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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6.07.31. 주일오전 - 하나님을 본 받는 자가 되고(에베소서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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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 에베소서 4장 25절-5장 2절





지난 주일에 우리는 성도의 직업과 일에 대한 주님의 말씀을 살펴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믿지 않는 사람들과는 다른 목적을 가지고 다르게 일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일’을 다른 사람들을 섬기고 이 세상을 유익하게 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하라고 하셨습니다. 직장이나 일이 우리 인생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정말 대단합니다. 인생의 가장 중요한 시기의 대부분을 직장에서 일을 하면서 보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터에서 우리가 하나님처럼 일하고 하나님을 닮아가는 일은 그만큼 중요한 일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포기하지 마시고 꼭 일터에서도 다른 목적을 가지고 다르게 일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먹고 사는 문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내가 나에게 일을 주시고 직장을 주신 하나님의 뜻에 맞게 일하면,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 모든 것을 더해주시는 우리의 아버지이시니까요. 


오늘 우리가 살펴볼 말씀은 성도의 ‘언어생활’에 대한 것입니다. 성도는 자신의 직업이나 하는 일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닮아가야 하지만 언어생활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이 세상을 ‘위해서’ 일하셨고, 이 세상을 ‘위해서’ 말씀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이 두 가지로 이 세상을 만드시고 지키시고 또 움직여 가셨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사람도 ‘일’과 ‘말’ 이 두 가지를 통해서 이 세상과 거기 사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며 삽니다. 두 가지를 빼면 우리가 이 세상을 위해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도구 자체가 없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일 뿐만 아니라 말에 있어서도 하나님을 흉내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처럼 우리가 사는 세상을 아름답게 하고 사람들을 유익하게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본문의 말씀을 통해 이 문제를 좀 공부해 보려고 합니다. 


  1. 대원칙 : 더러운 말을 하지 말고 선한 말을 하라


우선 성경이 우리의 언어생활에 대해서 알려주는 대원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도의 말은 ‘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말이 선한 말일까요? 듣기 좋은 말? 부드러운 말? 아름다운 말? 물론 그런 말도 선한 말입니다. 그리고 모름지기 사람들의 말이란 다 그래야 마땅합니다. 그렇지만, 성경이 말하는 ‘선한 말’은 단순히 그런 말이 아닙니다. 29절 뒤쪽을 보면 선한 말에 대한 아주 분명한 설명이 나오는데요. 우리가 이 말씀에 따라서 우리의 말을 선택하고 또 말을 하게 될 때, 우리의 말은 선한 말이 될 수 있습니다. 29절로 가셔서 “오직…”이라고 되어 있는 부분부터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선한 말은 무엇보다도 ‘세우는 말’입니다. 우리가 가진 성경에는 ‘세운다’는 말 앞에 ‘덕을’이라는 말이 있지만 원래는 그 말이 없이 그냥 세운다는 말만 있습니다. 덕을 세운다는 말보다 훨씬 더 크고 광범위한 표현입니다. 우리의 말은 ‘세우는 말’이 되어야 합니다. 그 말이 무슨 말이든지 우리의 말이 들려지는 곳에서, 모든 것을 세우는 말, 교회를 세우고, 가정을 세우고, 사람을 세우고, 또 세상을 세우는 말이 되는 말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말이 이렇게 모든 것을 세우는 선한 말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을 주신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 우리의 모든 것이 바뀌게 됩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획기적으로 변하는 것이 우리 인생의 목적인데요. 그 때부터 우리 인생의 목적과 중심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바뀝니다. 그래서 당연히 우리가 하는 말의 의미나 목적도 달라지게 됩니다. 이전에 우리의 말은 주로 의사소통이나 자기를 표현하고 주장하는 도구였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믿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말을 전혀 다른 목적으로 사용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때부터 우리의 말을 하나님의 은혜를 이 세상에 흘려 보내는 파이프라인으로 사용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는 항상 무너진 곳을 세우고, 고장난 곳을 회복시킵니다. 그러니까 그런 하나님의 은혜를 담는 우리의 말도 세우는 말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조금 실제적인 문제로 넘어가서 그렇다면 우리의 말은 어떻게 하면 더러운 말이 되지 않고 선한 말이 될 수 있느냐, 선한 말이 되어서 모든 것을 세우고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는 통로가 될 수 있겠느냐 하는 문제를 살펴 보겠습니다. 


2. 악독과 노함,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을 버리라. 


바울이 이 일을 위해서 추천하는 첫번째 방법은 더러운 말이 나오게 만드는 마음과 태도를 ‘버리라’는 것입니다. 안에 있는 더러운 것을 버리지 않고는 그 안에서 선한 말이 나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버리라고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들입니다. 잘 들으시면서 내 안에 이런 것들은 없는지 잘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먼저 악독입니다. 악독은 화해를 거절하는 분한 마음을 말합니다. 내가 당한 만큼, 내가 아픈 만큼 되돌려 주기 전에는 관계를 회복하지 않기로 작정한 마음이 바로 악독입니다. 둘째는 노함과 분냄입니다. 노함은 다른 사람에 대한 적개심 때문에 폭탄이 터지듯이 터져 나오는 분노이고, 분냄은 그저 속으로 품고 있는 분노입니다. 세번째로 ‘떠드는 것’은 모두가 들으라고 큰 소리로 떠뜨는 사람의 자기 주장을 의미합니다. 네번째로 ‘비방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비난하거나 함부로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첫번째와 두번째의 것은 다른 사람이 나에게 잘못한 것 때문에 생겨나는 좋지 못한 감정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번째와 네번째의 것은 자기 중심적인 사람이 내가 옳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 쉽게 취하게 되는 행동입니다. 바울은 우리 안에 이런 감정과 이런 태도가 있다면 이런 것들을 모든 종류의 악의와 함께 버려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의 말은 세우고 회복시키는 말이 아니라 허물어 뜨리고 무너뜨리는 말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한 동안 마음이 좋지 않은 상태로 지내게 될 때가 있습니다. 어떤 일이나 혹은 어떤 한 사람 때문에 기분이 상하고 상처를 입어서 그렇게 되기도 하고 또 별 이유도 없이 그렇게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혹시 나중에 그런 감정이 회복되고 나서 그럴 때 여러분이 했던 말들을 되돌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렇게 해 보면요. 정말 가슴이 많이 아프고 부끄러워 집니다. 그렇게 해 보면 내가 했던 말들 중에는 해서는 안될 말들, 그런 식으로 하면 안되는 말들이 너무나 많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 안타깝게도 정작 내가 그런 감정을 품게 된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엉뚱한 사람들이 내가 한 말의 피해자가 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분노를 품게 되는 것은 우리 속 마음이 상처를 입고 허물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이 공격을 받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분노를 품은 상태에서 말을 하게 되면 그 말이 다른 사람들의 마음과 삶을 허물게 됩니다. 말 자체가 틀린 말이어서가 아닙니다. 특별히 공격적인 말이기 때문에 그런 것도 아니지요. 분명히 ‘아’ 다르고 ‘어’다른데, ‘아’라고 해야할 때, 내 속에 있는 분노가 ‘어’라고 말하게 만들어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 말로 다른 사람이 받은 상처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나의 말로 허물어진 사람의 마음에 대한 우리의 책임이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이 우리가 분노를 버려야 하는 첫번째 이유입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건, 속에 남아있는 것이건 될 수 있는대로 빨리 분노를 버려야 합니다. 


두번째로 성경은 허물고 무너뜨리는 더러운 말을 하지 않으려면 우리가 ‘자기 의’를 버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자기 의에서 나오는 말은 고집스러워지고 언성이 높아지게 되고,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정죄하는 말이 되기 쉽습니다. ‘자기 의’는 어쨋든 내가 옳다는 것을 상대방이 인정해 주어야 만족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언성을 높인다고 아닌 것이 맞는 것이 될 수도 없고, 맞는 것이 틀린 것이 될 수도 없습니다. 또 내가 옳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내가 옳은 것과 다른 사람이 틀린 것은 실은 같은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생각을 해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서로가 옳다고 막 다투고 있는데 둘 다 틀린 말을 하고 있을 수도 있고, 또 이래도 되고 저래도 괜찮은 문제로 그렇게 다투고 있을 수도 있다고 말입니다. 


제가 예전에 사역하던 교회에서 여전도사님과 언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어느 날 그 전도사님과 배가 목에 좋다는 주제로 대화를 나누게 되었는데, 겨울과일은 모두 다 성질이 따뜻하다고 믿고 있었던 저는 당연히 배도 다른 겨울 과일들처럼 성질이 따뜻하니까 목에 좋은 것이라고 했고, 그 전도사님은 배가 성질이 차기 때문에 목에 있는 열을 내려줘서 목에 좋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저 나름대로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결국에는 조금 큰 소리로 주장을 해서 결국 그 논쟁은 저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전쟁이 끝나고 나서 그래도 정확하게 확인을 해 보려고 슬쩍 인터넷을 찾아 보았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정말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찾아보니 그 전도사님의 이야기가 맞았던 것입니다. 제가 사과 했을까요, 안 했을까요? 못했습니다. 너무 너무 창피해서 사과도 못했습니다. 사실 정말 우스운 일입니다. 배가 성질이 차든 덥든 뭐가 중요합니까? 그게 목에 좋다는 게 중요하지요. 그리고 또 그게 두 사람이 그렇게 옥신 각신 싸울 꺼리나 됩니까? 그런데, 그 날은 그랬습니다. 저는 사실 어떤 교회에서 권사님 두 분이 국수를 삶는 방법을 가지고 한참을 옥신 각신하시다가 서로 얼굴이 굳어지는 모습을 본 적도 있습니다. 국수… 이렇게 삶으나 저렇게 삶으나 삶아 먹으면 되지, 결국 어떻게 삶아 놓든 맛있게 두 그릇씩 먹을텐데 우리는 왜 그러고 사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말을 하다가 내 언성이 높아지고 자꾸 남의 잘못을 지적하고 비난하게 될 때, 혹시 내가 또 나만 옳다는 자기 의에 빠져가고 있지는 않은지 한 번쯤 되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마도 대개는 그런 이유 때문에 그렇게 하고 있기가 쉬울 것입니다. 그럴 때는 살짝 언성을 낮추시고 될 수 있는대로 남의 이야기는 하지 말아 보십시오. 그러면 우리 말을 더러운 말로 만드는 ‘자기 의’라는 덫에서 빠져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 모든 것들을 악의와 함께 버려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악의’는 무엇입니까? 이런 것입니다. 동네 골목에서 자동차가 빠른 속도로 옆을 스쳐 지나갑니다. 본능적으로 이렇게 말하게 되죠. “가다가 확 빵꾸나 나 버려라” 이럴 때 마음 속에 있는 것이 바로 ‘악의’입니다. 남이 안되고 불행해지기를 바라는 마음 말이죠. 마음에 이런 마음이 있을 때는 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그런 마음에서 나오는 말 치고 더하고 세우는 말은 없기때문입니다. 꼭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마음 속에 나쁜 마음이 있을 때, 또 나 중심적인 생각이 있을 때는 그것부터 처리해야 합니다. 그런 감정과 생각이 있을 때는 말을 아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악의를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말이 허물로 부수는 더러운 말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3. 친절과 불쌍히 여기는 마음, 그리고 용서를 취하라


 우리의 말이 더러운 말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버려야 할 것을 말한 후, 바울은 이번에는 우리의 말이 선한 말이 되기 위해서 우리가 취해야 할 것에 대해서 말해 줍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 ‘하기’를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 같이 ‘하라’” 바울은 먼저 ‘서로에게 친절하게 하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말을 할 때는 서로 친절하게 하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성경에서 친절이란 실제적인 행동을 통해 밖으로 드러난 사랑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우리가 말을 할 때, 그 말을 통해서 우리의 사랑이 표현되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말은 기본적을 사랑을 표현하는 도구입니다. 미움이나 적대감, 분노를 표현하는 도구가 아니지요. 물론 때로는 말로 분노를 표현할 수도 있고, 말을 통해 격한 감정이 드러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말로 화를 내도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내고, 어쩔 수 없이 잘잘못을 가릴 때에도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해야 합니다. 우리의 말로 무슨 표현을 어떻게 하든 그 말이 사랑에서 나온, 사랑을 담은 말이 되도록 애써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사랑에서 흘러나온 친절한 말이 선한 말이 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 다음에 ‘불쌍히 여기며…’라고 말합니다. 어떤 분이 말했습니다. 누군가가 진짜로 불쌍해 지면 더 이상 문제될 것이 없다고 말이죠. 처음에 저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잘 몰랐습니다. 그런데, 정말 경험을 해 보니 그랬습니다. 참 미웠습니다. 생각만 해도 화가 났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그 사람이 불쌍히 지는 겁니다. 훨씬 더 훌륭하게, 훨씬 더 아름답고 향기롭게 살 수 있는데, 왜 저렇게 밖에 못 사는가 생각하니 그 사람이 참 불쌍했습니다. 그랬더니 미움이 사그라 들었습니다. 그 사람을 생각해도 화가 나질 않았습니다. 부부지간에도 그렇다고 하지요? 어느날 갑자기 그 웬수가 불쌍해 지면 된답니다. ‘저 인간도 저렇게 사느라 고생이 참 많다.’, ‘저 사람도 나 만나서 애 많이 쓰지’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그 때부터는 밉지도 않고 원망도 생기지 않는다고 합니다. 


불쌍하지 않은데 어떻게 불쌍하게 여기느냐고 말씀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람은 누구나 다 불쌍합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만 생각해 볼까요? 이 세상에서 예수 믿으면서 그래도 하나님 뜻대로 사느라고 얼마나 끙끙대며 애씁니까? 사랑스럽지 않은 사람 사랑해 보려고 애쓰고, 다들 참지 않는데도 예수님 때문에 참느라고 애쓰고, 예수님 이름에 누가 되지 않으려고 양보하며 사느라고 애쓰고, 일터에서 양심 지킨다고 손해 보며 애쓰고, 자식들 기를 때도 욕심과 싸우느라 애쓰고… 우리 학생들은 안 그렇습니까? 다들 컨닝하는데도 그러지 않으려고 애쓰고, 주일 하루 쉬는데 교회 오느라 애쓰고, 다른 애들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일들 절제하느라 애쓰고, 무엇보다도 예수믿는 부모 만나 안되는 것 많아 애쓰고… 무엇보다 죄인으로 태어나 죄짓지 않으며 사느라고 애쓰니 우리들은 모두 얼마나 불쌍합니까? 또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얼마나 귀한 존재인 줄 모릅니다. 그저 우연히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인 줄 알지요. 또 그래서 자신이 얼마나 고상하고 아름답게 살 수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저 사람들이 말하는대로, 자신이 생각하고 욕망하는대로 살아가지요. 또 그러면서도 자신이 어디로 향해 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얼마나 불쌍합니까? 


불쌍히 여긴다는 말을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흔히들 생각하는 것처럼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며 느끼는 감정이 아닙니다. 저 사람도 나와 똑같은 고민을 가진 성도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느끼는 감정이고, 저 사람도 나와 똑같은 한계 많고 부족함 많은 인간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느끼는 감정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이런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서 나오는 말이라면 그 말은 절대로 상대방을 깎고 허무는 말이 될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을 격려하고 세우고 유익하게 하기위해서 하는 참으로 선한 말이 될 것입니다. 


바울이 마지막으로 말하는 것은 서로 용서해야 우리 말이 선한 말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용서란 어떤 사람의 잘못 때문에 실제로 내가 상처를 입고 손해를 보았을 때, 그 사람을 향한 분노와 복수심, 그리고 쓴 마음을 모두 내려놓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용서하는 것만큼 힘든 일이 없는 것 같습니다. 성도들 중에서도 용서하라는 말을 들으면 화를 내시는 분들도 계실 정도니까요. 해도 해도 안되니까,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이 아닌데도, 정말 용서하고 싶은데도 안되니까 그러시는 것이겠지요. 충분히 이해는 갑니다. 그런데, 용서는 충분히 가능합니다. 쉽지는 않지만 가능합니다. 어떻게 가능할까요? 그것은 바로 나를 용서해 주신 하나님의 용서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서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습니다. 다 아시다시피 우리가 먼저 용서를 구해서, 우리가 죄에서 돌이켰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로 작정했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먼저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또, 하나님은 지금도 나를 용서하고 계십니다. 믿음도 별로 없지만, 예수 믿고 나아진 것 거의 없지만, 내 삶 속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만한 것 하나 없지만, 정말 내 속에는 선한 것 하나 없지만 그래도 지금도 여전히 나를 용서하고 계십니다.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얼마나 악하고 부족한 존재인지를 제대로 보게 되고, 그런 나를 지금도 용서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용서를 제대로 깨닫게 된다면, 우리는 번번히 용서의 문제로 우리를 좌절시키고 있는 그 사람들도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될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에게는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부족하고 형편 없는 존재인지를 알기 때문에 생겨나는 깊은 애통함이 있습니까?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용서때문에 솟아오르는 감격과 기쁨이 있습니까? 부끄럽지만 저만 해도 저의 죄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통곡해 본 것이 언제인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할 정도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향한 우리의 말이 선한 말이 되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그들을 용서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들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를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용서를 잘 헤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하기를 원한다고 해도 우리는 우리 힘으로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의 크기와 깊이를 알 때, 우리는 그 은혜의 힘으로만 누군가를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용서하는 사람이 될 때에만, 우리의 말 또한 하나님의 말씀처럼 다른 사람들을 세우고 회복시키는 선한 말이 될 수 있습니다. 


4. 결어 : 세우고 회복시키는 말의 청지기가 되자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을 주셨습니다. 이 말은 사람들과 세상을 세우고 회복시키라고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말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흘려 보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처럼 말하고 언어에 있어서도 하나님을 닮아갈 수 있는 귀한 축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의 언어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그 귀한 언어 속에 섞여 있으면 안되는 것들이 섞여 있지는 않습니까? 그리고 꼭 들어가 있어야 할 것이 빠져 있지는 않나요? 오늘도 우리는 교회 안에서 많은 말들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가정으로, 일터로 돌아가서도 수많은 말들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그 말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하여 사람들을 세우고, 세상을 회복시키는 선한 말이 되게 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을 주시고, 말을 하게 하신 그 귀한 목적을 따라 꼭 그렇게 해 보십시오. 그러면 우리의 부족한 말도 하나님의 말처럼 영광스럽고 능력있는 말이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말이 그렇게 아름답고 그렇게 능력있는 선한 말이 되어서 우리의 말이 들려지는 모든 곳에서 상처입고 무너진 모든 것을 세우고 회복시키는 은혜로 가득 찬 하나님의 언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마음 속에 섞여 있는 악한 감정들과 자기의 의를 내버리게 하소서. 
  2. 사랑으로 말하게 하시고 불쌍히 여기며 용서하게 하소서.
  3. 그래서 우리의 말이 하나님의 말처럼 세우고 고치는 선한 말이 되게 하소서. 
  4. 그 동안의 나의 언어생활에 대해서 돌아보면서 기도하겠습니다.