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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6.07.24. 주일오전 예배 - 하나님을 본 받는 자가 되고2(에베소서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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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 에베소서 4장 25절-5장 2절





지난 주일에는 우리가 벗어 버려야 할 옛 사람의 모습 중에서 거짓말과 화를 내는 일에 대한 주님의 교훈을 살펴 보았습니다. 이런 말씀 드리면 뭐 내가 맨날 거짓말만 하고 화만 내는 사람인가 하시겠지만, 어떻게 한 주간 삶에 끼어들어오는 거짓을 잘 막아내시고 불쑥 불쑥 솟아 오르는 분노를 잘 다루어 내셨습니까? 그 부분에 있어서 진전이 있으셨습니까? 아마 다른 때보다 이 두 가지에 더 신경쓰며 사신 분들이 계신다면 그 덕분에 거짓과 분노를 많이 피하셨겠지만, 그러면서도 “야. 이거 정말 쉽지 않구나!”하셨을 것입니다. 거짓과 분노는 우리의 삶에 가장 쉽게 끼어들어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해를 주는 것들 중에서 대표적인 것들입니다. 눈 앞으로 공이 날아오면 저절로 내 눈이 감겨 버리는 것처럼 거짓과 분노는 우리의 무의식적인 습관처럼 되어 있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알아차리기도 쉽지 않고 다루어 내기도 쉽지가 않지요.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새 사람을 입으라고 하시면서 다른 어떤 것보다 이 두 가지를 우선적으로 거론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이 두 가지가 예수님 안에서 새 사람이 된 우리들이 시급하게 벗어버려야 할 옛 사람의 습관이기 때문에 이 두 가지를 제일 먼저 거론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옛 사람의 습관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으로 옷입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거짓과 분노의 문제를 하나님 앞에서 잘 다루어 내셔서 언제나 참된 것을 말하고 온유함 가운데 모든 사람들을 대하는 하나님을 닮은 하나님의 자녀들로 빚어져 가시기를 바랍니다. 


거짓과 분노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 한 후, 사도 바울은 ‘도둑질’이라는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바울은 이 일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우리가 보기에는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에게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이 조금은 의아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의 성도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는 것은 예수를 믿고 나서도 여전히 도둑질을 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았다는 뜻이 될테니까요. 물론 그랬습니다. 에베소 성도들 중에는 예수를 믿고 나서도 여전히 도둑질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도둑질에 대해서 말할 수 밖에 없었지요. 그렇지만 바울이 한 말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우리는 그 당시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관습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 당시 하인들이나 종들, 그리고 남의 일을 맡아서 해 주는 사람들 자기 주인이나 일을 맡긴 사람의 소유물 중의 일부를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자기 주머니에 넣곤 했다고 하는데요. 그것은 그 당시 종들이나 하인들처럼 남의 일을 해 주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생각 때문입니다. 기록을 보면 그들은 이렇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나는 가난하고 없이 산다. 그렇지만 우리 주인은, 나에게 일을 맡긴 사람은 부자다. 그러니 내가 조금 손을 댄다고 해도 아무런 문제가 될 게 없다.’고 말입니다. 


물론 주인들도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아랫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고, 그래서 그런 정도의 도둑질은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문제는 예수를 믿고 이미 세례를 받아 자신이 예수님과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고백하는 사람들 중에서 여전히 그런 못된 습관을 버리지 못한 사람들이 상당수 남아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도둑질이라는 인식이 크게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그것이 도둑질이라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바울이 그렇게 이야기하는 이유는 성도는 새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새로운 기준으로 바라볼 줄 아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옛 사람이 아닙니다. 이미 새 사람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다 괜찮다고 한다고 해서 나도 괜찮다고 하면 안됩니다. 그러기 전에 따져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과연 이것을 하나님도 괜찮다고 하실까, 성경도 괜찮다고 하는가 말입니다. 심지어는 나의 양심에 전혀 거리낌이 없는 문제라고 해도 다시 한 번 그렇게 따져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양심은 100퍼센트 믿을만한 안내자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어떻게 보면 그것이 도둑질인지도 모르면서 도둑질을 하고 있었던 성도들에게 우선은 더 이상은 절대로 도둑질을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리고는 거기서 한 걸음 크게 더 나아가서 이렇게 말합니다.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이미 자신의 직업 속에 상식처럼 스며 들어 있는 도둑질을 그만 두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면 예전에 비해서 자신이 얻을 수 있는 것이 현저하게 줄어들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남들도 다 그렇게 하는 일을 혼자서 하지 않는다는 것은 더더욱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일을 쉽게 해 줄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직업과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생각 자체를 바꾸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직업’에 대한 여러가지 고상한 이야기를 하지만, 실제로는 직업을 그저 생계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조금 적극적인 경우에는 성공의 수단으로 생각하구요. 그래서 왜 그렇게 힘들고 어렵게 스트레스 받으면서 일하냐고 물으면 대부분은 먹고 살기 위해서, 성공하기 위해서라고 대답합니다. 물론 직업은 생계의 수단입니다. 또 성공을 가져다 주는 통로이기도 하지요. 그런데요 여러분, 우리가 만약 우리의 직업을 이런 식으로만 생각하면 어떻게 될까요? 그러면 그저 일 적게 하고 돈 많이 버는 직업이 제일 좋은 직업이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직업을 그렇게만 이해하면 우리의 직업은 불의한 일들에 노출되기 시작하고 또 유혹을 받기 시작합니다. 일 적게 하고 돈 많이 벌면 되니까, 내가 바라는 성공만 얻으면 되니까 그게 내가 직업을 가진 제일 큰 목적이니까 다른 가치있는 생각이나 목적들이 끼어들 자리가 없어지게 되고, 직업을 통해 받는 유혹을 이길 힘을 빼앗기게 됩니다. 사실 직업의 영역에 그렇게 많은 불법들과 죄가 끼어드는 이유는 바로 직업에 중심에 ‘나의 필요’와 ‘나의 성공’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우리의 직업을 바울의 말을 따라 ‘가난한 사람들을 주게하기 위한 것’으로,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을 섬기고 유익하게 하는 수단’으로 다시 생각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만약 우리가 먹고 살고 성공하는 것보다 그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할 수 있다면 이 세상에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요? 며칠 전에 이탈리아의 기업문화에 대한 다큐멘터리 한 편을 보았는데 그 내용이 저에게는 참 충격적이기도 하고 신선하기도 했습니다. 이 예를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는 것만으로도 직업과 일에 대한 바른 생각이 우리가 사는 세상을 얼마나 많이 바꿀 수 있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미국과 이탈리아는 노동생산성이 굉장히 높은 편에 속하는 나라들입니다. 그런데, 두 나라의 기업문화는 정말 많이 다릅니다. 미국은 효율중심입니다. 그래서 기업의 오너들이나 운영자들이 노동자들에게 될 수 있는대로 많은 일을 시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을 잘 하는 것으로 알고 있지요. 그래서 노동자들은 소득은 높아도 일을 하면서 그다지 행복해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탈리아에서는 많은 기업들이 그렇게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 다큐멘터리를 찍었던 미국의 영화 감독이 이탈리아의 아주 유명한 명품 의류 회사에 갔습니다. 작업장  안에서는 계속해서 클래식 음악이 흘러 나오고 있었고,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은 그 음악을 들으며 몸을 움직이며, 정말 행복한 표정으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던 노래가 멈추자 단 10초의 망설임도 없이 모든 사람들이 작업대 위에 자신이 하던 일을 내려놓고 우르르 작업장을 빠져 나갔습니다. 점심시간이 되어서 점심을 먹으러 나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몰려간  곳은 식당이 아니라 회사에서 거리가 좀 있는 동료가 사는 집이었습니다. 그 집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그 때부터 점심을 요리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는 마치 파티를 하는 것처럼 식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점심시간이 두 시간이나 되기 때문입니다. 참 부럽지요. 그리고, 이탈리아에서는 일년에 유급휴가가 80일입니다. 그것도 올해 다 사용하지 않으면 내년으로 넘어가서 내년에 또 사용할 수 있습니다. 출산휴가는 두 달인데, 이게 유급휴가인 것은 물론이고 그 두 달은 부부에게 주어지는 시간이기 때문에 둘 중에 누가 사용해도 좋도록 그렇게 되어 있었습니다. 정말 대단하지요? 그 감독도 많이 놀란 듯했습니다. 그 감독이 회사를 운영하는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당신들도 미국처럼 하면 훨씬 더 돈을 많이 벌 수 있을텐데 왜 그렇게 하지 않느냐고 말입니다. 그랬더니 회사의 오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돈은 더 많이 벌어서 무얼하죠? 여기에는 저 분들의 웃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서로 어머니의 안부를 물을 수 있는 인간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면 충분한 거 아닙니까? 직원들의 복지는 저 분들의 권리입니다.” 저는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이탈리아 사람들이라고 천사는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직장과 직업을 이해하는 방식이 달랐습니다. 특히 회사의 오너들 중에는 자신의 기업을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이 행복을 얻을 수 있고 또 얻어야만 하는 그런 곳으로 인식하고 있었고, 자신은 그 일을 위해서 어떻게 보면 직원들을 ‘섬기는’ 사람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 기업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행복해 하며 일할 수 있고 그런 그들을 보면서 기업의 오너들도 행복해 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직업에 대한 생각을 바꾸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그리고 직업과 일에 대한 생각을 바꾸면 그것은 우리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돕고 섬길 수 있는 도구와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아담과 하와가 직업이 있었을까요, 없었을까요? 있었습니다. 그러면 직업이 무엇이었을까요? ‘동산 관리인’입니다. 에덴 동산에 있는 모든 것을 가꾸고 돌보면서 그런 것들이 더 아름다워지게 하고 더 풍요로워지게 하는 것이 그들의 직업이었습니다. 만약 두 사람이 죄를 짓지 않고서 자녀를 낳아 계속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에덴에 살게 되었다면 동산 뿐만 아니라 서로를 똑같이 섬기고 돌보는 일이 모든 사람들의 ‘직업’이 되었을 것이고, 모두가 자신의 직업을 통해서 서로가 서로를 섬기며 행복하게 살았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만약 사람들이 자신의 직업을 그저 생계나 성공의 수단으로 생각하지 않고, 이 세상의 일원으로서 세상을 섬기고 사람들을 돌보는 수단으로 생각한다면,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게 된다면 어떨까요? 그러면 욕심을 낼 필요가 없어집니다. 그리고 그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바둥거리거나 또 옳지 않은 방법까지 동원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어떤 모양으로건 도둑질을 생각할 필요 자체가 없어집니다. 세상에 남을 돕고 섬기는 선한 일을 하기 위해서 필요 이상으로 욕심을 내거나 악한 일을 하려고 할 사람은 없을테니까요. 그리고 서로가 서로로 인해, 서로의 ‘직업’으로 인해 행복해 질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 ”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우선 우리가 자신의 직업과 일에 대한 생각 자체를 바꾸기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필요를 채우고, 그저 내가 더 잘 살고, 성공하고… 이런 것에서 다른 사람들을 돌보고 섬기며,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한 것으로 직업 자체에 대한 우리의 ‘목적’이 달라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탈리아 사람들이 그저 상식과 다른 사람들을 향한 배려만으로 그 정도까지 할 수 있다면, 애초에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일’과 ‘직업’을 만드시고 우리에게 직업을 주신 이유가 그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우리들은 충분히 우리의 생각을 그렇게 바꿀 수 있고 또 바꿔야 할 것입니다. 


그 다음에 바울이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가 “자기 손으로 수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성도는 어떤 일을 직업으로 골라야 할까요? 과연 어떤 일이 성도에게 적당한 직업일까요? 성도는 자기 손으로 땀흘려 일할 수 있는 직업을 골라야 합니다. 성도에게는 정당한 댓가를 지불해야만 감당해 낼 수 있는 그런 직업이 가장 적당한 직업입니다. 우리는 거의 매일 들려오는 부정부패에 대한 소식을 듣습니다. 그런 소식들을 들을 때마다 얼마나 마음이 아프고 실망스러운지 모릅니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그 모든 부정부패들이 다름 아니라 ‘직업’의 영역에서 그들의 ‘직업’ 때문에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요? 왜 사람들의 직업이 그런 악하고 안타까운 일의 이유가 되고 있을까요? 그것은 사람들이 직업을 선택할 때나 그 직업을 통해 어떤 역할을 감당할 때, 정당한 댓가를 지불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 손으로 땀흘려 수고하는 일의 가치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만약 모든 사람들이 자기 손으로 정당하게 일하고 그 열매로 자기 손에 쥐어지는 것들로 만족할 수 있다면, 그런 직업을 좋은 직업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면 직업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악한 일들과 부정부패는 대부분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꿈같은 이야기인지도 모릅니다. 모두가 다 그렇게 될 수는 없을테니까 말이죠. 그렇지만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이라도 자신의 직업에 대해서 성경대로 생각하고 성경의 가르침대로 선택하려고 애쓴다면 그만큼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아름답고 정직한 곳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만약 우리의 작은 노력을 통해 이 세상이 조금이라도 그렇게 회복 될 수 있다면 우리들은 그런 일들을 가치있게 생각하고, 그런 일들을 평생의 일로 선택하고, 또 평생을 땀흘리며 수고하며 일하는 것을 기뻐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성도가 ‘땀흘려 수고할 수 있는’ 직업을 찾고 또 그 일을 열심히 정직하게 감당하며 사는 것. 그것은 절대로 어리석은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도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삶을 가장 가치있고 보람있게 만들 수 있는 방법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흘리는 성도들의 거룩하고 정직한 땀으로 아파하고 신음하고 있는 세상을 치유하시고 회복시켜 가시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선한 일을 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두 가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첫째, 성도는 선한 직업을 가져야 합니다. 둘째 그 선한 직업을 선한 방식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우선 성도의 직업 자체가 악한 것이거나 악한 일과 연관되어 있으면 안됩니다. 혹시라도 자신의 직업이 조금이라도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면 성도는 될 수 있는대로 빨리 다른 직업을 찾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 100퍼센트 깨끗한 직업이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성도는 최선을 다해서 그런 직업을 찾아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하는 일 자체가 의롭고 선하지 못하다면 그 일이 남기게 될 결과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악은 항상 ‘마이너스’입니다. 결국에는 그렇게 됩니다. 악이 마지막 까지 플러스가 되는 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직업은 무엇보다도 선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도는 선한 직업을 선한 방법으로 감당해 내야 합니다. 아무리 선한 일이라고 해도 선하지 않은 방식으로 하게 되면 그 일은 더 이상 선한 일로 남아있을 수 없고, 그래서 그 일은 세상과 나의 인생에 마이너스가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든 사람을 고치시자 유대인들이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일을 한다고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대답하셨습니다. 그 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창세기를 보면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다 만드신 후에 쉼을 가지신 날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안식일에도 일하신다고 말씀하셨고, 그래서 예수님도 하나님 처럼 일할 수 밖에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에 하나님께서 일하신다는 말이 조금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에도 쉬지 않고 일하십니다. 그러실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아담과 하와가 저지른 죄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후에  이 세상에 죄가 들어왔고 그 죄가 계속해서 이 세상과 사람들을 병들게 하고 망가뜨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그런 사람들과 이 세상을 고치시고 새롭게 하셔야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죄 때문에 안식을 빼앗겨 버린 사람들과 이 세상에 안식을 주시기 위해서 계속 ‘일’하셔야만 합니다. 예수님도 그랬습니다. 예수님도 안식일에 쉬실 수가 없으셨습니다. 만물이 안식해야 할 안식일에도 병 때문에 몸도 영혼도 전혀 안식할 수 없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너무나 많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처럼 예수님도 안식일에도 일하실 수 밖에 없으셨습니다. 그들을 구원하고 그들에게 안식을 주시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 속에서 우리가 직업을 통해 이 세상에서 감당해야 할 우리의 진짜 ‘일’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안식일에도 쉬지 않고 일하셨습니다. 그것은 죄 때문에 병들고 고통하는 이 세상을 고치시고 그런 세상에 쉼을 주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일하시고, 예수님이 일하신 것처럼 우리들에게도 ‘일’을 주시고 ‘직업’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그 직업을 통해 사람들을 섬기고 세상을 유익하게 하고, 그 일을 통해 병들고 고통받는 세상을 돌보게 하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일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닮은 것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셨던 일들을 흉내내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던지, 또 어떤 직업을 가지든지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진 ‘일’이 그런 일이 되도록 애쓰고 힘써야 합니다. 여러분이 직장에서, 생업의 현장에서 얼마나 힘들게 일하시는지, 또 얼마나 스트레스가 많은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 ‘일’을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주고, 이 세상을 돌보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일’로 받아들이고 또 그렇게 해 낼 수 있다면, 일이 주는 피곤함과 스트레스는 오히려 좀 더 줄어들지 않을까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직업은 단순히 우리의 생계의 수단이 아닙니다. 우리가 성공하기 위한 방편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직업을 통해 하나님 처럼 일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을 흉내내며 일하기를 원하십니다. 사람들을 섬기며 이 세상을 돌보기 위해서, 바르고 정직한 일을 선택해서 최선을 다해서 일하기를 원하십니다.  


오늘은 성도의 ‘직업’과 ‘일’과 관련해서 성도가 입어야 할 새 사람의 옷이 무엇인지를 살펴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예수님도 일하셨습니다. 우리도 일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직업에 있어서도, 우리가 하는 일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닮아가야 하고 예수님을 흉내내야 합니다. 편의상 직업에 대해서만 주로 말씀을 나누었지만, 우리가 ‘일’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들은 사실 우리가 하나님을 닮아가는 수단이고, 또 그렇게 이 세상을 섬기는 가장 중요한 수단입니다. 가사를 돌보는 ‘일’, 자녀를 키우는 ‘일’, 학생으로서 공부를 하는 ‘일’, 교회 안팎에서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일’ 등등이 모두 그런 의미를 지닌 일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가 오는 한 주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직업’과 ‘일’들에 대해서 더 많이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시고 허락하신 모든 ‘일’들을 통해서, 특히 ‘직업’을 통해서 하나님을 흉내내며 살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처럼 사람들을 섬기고 세상을 유익하게 하는 하나님의 참된 ‘일꾼’들이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우리의 직업과 일을 통해서 사람을 돕고 세상을 치유하는 하나님 닮은 일꾼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