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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6.03.27. 주일오전 - 평안하냐(2016년 부활주일)



20160327SM (#1).mp3.zip





본문 : 마태복음 28장 1-10절



   

막달라 마리아와 또 다른 한 사람의 마리아. 이 두 사람은 예수님께서 무덤에 들어가리 때까지 지켜본 사람들이었고, 또 예수님의 무덤에 가장 먼저 찾아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에게는 예수님이 그만큼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난 삼일 동안의 시간은 두 사람에게 그만큼 더 슬프고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이 끝나자 마자 누구보다도 먼저 무덤으로 달려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두 사람이 보고 싶어했던 것은 예수님이 누워계신 무덤이었습니다. 이미 로마병사들이 무덤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먼 발치에서 무덤이라도 보려고 새벽같이 예수님의 무덤을 향해 달려왔습니다. 물론 두 사람은 무덤을 보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본 무덤은 그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무덤이었습니다. 


우선 두 사람은 무덤을 가로 막고 있었던 절망 만큼이나 커다란 돌이 저만치 옮겨져 있는 것과 그 위에 천사가 앉아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사실 천사는 두 사람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천사는 말했습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찾을 줄을 내가 알고 있었으니 너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는 이렇게 이야기를 이어 갔습니다. “그는 여기 계시지 않고 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다.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아라. 그리고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 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실 것이니 거기서 그 분을 뵙게 될 것이라고 꼭 전해라.” 


천사의 말대로 무덤은 비어 있었습니다. 그 안에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죽음만 겨우 가둘 수 있는 그 무덤은 더 이상 예수님의 큰 생명을 가둘 수가 없어서 큰 물고기가 요나를 뱉아 냈듯이 그렇게 예수님을 뱉아낼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여인들은 너무나 기뻤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두려움도 완전히 가시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여인들은 그 소식을 제자들에게 전하기 위해서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아마 여인들은 자신들이 뛰고 있는 것인지 무언가가 떠밀려서 움직이고 있는지 구분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얼마를 뛰었을까요? 아마도 생전 그렇게 뛰어 본적이 없는 여인들이 가쁜 숨을 고르려고 잠시 멈춰섰을 때 였던 것 같습니다. 두 사람 앞에는 어느 사이엔가 예수님이 서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마치 길에서 우연히 만난 친한 사람들에게 인사하듯 두 사람에게 인사를 건내셨습니다. “평안하냐?” 이 인사는 분명히 두 사람에게 평안을 빌어주시는 인사이기는 했지만 사실 그 당시로는 특별할 것이 하나도 없는 너무나 평범한 인사였습니다. 우리 말의 ‘안녕하세요?’나 ‘안녕?’ 정도되는 그런 인삿말이었으니까요. 


 너무나 사랑하고 존경하던 어떤 분이 갑자기 쓰러지셨습니다. 쓰러져서 사경을 헤매셨습니다. 그런데, 몇 날 며칠을 그렇게 누워계시던 분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셨다는 소식이 들려 왔습니다. 너무 기뻐서 만사 재쳐 놓고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랬더니 그 분이 침대에 앉아 뛰어 들어오는 나를 향해서 그저 빙긋이 웃음을 지으며 ‘안녕? 밥은 먹었어?’라고 인사를 건네옵니다. 성도 여러분, 만약 우리가 이런 상황을 진짜로 경험하게 된다면 우리의 마음은 어떨까요?


가장 믿고 의지했던 분, 자신의 삶을 새롭게 만들어 주셨던 분, 항상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셨고, 늘 영생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던 분, 언젠가 부터 나는 죽게 되겠지만 반드시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분, 그렇지만 모든 기대를 저버리고 가장 억울하고 비참한 죽음을 당하셨던 그 분이 그렇게 당당하게 눈앞에 서서 마치 어제 만났던 친구처럼 인사를 건네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 분이 건넨 인삿말이 그 동안 많이 무서웠겠다느니, 많이 힘들었겠다느니, 많이 절망스럽고 슬펐겠다느니 하는 그런 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평안하니?”라는 밋밋하고 평범한 짧은 한 마디였습니다. 이 세상에 그 어떤 인사가 우리 주님의 이 인사말을 대신할 수 있겠고 또 그 어떤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아마 이 세상에 주님께서 건넸던 그 인사만큼 두 사람을 더 기쁘게 하고 더 평안이 넘치게 해 주는 인사말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두 여인은 예수님을 발을 붙잡고 예수님을 경배했습니다. 이제 두 여인에게는 아무런 두려움도 아무런 거리낌도 없었으니까요.그렇게 여인들의 인사를 받으신 다음, 예수님께서는 여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무서워하지 말아라. 그리고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전해주거라. 거기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는 그렇게 그들 곁을 떠나가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오늘 우리 중에 계십니다. 그리고 오늘 주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에게도 똑같은 인사를 건네고 계십니다. “너희는 평안하냐? 너는 지금 평안하냐?”하고 말이지요. 어제 저녁 마지막으로 설교 준비를 하면서 저는 예수님께서 저에게 건네시는 이 평안의 인사, 이 축복의 인사 앞에 다시 한 번 멈춰 서서 제 속에 있는 평안함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이 말씀 속에서 저에게 계속해서 평안을 주고 계시는 동안에도 제 마음 속에 있는 평강이 그리 온전치 못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물론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어제 그 순간만큼은 주님이 건네시는 그 인사에 대해서 ‘네, 주님! 정말 평안합니다.’라고 거리낌 없이 응답해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반대로 말씀 속에서 내가 다시 평안할 수 있는 이유, 다시 예수님께 “네, 주님! 아주 평안합니다.”라고 대답해 드릴 수 있는 충분한 이유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의지해서 언제나 평강을 회복해야 하겠다고 마음을 다져 먹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평안할 수 있는 첫번째 이유는 지금 나에게 평안을 빌어주시는 분은 무덤 속에 계신 예수님이 아니라 이미 다시 살아나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죽음보다 우리를 더 크게 위협하는 것이 있을까요? 죽음보다 우리를 더 불안하게 하고 뒤흔들어 놓는 것이 또 있을까요? 자신은 죽는 것은 두렵지 않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자신은 살기는 살되 정말 사는 것 같이 살 수 없게 될까봐 그게 두렵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살게 된다면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합니다. 말만 들으면 그 사람은 정말 죽음은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사실 삶을 두려워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정말로 두려워 하는 것은 죽음입니다. 어떤 사람의 삶을 사는 것같지 않은 삶으로 바꾸어 놓는 것은 바로 그 사람의 삶 속에 있는 죽음을 닮은 것들이니까요. 그게 질병이든, 가난이든, 그 어떤 불행이든 그것을 그렇게도 두려워 하는 것은 그것들이 모두 죽음을 닮아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자신은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하는 것은 한 번도 진짜 죽음 앞에 서 보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그 죽음을 깨뜨리셨습니다. 무덤이 깨질 때, 예수님은 죽음도 함께 깨뜨리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은 단순히 예수님 한 분의 부활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부활의 첫 열매’였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이전에 태어났다면 우리는 부활을 믿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시기 전에 이 세상에는 다시 살아난 사람이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사로는 다시 살지 않았느냐, 나인성 과부의 아들은 다시 살지 않았느냐 하실 수도 있겠는데요. 그들은 부활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그저 잠시 다시 살려 놓으신 것입니다. 진짜 부활이 아니라 부활의 맛뵈기로 말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지금 없습니다. 다시 죽었습니다. 다시 사셨고 또 영원히 살아 계신 분은 예수님 한 분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영원히 죽음을 이기시고 깨뜨리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진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활을 믿을 수 있고 우리들이 부활할 것도 믿을 수 있습니다. 첫 열매가 열리면, 두번째 세번째 열매는 계속 열리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 앞에 서서 우리에게 평안을 빌어주시는 분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십니다.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 하는 죽음을 완전히 깨뜨려 다시는 사람들을 협박하지 못하게 해 주신 예수님 이십니다. 죽음이 깨졌으니 우리는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을 죽음처럼 만들어 버리는 죽음을 닮은 것들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지금도 우리에게 평안을 빌어주고 계시고, 우리는 결코 죽음에 완전히 먹히는 일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평안할 수 있는 두번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완전한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행하신 모든 일들, 특히 예수님의 십자가 제사를 모두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그것을 확실히 보증하는 증거로 부활이라는 도장을 찍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렇게 사시고 또 그렇게 돌아가신 이유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 주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렇다면 부활의 역할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온전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하나님의 인감도장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도장이 찍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하나님의 이름이 새겨진 그 누구도 지울 수 없는 도장이 찍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완전히 망하게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시험을 주실 때에도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시험 밖에는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심지어는 그 누구도 우리에게 손을 대지 못하게 해 주시겠다고까지 약속하셨습니다. 다른 이유가 아닙니다.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평안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평안할 수 있는 세 번째 이유는 우리가 항상 우리보다 먼저 가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여인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은 내가 먼저 갈릴리로 가서 기다릴테니까 거기서 만나자고 나머지 제자들에게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먼저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가서 제자들이 거기에 올 때까지 기다리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놀라운 몸을 가지게 되셨습니다. 순간이동도 하실 수 있고, 벽도 뚫으실 수 있는 그런 몸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그게 어디든지 항상 우리보다 먼저 가실 수 있으십니다. 그리고 항상 우리보다 먼저 앞서 가십니다. 그렇게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십니다. 물론 지금은 성령님을 통해서 그렇게 하고 계시지만요. 성도 여러분,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를 홀로 보내실까요? 우리가 어디로 갈 때, 그 분이 모르고 계시는 때가 있을까요? 비록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예측할 수 없는 정말 아프고 억울한 일도 많고, 이해할 수 없는 안타깝고 화나는 일들도 많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그 어디, 그 어떤 상황에서든 우리와 함께 계시고 또 거기 먼저 가 계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말씀대로 갈릴리로 먼저 가셨고, 거기서 제자들을 만나셨습니다. 그리고 처음 그들을 만나 제자로 부르셨을 때처럼 다시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맡기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낙심과 좌절에 빠진 제자들을 회복시키시고 제 자리로 돌려 보내 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낙심하고 실망했을 때 우리들을 다시 찾아오십니다. 다시 찾아 오셔서 우리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다시 제 자리로 돌려보내 주십니다. 언제나 그렇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평안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나면 우리의 삶은 많이 달라집니다. 첫째, 그 때부터 우리는 더 이상 혼자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함께 살게 됩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신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삶을 기뻐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도인 우리는 우리가 혼자라고 느낄 때, 믿음의 길을 나 혼자서 가고 있다고 느낄 때 제일 힘들어 집니다. 또 내가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 부르심에서 완전히 멀어졌다고 느낄 때, 성도로 살아가는 일에 대해서 낙심했을 때 제일 힘들어 집니다. 사실 이 두 가지 시험을 이기지 못해서 믿음의 길에서 아얘 멀어져 버리는 분들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홀로 두시는 적이 없으십니다. 언제나 우리와 함께 가시고 언제나 우리보다 먼저 가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낙심했을 때 다시 우리를 부르셔서 우리를 다시 처음처럼 회복시켜 주십니다. 항상 그렇게 하십니다. 우리가 우리를 낙심케 하는 상황 속에 있을 때, 우리 자신이나 상황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하면 우리는 언제나 다시 평강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우리의 삶과 믿음, 그리고 우리의 마음을 뒤흔드는 온갖 시험 속에서도 다시 평안할 수 있는 세번째 이유입니다. 


성도 여러분,  부활하신 예수님은 죽음을 완전히 깨뜨려 버리신 분이십니다. 죽음의 두려움을 완전히 해결해 주신 분이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께서 결코 포기 않으시고 완전히 보호하시고 끝까지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의 진짜 자녀가 되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마음껏 부르게 해 주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고 앞서 가시며 우리가 낙심했을 때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워 주시는 분이십니다. 지금 이 예수님,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평안을 물으시고, 또 평안을 빌어주고 계십니다. 


우리의 참 평안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만이 진짜로 능력있는 평안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 다시 사신 부활주일에 부활의 주님만이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참 평안을 얻으시고 또 회복하시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예수님이 부활하심에 감사드립시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우리는 모든 은혜들을 확실하게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2. 오늘도 주님은 우리에게 평안을 묻고 또 평안을 빌어주고 계십니다. 우리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능력이 있습니다. 그 평안은 세상은 줄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는, 그래서 빼앗을 수도 없는 평안입니다. 나에게 이 평안을 이미 주셨음을 믿는 마음으로 이제 이 평안을 되찾고 그 평안 가운데 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