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5.11.06. 새벽예배 - 성경읽기와 묵상(전도서 1-3장)


20151106D (#1).mp3.zip





설교일 : 2015년 11월 6일 금요일




전도서는 히브리어로 ‘코헬렛’이라는 광장에서 사람들을 불러 모아서 그들을 가르치던 어떤 사람이 기록한 성경입니다. 이 책은 사실 별로 성경같아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전도서를 읽다가 보면 왜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모든 것이 헛되다는 이야기만 나오는지, 그리고 뭔가 가치 있고 의미있는 일들, 영적인 가치를 지닌 교훈들 보다는 그저 평범하고 소시민적인 삶을 사는 것이 최고라는 실망스러운 이야기들만 가득한지 이해하기가 힘들지만 사실 그것이 전도서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메세지의 굉장히 중요한 배경이 되는 것들입니다. 


전도서는 ‘만약 하나님이 없다면’, 혹은 ‘하나님이 계셔도 별로 우리와 상관이 없는 분이라면’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인생과 이 세상의 일들을 담담하게 그리고 있지요. 그래서 다른 성경과 똑같이 읽으면 안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진짜로 들려주시려는 말씀을 놓치게 됩니다. 사실 전도서는 몇 장씩 따로 읽거나 한 구절씩 읽기에 적당한 책이 아닙니다. 전도서를 읽어 보면, 그것 자체로 수긍이 가는 내용들이 많습니다. 정말 그렇다고 무릎을 치게 됩니다. 그렇지만 거기서 끝나면 전도서는 정말 잘못 읽는 것입니다. 전도자는 그런 이야기들을 독자들을 목적지로 이끄는 표지판처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허무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더 이상 하나님을 믿지 않고 신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과학이 힘을 얻고, 진화론이 모든 것을 설명하는 수단이 되면서 사람들은 이 세상 밖에 있는 그 어떤 것도 인정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저 이 세상이 이렇게 된 것이나 이 세상에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라고 믿게 되었고 그래 모든 일은 정해진 목적과 의미가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이 ‘나는 소중해’라고 외치고, ‘나에게는 행복할 권리가 있어.’라고 말하며, ‘나의 인생에는 이러 저러한 의미가 있어’라고 외치지만 신이 없는 세상, 특히 하나님을 부인하는 세상에서는 그런 것을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다른 방도가 없으니 그냥 그런 거야하고 계속해서 억지를 부리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이 세상과 이 세상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우연’의 결과라면 이 모든 것들이 귀하게 여겨져야 할 이유도 없고, 또 그것들을 지켜 내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우연은 목적, 의미, 가치와는 전혀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어느날 갑자기 그 모든 것들이 우연히 사라진다고 한들, 그저 우연한 세상에 또 한 번의 우연이 더해졌을 뿐이지 뭐 심각하게 생각하고 호들갑을 떨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아니라고 소리치고 이런 저런 주장들을 더하고는 있지만 계속해서 허무함만 커져가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전도서는 사실 그 어떤 성경보다도 현대세계와 잘 맞아떨어지는 책이라는 생각도 들고, 특히 젊은 세대에게 잘 가르쳐 지면 좋을 그런 책인 것 같기도 합니다. 


전도자는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는 말로 전도서를 시작하고 있는데요.   그는 ‘이 세상과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완전히 허무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주 충격적이지요. 그렇다면 전도서가 이 야이기를 하자고 기록된 성경책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의 이야기를 하려고 기록된 성경책입니다. 이야기하고 있는 이치야 틀리지 않지만 그래도 진짜 이야기는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전혀 반대입니다. 


우리가 허무함을 느끼는 이유는 우리가 그렇게 세우고 지켜내려고 애쓴 것이 너무도 쉽게 무너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 실은 우리가 그 어떤 것으로도 완전히 만족할 수 없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않기 때문이지요. 경험되는 일들도 허무하고, 또 모든 것이 갖춰져 있다고 여겨질 때도 만족을 모르니 인생은 허무할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전도자는 처음에 이 세상의 이치를 알면 그 허무함이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들을 연구했지요. 그러나, 그것을 통해 발견한 것 또한 허무함이었습니다. 사람들이 허무하지 않으려고 애쓰고 노력하는 것이 결국 바람을 잡으려는 노력처럼 부질 없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그 노력 덕분에 세상과 인생에 대해서 이전보다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지만 오히려 그는 그 지식 때문에 이렇게 말합니다.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 이 구절은 성경을 좀 아는 공부하기 싫은 아이들이 즐겨 찾는 레퍼토리입니다. 제가 신대원 다닐 때 공부 열심히 하기 싫어하는 전도사들도 농담삼아 인용해 대던 구절이었구요. 그렇지만 이런 말은 정말 많이 공부해 본 사람이, 그래서 알게 된 것이 정말 많아진 사람만이 할 자격이 있는 말이지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은 아니겠지요. 아무튼 전도자는 열심히 지혜와 지식을 추구했지만 그것은 오히려 고민만 더 크게 만들었을 뿐 허무함을 달래는 데는 아무런 도움도 되질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 전도자가 손을 댄 것이 바로 쾌락, 그러니까 ‘즐거움’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파티도 벌였고, 소유가 주는 즐거움을 얻기 위해서 종들도 더 사고 과수원과 농장도 꾸며 보았습니다. 또 가장 값진 보물들을 수소문해서 모두 구입해다가 쌓아놓기도 했습니다. 그것이 잠시의 즐거움을 주었기 때문에 아주 짧은 순간 즐거움이 허무함을 대신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시간이 지나니 그 뿐이었습니다. 그런 것으로는 허무함을 달랠 수가 없었습니다. 


지혜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비교해 보니 그래도 지혜로운 자가 훨씬 더 나은 것 같았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이 어둠 가운데서 살아간다면 지혜로운 사람은 그래도 빛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다고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결국 ‘죽음’을 생각하자 결론이 똑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죽는다는 것을 알고 죽으나 모르고 죽으나 죽는 것은 매한가지 였고, 그렇게  땅 위에서 사라지고 나면 지혜로운 사람이나 어리석은 사람이나 영원히 기억되지 못하는 것은 똑같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왕으로서 최선을 다해 나라를 다스리는 일도 헛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자기가 아무리 힘써서 지혜롭게 나라를 다스렸다고 해도 자기 뒤에 얼마나 어리석은 후계자가 올지도 모르고 또 그렇다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될 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결국 전도자는 그저 먹고 마시며 열심히 일하면서 살아가는 소소한 즐거움이 최고라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전도자는 그런 즐거움과 기쁨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지만 그렇다고 그 기쁨만 바라보고 산다면 또한 결국에는 허무해 질 수 밖에 없는 그런 것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똑같은 것도 선물로 받으면 너무 기쁘고 만족스럽지만 열심히 따라가서 붙잡으면 그만큼 기쁘고 만족스럽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앞으로도 우리는 전도서에서 전도자가 허무하다고 소개해 주는 것들을 수없이 만나게 될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답이 나온 것이 아니니까 아무리 그런 이야기에 고개가 끄덕여지더라도, 그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과 우리의 인생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하더라도 계속해서 함께 전도서를 묵상해 갔으면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전도서를 통해 느끼는 허무함과 무의미함이 클 수록 그 해답이 주는 기쁨과 은혜가 클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