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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6.07.22. 새벽예배 - 성경읽기와 묵상(눅0157-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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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일 : 2016년 7월 22일 금요일



 


1장 1절부터 56절까지는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잉태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세례 요한의 어머니인 엘리사벳과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가 만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에서는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의 탄생 이야기 속에서 특별하게 기록되고 있는 것은 바로 요한이이라는 이름입니다. 아이가 태어나고 할례를 받자 엘리사벳의 친족과 이웃들은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사가랴라고 아이의 이름을 지으려고 했습니다. 그만큼 아버지인 사갸라가 사람들의 사랑과 신뢰를 받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머니인 엘리사벳은 아이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짓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번에는 아버지인 사가랴에게로 가서 아이의 이름을 어떻게 지을 것인가를 물었습니다. 엘리사벳과 사가랴는 공교롭게도 그 동안 한 번도 새로 태어날 아기의 이름에 대해서 서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었습니다. 사가랴는 천사의 말대로 아이가 태어날 것이라는 소식을 들은 날부터 그 날까지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서판을 달라고 해서 그 위에 이름을 써서 보여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그 서판 위에서 본 이름은 ‘요한’이었습니다. 이 일 때문에 사람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더 놀라운 일은 서판 위에 아이의 이름을 기록하는 순간 사가랴가 다시 말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요한이라는 이름의 뜻은 ‘자비로운 여호와’ 혹은 ‘여호와는 자비하시다’라는 뜻입니다. 요한이 태어나기 전에 이스라엘은 거의 500년 동안 선지자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야 말로 영적인 암흑기였습니다. 로마의 지배를 받으면서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도 최악의 시기를 보내야 했습니다. 그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원했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목말라 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비’가 임하였음을 선포하는 ‘요한’을 보내셨습니다. 요한의 이름이 그렇게 중요한 이유, 평범한 요한의 이름 자체가 기적의 이름이 되어야 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요한은 이제 드디어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자비가 임하고 있음을 알리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야기는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로 넘어 갑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 로마의 황제는 아구스도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세금을 제대로 거둬들이고 자기 나라의 세를 확인하기 위해서 자신의 제국 내의 모든 사람들에게 호적을 하라는 영을 내렸습니다. 이런 황제가 다스리는 세상, 그리고 그런 로마제국이 다스리는 세상에 하나님의 자비란 없었습니다. 거기에는 힘과 억압만이 있었지요. 그래서 예수님의 탄생은 이 세상을 위한 소망과 위로였습니다. 


목자들에게 나타난 천사는 예수님의 탄생소식을 알려 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는 표적이니라” 


천사는 다윗의 동네에 구주가 나셨다고 전했습니다. 이것은 나실 이가 너희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야시며, 다윗과 같은 왕이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왕은 전혀 왕처럼 이 세상에 오시지 않았습니다. 마치 들판의 목동이었던 다윗처럼, 지금 천사들로 부터 그 왕의 탄생소식을 듣고 있는 그들처럼 전혀 왕과는 상관이 없는 모습이로 이 세상오 오셨습니다. 원래 표적이라는 말은 무언가를 드러내는 기적과 같은 일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만큼 놀랍고 특별한 일이 되어야만 ‘표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천사가 ‘표적’이라고 말한 것은 전혀 ‘표적’이 아닙니다. 그저 갓난 아이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것이니까요. 그렇지만 세상이 이보다 더 큰 기적, 이보다 더 놀라운 표적은 없습니다. 세상을 구하는 왕, 이스라엘의 메시야이신 주님, 그러니까 하나님이 오시는데 그렇게 작은 아기로, 가장 평범하고 낮은 자리에서 나셔서 거기 그렇게 뉘어 있다니 말이지요. 


그 작은 아기 안에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가득 차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위한 위로와 이 세상을 위한 소망이 흘러 넘칩니다. 그 아기 안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래서 이렇게 누워계신 아기보다 더 큰 표적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힘과 억압으로 다스리려고 오신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모든 왕중의 왕이셨지만 이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자비로 오셨고, 또 그 자비로 이 세상을 고치시고 돌봐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이 세상에 그렇게 작고 힘 없고, 스스로를 방어할 수도 없는 ‘아기’보다 그런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더 잘 드러낼 표적은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려는 사람들은 그래서 능력을 생각하고 무언가 강한 것들, 엄청난 일들을 생각하기 전에 이 ‘아기’를 먼저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그 아기로부터 출발해야만 그 아기의 백성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이 세상에 그저 평범한 아기로 오신 예수님, 그렇지만 그렇게 때문에 우리에게 하나님의 참된 자비하심이 될 수 있으셨던 그 예수님을 많이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아기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표적’을 보시기 바랍니다. 구유에 누워계신 아기 예수님이 전해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가 풍성한 이 아침, 그리고 오늘 하루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