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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6.07.10. 주일오전 - 새 사람을 입으라(에베소서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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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 에베소서 4장 17-24절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말들 중에  ‘…답다’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어떤 성질이나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뜻을 나타내는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요. 사실 요즘에는 사람들이 이 ‘…답다’는 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이 ‘…답다’라는 말이 어떤 사람이나 대상을 그 말로 묶어버릴 수가 있는데, 그 속에는 검증되지 않은 고정관념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남자답다’, ‘여자답다’라는 말이 아닌가 합니다. 우리가 이 말들을 생사용할 때마다 떠올리게 되는 ‘남자’와 ‘여자’의 상이 있게 마련인데, 그 상 자체가 올바르지 않은 경우, 남자다움이나 여자다움에 대해서 잘못된 생각을 품게 되고, 그것을 사람을 평가하는 잣대로 사용하게 되면 본의 아니게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을 힘들게 할 수 있습니다. 저는 대학시절에 제가 남자답지 못하다는 사실 때문에 굉장히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친구들은 보면 강하고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고 그랬는데, 저는 세심하고 상처 잘 받고 그렇게 당당하지도 못하고 그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점점 나이가 들고 또 사람에 대해서 알아가면서 그런 것들이 남자다움의 본질적인 평가기준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그 문제로부터 많이 자유로워질 수 있었습니다. 


분명히 ‘무엇 무엇답다’는 말은 어떤 것을 규정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답다’는 말은 자유나 다양성을 제한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적어도 어느 정도는 말이지요. 그렇지만 모든 것은 이렇게 규정되지 않으면 다른 것과 구별되거나 차별성을 가지지 못합니다. 또 그것 답게 존재하면서 그것만이 가질 수 있는 역할과 가치를 지닐 수 없게 됩니다. 동그라미는 동그라미 다워야 하고 네모는 네모 다워야 합니다. 네모가 동그랗고 동그라미가 네모난 모양이라면 그것은 서로 구별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그 고유의 가치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만히 ‘…답다’는 라는 말이 붙은 표현들을 살펴보면, 그 중에서 나쁜 말들은 없습니다. 긍정적인 의미를 가진 말들 뒤에만 이 말이 붙고, 대개 긍정적인 의미로만 사용됩니다. 반대로 ‘무엇 답지 않은 것’은 마땅히 가지고 있어야 하는 좋은 자질이나 특징을 지니지 못하다는 뜻이 되어서 과히 좋은 의미로 사용되지는 않습니다. 


성도 여러분, 사람은 사람다워야 할까요? 엄마는 엄마답고, 아빠는 아빠다워야 할까요? 학생은 학생답고 스승은 스승다워야 할까요? 정치가는 정치가 답고, 기업가는 기업가 다워야 하겠지요? 그렇겠지요? 그래야 우리가 사는 이 사회가 정말 사람사는 사회다운 그런 사회가 될 것입니다. 사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사회가 공공연히 ‘헬조선’이라도 불릴만큼 안타까운 모습이 된 이유는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이 저마다의 자신됨의 가치를 깨닫지 못하고,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다워지는 일에 소홀히 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반드시 그 ‘…다움’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또 지켜내야 할 사람들이 그 일에 무책임하고 무관심해졌기 때문에 우리가 사는 사회가 이렇게 어수선하고 살기가 힘들어진 것입니다. 


그러면, 성도 여러분, 성도는 어떨까요? 성도는 성도다워야 할까요? 믿는 사람들은 믿는 사람다운 모습을 가지고 있어야 할까요? 그렇지요? 성도는 성도 다워야 합니다. 믿는 사람들은 믿는 사람다워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 보시기에도 그렇고 사람들 보기에도 그렇고 우리와 우리 아닌 사람들이 구별될 수 있고, 또 우리들 자신의 가치를 귀한 존재로 여김받으며 복되고 풍성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의 인생이 가지는 풍성함과 온전함은 ‘그 사람 다움’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우리다움’, 그러니까 ‘성도다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 주고 있는데요. 바울에게 있어서 그것은 성도들이 자신의 삶의 틀을 바꾸도록 돕는 일을 의미했습니다. 사실 이것은 바울이 지금까지 계속해서 해 온 일입니다. 성도들의 생각의 큰 틀을 바꾸고, 관심의 큰 틀을 바꾸고, 그래서 인생의 목적이라는 틀까지 바르고 새롭게 바꾸는 일.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지금까지 에베소서를 통해 해 왔던 일이고, 또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도 하려고 하는 일입니다. 성도는 세세한 하나 하나의 행동이나 생각도 바뀌어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큰 틀’이 바뀌어야 합니다. 이 틀이 바뀌지 않으면 아무리 새로운 재료를 넣어도 계속해서 옛 틀이 만들어 내던 것과 똑같은 결과물들 밖에 만들어 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오랫동안 믿어도 그다지 확 달라진 삶을 살지 못하고 구별된 삶을 살지 못하는 이유는 여전이 예전의 틀을 그대로 가지고 있기 때문일 때가 많습니다.  


바울은 오늘 말씀 속에서 먼저 “옛 삶의 틀”에 대해서 말합니다. 제가 바울이 말하는 것을 “옛 삶의 틀”이라고 표현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지금은 찾아볼 수 없는 유행 지난 삶의 방식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이것은 시대를 막론하고 예수님을 믿지 않은 모든 사람들이 붙들고 살아왔고 또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는 가장 인기 있는 삶의 방식이고 원리입니다. 그리고 이미 예수를 믿은 사람들을 끊임 없이 유혹하고 실패하게 하는 삶의 방식이기도 합니다. 본문이 이것을 ‘옛 것’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단지 예수님 안에서 새 사람이 된 성도에게는 그것이 이미 지나가 버린 것, 철지나고 유행지난 옷처럼 어울리지 않고 매력 없는 삶의 방식이어야 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가 못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는 안되는 것이지만 ‘옛 삶의 틀’은 에베소의 성도들에게도 여전히 강력한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옛 삶의 틀을 버려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성도들은 마치 어깃장을 놓는 사춘기 아이처럼 “왜 그래야만 하는데? 왜 옛날에 살던대로 살면 안되는데?”하면서 볼멘 불만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들이 그렇게 떠나고 버리기를 힘들어 하는 그 “옛 삶의 틀”의 정체를 정확하게 밝혀주어야만 했습니다. 우선 사도 바울은 그것이 ‘이방인들의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여기서 ‘이방인’이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사람들을 말하는 것인데요. 바울은 이렇게 말함으로써 옛 삶의 틀이 근본적으로 믿는 사람에게는 어울릴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선언한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 엄중한 경고입니다. 이것은 네가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예수님을 알기 전의 옛 삶의 틀을 고집한다면 너는 실제로는 믿지 않는 사람일 수 있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형식과 실제는 엄연히 다릅니다. 그리고 형식은 실제가 뒷받침 될 때 비로소 의미와 가치를 가지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성도가 실제로 예전의 삶의 방식을 떠나는 일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성도는 옛 삶의 방식, 그러니까 믿지 않는 사람들의 방식을 고집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이미 그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이유 말고도 그러면 안되는 아주 실제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은 겉모습과는 상관없이 근본적으로 “마음의 허망한 것”을 따라서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무언가를 선택하는 것은 항상 그 사람의 가치관과 사고방식의 결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마음, 그러니까 가치관과 사고방식이 ‘허망’합니다. 그래서 정말로 자신에게 정말로 유익하고 자신의 삶을 든든하게 세워주는 것이 무엇인지 분별해 내지 못합니다. 그들은 마치 곱셈을 할 줄 모르면서 열심히 곱셈문제를 푸는 어린아이와도 같습니다. 그들이 선택하는 삶의 원칙과 방법이란 이런 상태에서 선택한 것이니 그 결과가 어떨지는 너무나 분명합니다. 그들의 사고방식과 가치관이 허망하니 그들의 삶 또한 허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그런 방식을 선택한다고 해서 거기 뭔가 있겠지 하고 그것을 덥썩 물어 버리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도 ‘마음의 허망한 것’을 따라 선택하게 되며, 우리의 삶도 허망해 집니다. 이것을 피하려면 우리는 우리에게는 이미 옛 것이 되어버린 그 길을 다시 걸으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성도 여러분, 정말 믿지 않는 사람들, 참된 믿음이 없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허망합니까? 그들의 사고방식과 가치관으로는 참된 것을 구별해 낼 수 없다고 생각되십니까? 사실 그 사람들 참 똑똑해 보이지 않나요? 자기에게 유익이 되는 것, 돈이 되는 것,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는 방법을 귀신같이 알고 있으니까요. 그러면 그들을 따라서 살아가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그게 더 안전하고 확실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보이지만, 사실 그것은 우리 눈에 띄는 것이 그런 모습이어서 그렇지 그들의 선택이 정말로 성공적인 경우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합니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특히 인류의 역사를 살펴 보면요. 모든 경제학자들이 가장 큰 호황을 예상할 때, 세계적인 경제공황이 찾아왔고, 사상가들이 사람에 대해서 가장 낙관적일 때 세계전쟁이 터지곤 했습니다. 사람들의 판단력은 이렇게 허망합니다. 과연 이런 사람들의 판단력을 믿고 그들이 살아가는 방향을 따라갈 수 있을까요? 그래도 안전할 것일까요? 


제가 예전에 기차를 타려 하다가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기차가 도착했길래 조금 일찍 기차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느긋하게 자리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제 자리에 이미 어떤 분이 앉아 있었습니다. 다시 기차에서 내려서 기차 번호와 칸 번호, 출발시간까지 확인하고 다시 기차에 올라 탔습니다. 그리고 다시 자리를 찾았습니다. 몇 번이나 티켓번호하고 자리번호를 확인했습니다. 제 자리가 확실했지요. 그래서 조심스럽게 “혹시 자리를 잘못 찾으신 것 아니세요? 여기 제 자리인 것 같은데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니라고 했습니다. 여기가 자신의 자리가 분명하다고 말했습니다. 자기 기차표까지 보여 주면서 말이지요.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기차 칸 번호도 맞고 자리 번호도 일치했습니다. 그래서 혹시나 하면서 기차번호를 확인해 보았습니다. 문제는 거기 있었습니다. 이 분이 다른 플랫폼에서 떠나는 다른 기차를 타셔야 하는데, 제가 타야 할 기차에 올라타서 자리 번호만 확인하고 앉아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선생님, 기차 번호가 틀린데요. 이것은 1234번 열차인데, 선생님은 1235번 열차를 타셔야 합니다.” 그제서야 그 분은 화들짝 놀라면서 빨리 짐을 챙겨서는 기차를 내려갔습니다. 성도 여러분, 혹시 우리가 여전히 매력을 느끼고 따르려고 하는 유혹을 느끼는 많은 사람들의 확신이 이런 종류의 확신은 아닐까요? 


바울은 그런 사람들의 상태에 대해서 계속 설명합니다.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의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나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상태이고 또 그들이 처해있는 참 안타까운 상황인데요. 그들의 마음은 진리에 대해서 단단하게 굳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 안에는 고집스러운 무지함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리고 그 무지함이 그들이 하나님의 생명을 거부하고 떠나게 만듭니다. 그들은 자신의 힘으로 인생과 세상의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이렇게 저렇게 궁리하며 애써 보지만 이미 하나님을 거절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버린 그들에게는 모든 것을 제대로 보고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이 허망한 것이고, 참된 것을 분별하고 바르게 선택할 수 없게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들의 삶과 존재는 점점 더 심각하게 망가집니다. 그들은 도덕적으로 무감각한 자가 됩니다. 윤리적으로 큰 잘못을 저질러도 그게 죄라고 느낄 수 있는 감각이 없어져 버립니다. 사람은 자신이 잘못한 것을 깨달을 때 당황스러워하게 마련인데, 그럴 수 있는 최소한의 감각조차 없어져 버립니다. 요즘 우리나라에서도 동성애 문제 때문에 난리입니다. 그 절정을 보여주는 것이 소위 퀴어 축제라고 할 수 있는데요. 저는 직접 가 보지는 않았지만, 그 사진들만 보는 것으로도 구역질이 나고 입에서 욕이 나왔습니다. 물론 그들의 존재 자체에 대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인권이라는 이름 하에 그리고 자유라는 미명하에 저지르는 지저분하고 저급한 행동들이 저를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차림새를 하고 그런 행동을 하면서 그렇게 당당하고 그렇게 자연스러울 수 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도 양해해 줄 수도 없었습니다. 여기서 그 모습까지 자세히 설명하지 못하는 점은 이해하실 줄로 생각합니다. 사실 동성애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온 것은 불과 20-30년 안팎의 일입니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동성애 문제는 이렇게 공공연하고 당연한 일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이것은 철저히 서구사회가 하나님으로부터 급격하게 떠나기 시작하면서 부터, 그래서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을 모든 것의 기준으로 삼기 시작하면서 부터 일어나기 시작한 일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니 죄라는 말이 무의미해 진 것입니다. 저는 성경을 읽다가 성경말씀이 어떻게 그렇게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정확하게 설명해 주는지 정말 소름이 끼칠 때가 많습니다. 19절 말씀만 해도 그렇습니다. “그들이 감각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우리 인간에 대한 얼마나 정확한 진단입니까? 


영혼의 상황이 이렇게 되고, 양심은 나병에 걸린 듯이 무감각해져 버렸으니 그가 걸어가는 길은 너무도 분명합니다. 이제 그를 움직이는 동기는 욕심 밖에 없고, 탐욕 밖에 없습니다. 그의 삶은 원하는 것을 얻고 소유하기 위해서 사는 것 이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깨끗하지 못한 더러운 방법이 자신의 욕심을 더 손쉽게 채워주니 그런 방법을 따라 살아가는데 거리낌이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 사람은 죄로 점철된 인생을 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물론 개인마자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것이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하나님 밖에 있는 인생의 실체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이 단순히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죄를 지적하고 정죄하기 위해서 쓰여진 것이 아니라 이미 믿는 우리같은 성도들에게 주신 말씀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 오늘 우리가 이 말씀 속에서 그저 옛 삶의 방식, 믿지 않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에 대한 지식을 얻는 데서 끝난다면 이 말씀은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이 되지 않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적용되어져서 우리가 “옛 삶의 틀”에 대해서 바르고 정확하게 알게 해 주고, 그래서 우리의 의지를 움직여 그 틀을 버리게 해 줄 때,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참으로 유익한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19절 말씀의 마지막 부분을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마지막 모습을 욕심을 따라 살며, 그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사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오늘 성도들 속에도 이 욕심에 대한 오해가 만연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욕심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바람직한 것으로까지 생각하는 그런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물론 예전에도 그랬지만 오늘처럼 이런 주장이 노골적으로 이루어지고 큰 공감대를 형성한 적은 없었습니다. 이런 영향을 받아서 인지 성도들까지도 욕심에 대한 바른 생각을 가지지 못하고 욕심을 여전히 세속적인 눈으로만 바라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 번 마음 속으로만 대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떻습니까? 성도 여러분. 욕심은 당연한 것일까요? 우리는 욕심을 따라 살고,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살아도 괜찮은 것일까요? 상식적으로는 그렇다고 생각되실 것입니다. 우리는 욕심이 이 세상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이라고 배워 왔고 욕심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배워 왔으니까요. 그런데, 그런 사고방식을 발전시킨 사람들은 결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것은 철저히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이 자신의 욕심을 합리화시키기 위해서 발전시킨 논리입니다.  


꽤 오랫동안 예수를 믿어도 성도들이 잘 모르고 오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독교 신앙이 자신의 욕심을 인정해주고 이루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한 오해입니다. 기독교는 절대로 욕심을 선한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탐심을 이기지 못해서 죄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탐심은 우상숭배이며 욕심이 잉태하면 죄가 되고 죄가 자라면 사망이 된다고 말하는 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이런 진리를 믿는 기독교 신앙이 욕심을 당연한 것이나 바람직한 것으로 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그런 욕심을 채워주시는 분이실 수가 없습니다. 제 말을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꼭 필요한 것은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욕심까지 채워주시지는 않습니다. 혹시 여러분에게 그런 경험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이고 그것이 기독교라고 오해하시면 안됩니다. 그러면 우리 신앙은 우상숭배가 되어 버립니다. 


‘욕심을 따라 살아가는 삶의 방식’은 우리가 취해야할 삶의 방식이 아니라 버리고 떠나야 할 옛 사람의 삶의 방식입니다. 그저 내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다 가져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또 내 욕심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달려가며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이방인들의 삶의 방식이며 우리가 벗어버려야 할 옛 사람의 모습입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또 예수님께 배운 사람들이라면 우리는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그런 삶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저 우리의 구원자로만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기는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닙니다. 예수님은 구원자이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구원을 받은 후에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가장 성공적이고 행복한 삶, 그러면서도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삶을 살 수 있는지를 보여주시는 우리의 모범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구원얻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배우고, 예수님께 배운 대로 흉내내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흉내낼 때 우리도 예수님처럼 성공적이고 아름답게, 참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절대로 욕심을 따라 살지 않으셨습니다. 세상을 다 준다는 유혹을 받으실 때도 절대로 그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어떻게 그러실 수 있으셨을까요? 무엇보다 그것이 하나님께 죄가 되기 때문이었겠지만, 예수님은 욕심의 실체를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셨고 그래서 욕심을 따라 사는 것이 가장 어리석은 것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22절을 보면 바울은 욕심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유혹의 욕심.”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속이는 욕심, 사기치는 욕심’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욕심의 가장 대표적인 특징을 속여서 빼앗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과연 욕심을 따라 사는 것이 지혜로운 것일까요? 그것이 정말 효율적이고 행복하게 사는 방법이 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그럴 수가 없습니다. 당장은 그런 것 같지만 결국에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준다고 하고서 빼앗아 갑니다. 채운다고 하고서 비워 버립니다. 흥하게 해준다고 하고서 망하게 만듭니다. 살게 해 준다고 하고서 죽게 만듭니다. 행복하게 만들어 주겠다고 하고서 오히려 평안과 만족을 빼앗아 갑니다. 무엇보다도 욕심은 우리 삶 속에서 하나님이 사라지게 만듭니다. 욕심이 근본적인 죄이고, 그 죄가 인류를 이토록 비참하고 힘겹게 살아가게 만든 장본인이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우리는 대번에 욕심이 우리 삶에 어떤 흔적을 남기게 될 지 쉽게 알아차릴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거듭나기 이전의 옛 자아가 가지고 있었던 삶의 방식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그 낡은 옛 옷, 그 누더기같은 옷을 벗어 던져야 합니다. 그 옷이 아무리 편하다고 해도, 아무리 좋아하는 옷이라고 해도 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인생은 사기당한 인생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 대신 우리는 새 옷을 입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형상이라는 새로운 옷으로 갈아 입고 새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새 옷이 익숙해 지고 그 옷을 정말로 편안해 하게 되는 데에는 시간이 걸리듯이 우리가 새 사람으로 옷입고, 그 옷이 편안해 질 때까지는 시간이 필요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원래부터 의를 좋아하고 진리를 사랑하며 거룩함을 즐거워 하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주님께서 주신 새 옷을 계속해서 입고 입고 또 입어야 합니다. 그 옷에 익숙해지고, 그 옷이 편안해 지고, 그 옷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옷이 될 때까지 계속해서 그 옷만 입으려고 의식적으로 애써야 합니다. 그 때가 되면 내가 그렇게 좋아하던 예전의 그 옷은 쳐다 보기도 싫어질 것입니다. 간혹 가다가 옷 장에 걸려 있는 그 옷을 보면 한 번 입어볼까 하다가도 지금 입고 있는 옷이 더 좋은 줄 알기 때문에 피식 웃어 넘길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언제 우리가 우리 다울 수 있을까요? 언제 우리가 우리답게 구별된 삶을 살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영광과 은혜를 누릴 수 있을까요? 그것은 우리가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으로 옷 입을 때입니다. 허황된 마음에서 나오는, 나를 속이는 욕심을 따라 살아가는 삶을 벗어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을 때,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지키기 위해 진리를 따라 거룩하게 구별된 삶을 살 때 입니다. 이제 구차한 옛 자아의 옷을 벗어버리고 날마다 예수님을 닮은 새로운 자아로 옷 입으시기 바랍니다. 그 옷이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의 모습이 될 때까지 그 옷을 계속 입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새 옷을 입고 살아서, 이 세상에서는 허망하지 않은 삶을 살고 나중에는 예수님처럼 꽉찬 인생을 가지고 주님 앞에 서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마음의 허망한 욕심을 따라, 그 욕심을 채우기 위한 삶을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속는 인생입니다. 사탄에게 사기당하는 인생입니다. 이제는 욕심을 따라 살지 않고 욕심을 다스리며 살겠습니다. 


  1. 날마다 그리스도 옷입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의롭고 거룩하게 살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처럼 성공적이고 풍성한 인생 살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