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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5.12.03. 새벽기도 - 성경읽기와 묵상(이사야 34-3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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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일 : 2015년 12월 3일 목요일





보복, 그러니까 원수 갚는 일은 그다지 훌륭한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이 당한 것을 계속 기억하고 마음에 품고 있다가 기회가 왔을 때, 그대로 그리고 자신이 당한 이상으로 되돌려 주는 것이기 때문에 용서나 관대함과는 거리가 있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을 ‘보복하시는 분’이라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이것은 성경이 하나님에 대해서 들려주는 충격적인 설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이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이 말 때문에도 하나님을 심각하게 오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처럼 말이지요. 그렇지만 하나님은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갚아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갚아주신다는 뜻일까요? 우선 우리는 하나님의 보복이 하나님께서 당하신 일을 되갚아주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보복은 분명히 악을 행한 사람들과 나라들을 향한 것이지만 그것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악한 나라들과 악한 사람들 아래에서 고통과 핍박을 당했던 사람들을 위해서 행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 하나님에 대해서 알아야 할 수많은 것들이 있지만 그 중에는 우리를 섬뜩하게 만드는 것들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것들을 모르고서 하나님을 믿으면 절대로 안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제대로 믿고 섬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바로 그렇게 모르는 그 부분 때문에 절대로 가서는 안되는 길로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반대 편에서는 그것을 알고서 하나님을 섬길 때 얻을 수 있는 귀한 은혜와 소망을 깨닫지 못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복하시는 하나님, 그러니까 약한 사람들과 선한 사람들이 악한 사람들이나 혹은 악한 나라들에게 당한 일을 악한 사람들이나 악한 나라들에게 고스란히 돌려주시는 분일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그 분이 온 우주가 지켜야 할 법을 만드신 입법자이시고 또한 그 법으로 온 세상을 재판하시는 재판관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억울한 사람,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악한 자들을 소송걸면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공평과 정의로 판단하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소송이라는 것이 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하나님께 탄식하면서 드리는 기도가 될 것이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라면 그저 억울한 눈물이나 탄식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것들을 모두 듣고 계십니다. 그 고소장들을 모두 접수하고 계십니다. 그러다가 신원하시는 해가 오면, 주님의 날이 오면 그 모든 송사들을 처리하십니다. 공평과 정의로 말이지요. 그러니 악한 자들이나 악한 나라가 힘 없고 선한 사람들과 나라들을 괴롭힌 일들은 모두가 다 고스란히 악한 자들에게 되돌려 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첫째로 우리에게 우리 삶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되돌아 보게 합니다. 우리도 잘못하면 나보다 약하고 힘 없는 누군가에게 고통을 줄 수 있고, 억울한 눈물이 흐르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은 자신 때문에 누군가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힘들고 어렵지만 항상 다른 사람들의 연약함을 잘 헤아려 주어야 하고, 마음이 차갑고 냉정해지거나 혹은 잔인해지지 않도록 스스로를 잘 지키고 돌보아야 합니다. 모든 행동이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고 보면 자기 마음을 잘 지켜내고 가꾸는 일이야 말로 내가 하나님의 법정에 서야 할 일을 줄여나가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성도들은 항상 약한 자, 가난한 자, 나보다 아래에 있다고 여겨지는 자들을 인격적으로 배려를 가지고 대하기 위해서 애써야 합니다. 눈물과 탄식, 그리고 원망으로 나를 하나님께 고소할 수 있는 사람들이 이런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약하고 부족한 자들을 위해서 신원하시는 분이시라는 사실,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보복하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은 우리에게도 큰 위로와 소망이 됩니다. 이 세상에서 예수를 믿고 살아간다는 것은 사실 강자가 되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간혹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시는데 그것은 완전한 오해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등에 업고 자기가 원하는 성공을 얻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탐욕에서 나온 오해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삶은 항상 연약함에 노출된 상태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의지하는 것을 성도들은 의지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상이 다 가는 길을 성도들은 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성도들은 더 많은 상처와 손해를 보고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처럼 받은만큼 되돌려 주며 살아갈 수도 없고 말이지요. 그래서 만약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면 받지 않을 수 있는 고통도 많고 탄식도 많아질 수 밖에 없습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또 자기 삶의 자리에서 어디서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보복하시는 하나님, 자기 백성의 억울함을 신원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성도에게 얼마나 커다란 위로와 소망이 됩니까? 정말로 그런 하나님을 믿을 때, 성도는 계속해서 자기가 걸아가는 의로운 길을 걸어갈 수 있게 됩니다. 


이런 성도들에게 더욱 더 은혜가 되고 힘이 되는 것은 그렇게 하나님께서 재판관이 되셔서 모든 것을 바로 잡는 날, 변화되게 될 이 세상의 모습입니다. 35장에 나와 있는 모습 말입니다.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뜨거운 사막이 변하여 못이 될 것이며 메마른 땅이 변하여 원천이 될 것이며 승냥이의 눕던 곳에 풀과 갈대와 부들이 날 것이며  거기에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 바 되리니 깨끗하지 못한 자는 지나가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될 것이라 우매한 행인은 그 길로 다니지 못할 것이며 거기에는 사자가 없고 사나운 짐승이 그리로 올라가지 아니하므로 그것을 만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받은 자만 그리로 행할 것이며 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들의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로다” 


정말 멋지지 않습니까? 정말 흥분되지 않습니까? 이 아름다운 나라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간 사람들의 나라, 의인들의 나라가 될 것입니다. 당연하겠지요. 그 때가 되면 악인들은 모두 하나님의 보복으로 영원한 형벌을 받고 그 나라에서 사라지게 될테니까요. 우리는 항상 우리의 마음과 생각 속에 그 영원한 나라의 대로를 활보하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그리며 살아야 합니다. 그 나라에서 그렇게 살아가려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생각하고 고민하며 또 선택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그 나라에서 슬픔과 탄식이 사라진 삶, 머리 위에 영영한 기쁨을 쓰고 춤추듯이 살아가는 그런 복된 삶을 영원히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모든 탄식과 슬픔을 신원하실 날, 악인에게는 보복의 날이 되고 구속받은 의인들에게는 영원한 보상이 될 그 날을 기억하시면서 언제나 의인의 길을 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