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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5.12.30. 새벽예배 - 성경읽기와 묵상(누가복음 16-1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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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일 : 2015년 12월 30일 수요일




지난 월요일에도 함께 묵상했지만,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이미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가 들어왔고, 또 그렇기 때문에 그 이전보다 마지막 때가 더 가까이 왔다는 것을 전제로 한 말씀들입니다. 그렇게 읽지 않으면 굳이 이렇게 해야하나,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들이 반복해서 생겨나는 것을 막을 길이 없고, 그 질문들이 결국에는 믿음의 결단을 가로 막습니다. 평상시의 삶의 태도와 전시의 삶의 태도가 다르듯이 예수님이 오시기 이전과 오신 이후의 성도들의 삶의 태도는 달라질 수 밖에 없고 또 달라져야만 합니다. 이제 성도들 다시 오실 주님, 그렇지만 언제 오실지 모를 주님을 기다리면서 사는 사람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이 오실 때, 하나님 나라를 가지고 오셨다는 말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구원자로 오신 것일 뿐만 아니라, 왕으로 오셨다는 말입니다. 왕에게는 통치권이 있습니다. 그리고 왕은 그 통치권으로 자기 나라를 다스립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가지고 오셨다는 말은 바로 주님이 왕이 되셔서 그 통치권으로 이 세상을 다스리시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바로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생겨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주인으로 삼고, 이 세상을 주인으로 삼고서 살아가던 사람들이 이제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일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일이 진행될만큼 진행되면 그 때 예수님은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리고 온 우주를 완전한 하나님 나라로 만드시고 또 다스리실 것입니다. 


성도는 이것을 알고 또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는 다른 생각과 다른 마음, 그리고 다른 태도로 살아가게 됩니다. 누가복음 16장과 17장에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말씀들이 바로 그 일에 대한 말씀들입니다. 


 예수님의 교훈들 중에서 돈에 대한 말씀들만큼 우리에게 부담을 주는 말씀들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돈은 쌓아놓고 자랑하거나 힘으로 삼거나 기대어 살아갈 어떤 것이 아니라 나눠주고 섬기기 위한 도구입니다.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가장 조심해야 할 우상입니다. 16장에 나오는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와 거지 나사로와 부자 이야기는 주님께서 사람들에게 그것을 알려 주시기 위해서 주신 대표적인 말씀들입니다. 불의한 청지기 비유를 통해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불의한 사람들도, 불의 한 재물을 가지고 불안한 자기 미래를 위한 준비에 최선을 다한다. 그런데, 물질이 전부가 아니며, 물질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너희들, 그 물질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잘 알고 있는 너희들은 그 재물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삶을 위해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너희들은 물질 사용에 있어서도 이 세상의 악한 사람들보다도 어리석은 것이 아니냐?’ 그러면서 다시 한 번 분명히 말씀하시죠.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주님은 정곡을 찌르셨습니다. 우리가 물질을 가지고 영원한 준비하는 지혜를 발휘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 돈이 섬김과 사랑의 대상이나 목적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삶을 준비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도구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면서 동시에 재물도 섬길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그렇게 하고 싶은 욕심을 포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로 하나님을 섬기려고 한다면 하나님과 물질은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하나님만이 목적이 되실 수 있으며 돈은 절대로 목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삶으로 옮겨내야 합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그렇게가 아니면 도저히 해석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중간지대는 없습니다. 


그 다음, 19절부터 이어지는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는 그 교훈을 더 직접적으로 들려 줍니다. 가만히 보면 이 비유 속에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믿음에 대한 이야기는 없습니다. 그것은 이 두 사람이 모두 이스라엘 사람이고 스스로를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 비유는 그런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참 특이한 점은 거지 나사로의 경우 한 일이 아무 것도 없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단지 살아있을 때 고난을 받았다는 이유로 말입니다. 그렇지만 부자는 살아있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다는 이유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주님께서 밝혀주신 두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거나 혹은 그렇지 못했던 이유는 우리 믿음에 관한 아주 중요하고 어쩌면 결정적인 사실을 알려 줍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는 모두에게 같은 것을 요구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온 몸에 피부병으로 엉망이 된 거지 나사로는 그 몸 하나 건사하는 것도 힘겨웠습니다. 그가 남을 위해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반면에 부자는 어마 어마한 재산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남을 위해서, 특히 병들고 가난하고 굶주린 사람들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이런 경우에 하나님께서 두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나사로 같은 사람들에게는 아마도 그저 믿음을 지키는 일만을 요구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부자같은 사람들에게는 그 믿음의 분명한 증거를 요구하시는데, 그 증거가 바로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재물을 가난하고 힘든 이웃들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부자들에게 명하신 의무이고 이 의무에 순종하는 일은 곧바로 그가 과연 무엇을 섬기느냐 하는 것으로 연결되게 되어 있으니까요. 오늘 하나님께서 주시는 물질적인 복은 너무나 좋아하면서도 그 복을 받고서 도대체 무엇을 해야할지 하는 일에 대해서는 관심도 생각도 없는 이 땅의 많은 성도들에게 이 말씀은 굉장한 경고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불공평하다고 하다고 생각될지도 모르지만 이것이 공평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주지 않으시고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시고서 요구하시며, 그것을 통해서 그의 믿음을 보고자 하시는 것이니까요. 


사람들은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서, 그리고 하나님 나라가 완전히 임하는 일에 대해서 그게 언제냐, 어디냐 하는 문제에만 관심이 많지만, 실제로 그런 관심은 마지막 날을 준비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도움이 되는 것은 한 가지입니다. 분명히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것이고, 우리는 그 때를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않고서, 그런 전제 위에서 항상 자신이 어떤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만이 그 날을 준비하는데 도움이 될 뿐입니다. 


우리는 말세를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말세에는 말세에 어울리는 삶의 방식이 있습니다. 그것은 돈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들을 삶의 목적으로 삼지 말고 그것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물질적인 헌신을 아끼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그저 ‘신앙’이라고 부르는 것을 지키는 일보다 더 중요합니다. 


우리 모두가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성도들로서 주님 주신 물질을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곳에 기꺼이 사용하여서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고 그 나라에서 영원히 사는 삶을 준비하는 지혜로은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