 셈이다’라는 뜻으로 한 말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이 말 안에는 한가지 뜻이 더 담겨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여야 한다는 것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생명과도 같은 것입니다. 한 머리에 두 개의 몸이 있을 수 없듯이 한 분 하나님 밑에 서로 갈라져 있는 두 개의 백성이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그래서 그들이 서로 분열되면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징계가 따라올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니, 요단 동쪽 지파들이 온 이스라엘을 다시 하나로만든 일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진노의 손길에서 건진 일이 되었던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우리 청년 하나가 요즘 목사님 설교를 들어보면 교회에 대한 설교가 참 많다고 말했습니다. 참 고마웠습니다. 그래도 제  설교를 듣고 기억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그랬습니다. 설교 뿐만 아니라 교리공부의 주제까지 교회에 대한 주제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요즘 제가 교회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지만, 사실 이것은 제가 의도적으로 선택한 것은 아닙니다. 공교롭게도 요즘 교회에서 살펴보고 있는 성경 본문들이 거의 교회에 대한 본문들입니다. 수요일날 함께 공부하고 있는 고린도 후서도 교회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있는 책입니다. 금요일에 함께 살피고 있는 사도행전도 요즘은 초대교회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제 끝나기는 했지만 그동안 새벽기도 시간에 살펴 보았던 에스라와 느헤미야도 이스라엘 공동체, 그러니까 교회의 회복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책입니다. 그리고 여호수아서의 뒷 부분도 이스라엘 공동체가 약속의 땅에 자리를 잡아가는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기 때문에 교회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요즘 제가 하는 설교들이 교회에 대한 것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된 것이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라고 생각합니다. 설교는 교회 공동체의 회중들에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담아 전달하는 그릇입니다. 그렇다면 요즘 하나님께서는 그 그릇에 교회에 대한 말씀을 듬뿍 담아서 집중적으로 우리에게 먹이고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려분, 교회는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주시려는 은혜와 복을 담는 가장 중요한 그릇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마 우리들에게 이것을 우선적으로 알려 주고 싶으신 것 같습니다. 그 은혜를 가득 담을 수 있는 그릇이 어떤 그릇인지 알려 주시려고 말이지요. 오늘은 하나님께서 그 그릇에 교회는 어떤 이유로건 금이 가고 깨어져서는 안된다는 메세지를 담아 우리 밥상에 올려 주셨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후, 사람들 사이에는 틈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죄는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 뿐만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틈을 만들어 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꾸 틈을 만들어 내려는 것은 인간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성향입니다. 하나가 되기를 원하는 것 같지만 그것은 그저 나와 비슷한 사람, 내가 함께 있어서 이익이 되고 불편하지 않은 사람들과 하나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지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는 하나가 되는 것을 달가와 하지 않습니다. 누구라서 마음 속에 이런 성향이 없겠고 또 이런 성향을 완전히 없앨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성도는, 특히 교회 안의 성도는 이런 마음을 그냥 내버려 두거나 그냥 그것을 따라 살면 안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면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교회 안으로 부르신 것은 그런 마음과 그런 행동을 넘어서게 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자꾸 괄호를 만들지 말고 그 괄호를 지우고 괄호가 없는 사람이 되고, 또 괄호가 없는 공동체가 되라고 말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위해서 하실 수 있는 모든 일을 하셨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우리의 머리로 세우셨으며 우리들을 한 몸으로 만드셨고, 그 몸 안에 한 영이신 성령님을 주셨습니다. 이제는 우리 차례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진짜로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해서 무언가를 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열 두 지파가 서로 마음을 열고 대화하기 시작했을 때, 요단 서편에 쌓아올린 제단은 그들이 서로 싸워야 할 이유가 아니라 그들을 다시 하나로 묶어주는 은혜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당장 하나가 되기 위해서 특별한 일 할 수 없어도, 우리는 우리 자신의 마음만큼은 충분히 열 수 있으니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서로를 향해서 마음을 많이 좀 열어주시기 바랍니다. 더 많이 활짝 열어주시기 바랍니다. 이해하기 위해서 열어주시고, 또 하나가 되기 위해서 열어주시고, 하나됨을 깨뜨리는 이유들을 제거하기 위해서 열어주십시오. 무엇보다도 주변을 맴도는 자신을 하나 안으로 들여놓기 위해서 마음을 활짝 열어 주십시오. 그러면 지금은 다른 지체들과 하나가 되지 못하게 하는 이유가 오히려 우리를 온전히 하나로 만드는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요단 서편의 제단처럼 말이지요. 


우리 모두가 서로를 향해 마음과 삶을 열어서 서로에게 너는 내 참 형제라, 참 자매라 부를 수 있는 그런 교회를 세워가기를 소망합니다. 우리 모두가 우리 안에 있는 희미한 괄호라도 있다면 그것까지 다 지워 없애서 우리 교회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기쁨이 가득 담긴 깨끗하고 단단한 그릇같은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