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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5.11.04. 새벽기도 - 성경읽기와 묵상(욥기 39-4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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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일 : 2015년 11월 4일 수요일




어제 책을 읽는데 이런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사실 이전에도 여러 번 읽었던 놀위치의 줄리안이라는 사람의 이야기인데요. 줄리안이 하루는 기도를 하는데, 눈에 도토리만한 크기의 작은 물체가 보이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물었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하고요. 그랬더니 하나님은 이런 대답을 주셨답니다. “내가 지은 천하와 만물이다!” 그 때 줄리안은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분이신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 이야기를 읽는데,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며, 그 하나님께 기도하고, 또 그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이해할 수 없는 기적인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온 우주와 그 안의 만물들을 다 합쳐도 그것은 하나님 손 안의 도토리 크기 밖에 안됩니다. 아니, 그 크기도 안되지요. 무한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리 크고 넓어도 결국 유한한 우주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니까요.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도대체 얼마나 작은 것일까요? ‘없다’고 표현해도 전혀 지나친 말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인간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또 그 분께 기도를 드리고 그 기도의 응답까지 받으면서 살아가고 있다니 어찌 이것을 보고 기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38장에서 시작된 욥을 향한 하나님의 질문은 39장과 40장에서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한 질문 질문이 아름다운 싯구절 같지만 실제로는 엄중한 질문들입니다. 질문은 크게 몇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네가 이것을 아느냐?”, “네가 이것을 했느냐?”, “네가 이것을 결정했느냐?”, “네가 이것을 본 적이라도 있느냐?” 이 질문들은 모두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 주권과 능력들에 대한 것들이었고, 그것에 비교되는 인간의 한계와 무지에 대한 질문들이었습니다. 질문을 퍼 부으시던 하나님께서는 욥을 향해서 하나님을 탓하는 자, 트집을 잡는 자는 대답을 해 보라고 다그치셨습니다. 욥은  아무리 생각해도 드릴 말씀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비천함을 인정하면서 자신은 입을 가리울 뿐, 이제까지 한 말에 무슨 말을 덧붙일 수 있겠느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욥이 이 말을 한 것이 좋은 마음으로 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여전히 하나님에 대한 불만은 남아 있었지만 그렇게 말한 것이었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말씀을 이어 가실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욥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하는 무지한 말로 자신의 생각을 더욱 더 흐리게 만들고 있었고 또 그래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트집을 잡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잘 알지 못하면서 이렇다 저렇다 하는 말은 그저 트집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트집이라는 것은 언제나 정당하지 못한 것이구요. 


하나님께서 그래도 화가 나신 이유는 하나님 보시기에 욥이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부인하려고 하고 있었고 그러면서도 자신의 의는 세우려고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의롭게 살았는데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하느냐, 그렇다면 하나님은 의롭지 않은 분이 아니냐고 따져 묻는 쪽으로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이나 어려움을 당할 때, 그 어려움은 항상 하나님이 직접 주시는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결국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서 우리 삶에 찾아오는 것이기 때문에 그럴 때, 하나님을 부당하다고 비난하기 쉽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는 것을 피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인간은 항상 자기 의라는 함정에 빠지기가 너무나 쉬운 존재이고, 그러기 위해서 자기 아닌 모든 것들을 원망하고 비난할 준비가 되어있는 존재이니까요. 그렇지만, 그래도 그것은 잘못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결코 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언사가 우리도 모르게 하나님을 불의하다고 비난하도록 그냥 내버려 두어서는 안됩니다. 


38장부터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하나님께서 욥에게 던진 질문들을 통해서 강조하고 있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전지하심, 하나님의 전능하심,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40장 8절에서 이런 것들을 하나님의 공의로우심과 연결시키십니다. 그리고, 욥을 하나님의 진지 전능하심과 주권에 대해서 도전하고 의심한다고 꾸짖으신 것이 아니라 욥이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의심하고 하나님을 불의한 분으로 매도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욥을 꾸짖으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십니까? 무슨 일을 하든, 어떤 선택을 하든 그 모든 일들이 불의하고 불공평한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그런 분이실까요? 아마 항상 우리가 이 진리에 감정적으로 동의하기는 힘이 들 것입니다. 우리의 감정은 사실과 진리 보다는 우리가 경험하는 일들에 좌우되기가 쉬우니까요. 그렇지만 우리가 감정을 아얘 무시할 필요도 없고 또 그래서도 안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감정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무조건 답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에 따라 움직여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감정에는 눈과 뇌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십니다. 공평하신 분이시구요. 우리가 하나님을 왜 이런 분으로 믿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전지하시고 전능하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것과 그 모든 것들이 어우러져 있는 이 세상을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리실 권한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만물과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이 가는 길을 다 알고 계십니다. 어떻게 섭리해 가고 다스려 가시면 이 세상이 마지막에는 가장 선하고 공의로워질지 다 알고 계십니다. 게다가 하나님은 모든 일을 하실 수 있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시는 대로 이 세상을 움직여 가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이시라고 해도 하나님이 이 세상을 다스리실 권세를 가지고 계시지 않으시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온 우주를 다스리실 수 있는 합법적인 권리를 가지고 계십니다. 온 우주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가장 선하게 그리고 가장 공의롭게 다스려 가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지금도 이 세상을 그렇게 통치하고 계신다는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다스리심은 당장 눈 앞에서 사람들이 기대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럴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이렇게 우리가 당장 보기에 항상 의롭다고 여겨지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다스리심은 항상 일의 마지막을 보면서, 더 길게 보면 이 우주 전체가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그 순간을 바라보면서 이루어져 가고 있기 때문이지 하나님의 다스리심 자체가 공의롭고 선하지 않기 때문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생각도 필요하고 감정도 필요하지만 믿음도 꼭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우심과 선하심을 의심하게 만드는 눈에 보이는 증거들을 넘어서서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게 해 주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우리의 감정과 생각을 무시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지켜 나가도록 해 주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감정과 생각이 하나님을 의심하게 만들고 하나님을 원망하게 만들 때, 그 때는 이미 허락하신 믿음을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의지를 가지고 믿음을 지켜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공의로우시고 선하신 하나님께서 결국 하나님의 공의로우심과 선하심을 드러내시는 날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의심을 이기게 하는 강건한 믿음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